사는 대로 사네 가는 대로 사네
그냥 되는 대로 사네
하고 싶은 일을 생각해봤다. 제일 하고 싶은 건 해외여행이지만 아무래도 이 시국 여행은 조심스럽다. 아쉬운 대로 큼지막한 이벤트 말고 일상에서 할 만한 일들부터 생각해봤다. 나는 시간을 어떻게 보내고 싶었더라, 뭘 하고 싶어 했더라. 어떤 삶을 사는 사람이 되고 싶었더라.
얼마 전에 떠오른 기억인데 청소년 시절, 나에게 나는 남들과 다르다며 남다른 사람이 될 거 같다는 덕담을 받은 적이 있다. 지나가는 말도 아니고 손으로 쓴 글씨로. 오래 잊고 지냈는데 그 말이 다시 생각이 났다. 나는 누군가의 기대만큼 남다르지 못하게 살고 있어서. 그 말을 강박처럼 되새김질할 생각은 아니고 그냥, 그냥. 그러고 싶은데 그렇게 살지 못하는 거라면 반성을 해야 할 것 같았다.
나는 특정 직업을 가진 어떤 사람이 꿈이 아니었다. 생각해보니 나는 매번 그때의 내가 되고 싶은 사람으로 살고 싶었지 어떠한 형태로 존재하려던 건 아니었던 것 같다. 회사 때문에 몇 년 동안 여러 가지 형태로 쉼 없이 스트레스를 받고 있지만, 사실 내가 제일 신경 쓰고 걱정하는 건 어떤 직업, 어떤 연봉을 받는 사람이 아니었다. 책과 멀어지는 삶, 피곤에 밀려나기만 하는 하고 싶은 일, 정착하지 못하고 스쳐지 나가는 수많은 취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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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겨울엔 뜨개질에 손을 대려고 했었다. 어릴 적 엄마에게 배운 대바늘, 인터넷을 보고 혼자 애썼던 위빙, 집에 실도 있고 바늘도 있어서 유튜브를 보고 기초단계만 반복하고 끝난 코바늘. 그 전에는 자수가 있었고 그 이전에는.. 그 이전에도 항상 무언가가 있었다. 한때는 화관을 만들다 손가락에 글루건을 떨어뜨려 화상도 입어봤고, 리본을 사모아서 헤어밴드를 만들어서 고 다닌 적도 있다. 지금은 어느 어플 장바구니에 다채로운 레이스가 들어가 있다.
나는 꾸준하지 않으면서도 항상 뭘 만들어보려고 했다. 취미라기엔 어설픈데 남들보다는 항상 뭔가를 하고 있는 이도 저도 아닌 애매한 상태. 그 애매함으로 아주 오래전부터 재봉틀을 들일까 말까를 고민하고 있다. 재봉틀을 들이면 원단부터 부자재까지 사모으기만 하고 방치할 그림이 그려지는데 그래도 이 정도 고민했으면 이제 사도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든다. 의외로 재봉틀이 진짜로 취미가 될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코로나의 여파인지 가끔 가던 식당이 영업을 종료했다. 친구와 가야지, 가야지 하면서 한없이 미루는 사이 문을 닫아버렸다. 왜 돌아오는 주말도 아니고, 달이 넘어가기 전도 아니고, 계절이 바뀌기 전도 아니라 막연한 나중으로 미뤘을까. 멀지도 않은 곳 가는 게 무슨 일이라고. 그래서 좋아하는 다른 식당이 사라지거나 변하기 전에 아무런 구실도 없이 시간을 내서 가보려고 한다.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평일 점심을 지나 손님이 없는 한가한 시간대에 가보려고 한다.
따뜻한 한 끼 식사를 마치고 나서 근처의 중고서점에 가서 책을 고르고, 책이 든 가방을 든 손이 시리게 느껴지면 차나 디저트가 맛있는 카페에 들어가서 몸을 녹이고 당을 충전하는 거다. 그리고 퇴근 간이 가까워지기 전에 급하게 지하철을 타고 집에 돌아가거나 퇴근 간을 넘겨 늦은 시간 번잡하지 않게 귀가하기. 분명 별거 아닌 일인데 평일에 이랬던 날이 왜 이렇게 까마득하게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많은 사람이 그랬든 나 역시 어릴 적 피아노 학원에 다녔지만 피아노를 칠 수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피아노를 만져는 봤다고 할 정도. 예전부터 한 번씩 악기를 배우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직장인은 운동을 다니는 것만으로도 큰일을 해내고 있다고 느끼기 때문에 악기 레슨은 늘 알아보기만 하고 끝난다. 어릴 때 접근성이 좋은 오카리나를 배울까 했고 경제력이 생긴 후로는 기타를 배울까 싶기도 했고 이따금 성인 피아노 교습을 하는 곳을 보면 마저 배워볼까 싶기도 했는데 늘 생각으로만 존재했다. 그러다가 사람들이 쉽게 칼림바에 입문한다는 얘기를 들었고 그만큼 당근에 칼림바 매물이 많이 나온다는 얘기에 검색해봤다가 혹하기 시작했다. 때마침 다음 달에 집 근처에서 칼림바 수업이 시작된다고 해서 칼림바를 사면 수업을 듣지 않을까 하는, 우선 쟁여두기 본능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악기가 아니더라도 도서관의 프로그램이나 원데이 클래스나 뭘 배워야겠다는 생각은 항상 있었다. 아르바이트하던 대학생 시절에 근처 꽃집에서 원데이 클래스를 진행한다고 써 붙이는 걸 종종 보며 지나쳤는데 알바생에게 꽃꽂이 원데이 클래스란 너무 비싸게 느껴졌다. 나중에 돈을 벌거든 해봐야지 했는데 낡고 지친 직장인이 되어서 주말은 침대와 보내게 되었다. 일 년 중 하루 시간 내는 게 뭐 일이라고 그걸 안 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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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인생에서 돈은 중요하다. 돈벌이도 중요하고 어떻게 쓰는지도 중요하고 노후대비도 중요하고 저축도 중요하고 하여튼 먹고살기 위해서는 돈이 없어서는 안 되니까 무척 중요하다. 하지만 아무리 돈이 있더라도 의지와 시간이 없으면 의미 있는 행위를 별로 하지 못하게 된다. 냅다 돈부터 던져놓고 몸이 따라가게 해야 하는데 늘 침대에서 핸드폰을 들고 의미 없는 소비인 쇼핑만 해댄다. 그게 의미 있는 것도, 그걸 하고 싶었던 것도 아닌데.
그래서 앞으로는 돈이 좀 들더라도 최대한 뭔갈 하는 사람이 되려고 한다. 기분을 달래기 위해 의미 없는 걸 사 모으기보다 조금이라도 가능성이 있는 걸 모으고 싶다. 그게 경험이든 취미든 스쳐 지나가는 것이든 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