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기록으로 감정 다루기

글 입력 2021.11.12 1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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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듯하게 살아가다 보면 놓치게 되는 것들이 생기기 마련이다. 원체 꼼꼼한 성격도 아니라 한창 바쁠 때면 물건을 잃어버린다거나 중요한 사항을 잊어버린다거나 하는 징크스가 있는데, 이 정도로 바쁜 일정을 소화하다 보면 문득 생각의 골이 깊어지지 않는 저 자신을 보곤 한다. 여기서 말하는 생각의 골이란 사색의 의미와 상통한다. 내가 오늘 느꼈던 감정이 무엇인지, 어떤 생각이 들었는지에 대해 깊게 사색하는 것이 통 어려워지는 것이다.

 

사색을 즐기는 편인 나도 몇 달간 학업에 치어살면서 사색할 기회가 차츰 줄어들었다. 좀 씁쓸했다. 졸업 전시도 '사색의 중요성을 알리고, 현대인들에게 사색할 기회를 제공하자!'라는 취지로 기획한 나조차도 사색할 여유가 없다는 게 웃겼기 때문이다. 바삐 살아가다 보면 내 일상의 틈에 생각이 끼어틀 자리가 없다는 걸 얼마 전에 처음 깨달았다.  사색이라는 건 잠잘 시간도 줄여가며 일하는 사람들에게는 사치라고 느껴질 수 있겠구나. 그때 전시에서는 단발성의 유희적 콘텐츠만 즐기는 세태를 비판하고자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왜 사람들이 유희적 콘텐츠만 즐기는지를 파고들게 된다. 개개인의 선택에 따른 문제가 아니라, 사회 구조적으로 따져봐야 할 문제로 접근해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왜 사색해야 하는가를 묻는다면, 몇 년 전의 나는 자기발전의 측면만을 답했을 것이다. 실제로도 오랫동안 사색을 통해서 나의 심지가 단단해졌다는 느낌을 받기도 했고, 한 문제를 다각도로 생각할 힘 또한 기를 수 있었던 건 사실이니까. 그러나 요즘은, 사색이 발전을 촉진하는 역할만을 담당하고 있지는 않은 듯하다. 얼마 전에 참여했던 글쓰기-제본 워크숍에서 그를 실감했는데, 감정을 글감으로 삼아 에세이를 집필하고 이를 나만의 책으로 만드는 작업이었던 그 워크숍에서 내가 잡은 주제는 바로 '어지러움'이었다. 한창 나를 휘몰아치던 감정이 바로 어지러움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뭘 하고 있는지, 뭘 해야 할지, 뭘 하고 싶은지도 잘 모를 때에 느껴지는 어지러움이 나를 한때 강렬하게 감쌌고, 내 나름대로 이를 정리해보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어지러움이라는 게 내 생애 처음 맛본 감정이라고 판단하며 써 내린 글들은 출판물이 됐다. 레이아웃도 직접 내가 짜보고, 표지와 색지도 내가 직접 골랐고, 바느질까지 내가 했다. 내 감정이 언어가 되고, 시각적으로 표현이 되면서 나도 모르게 어지러움을 나의 페르소나쯤으로 여기게 되었다. 감정을 이렇게까지 소중하게 여겨본 적이 없었는데. 참 신기했다.

 

그로부터 몇 주가 지났다. 졸업 논문을 쓰고 여러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사색과 점점 멀어지던 와중에 워크숍을 마무리하는 낭독회가 열렸다. 사실 그동안 바빠서 내 책을 다시 열어본 적도 없었는데, 낭독회에 참석하러 가서 전시된 내 책을 만져보았다. 문득 낯설었다. 내가 이런 감정을 느꼈다고? 대체 왜 그런 감정을 느꼈었지? 내 작품이 아닌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요즘의 나와는 전혀 다른 성격의 출판물이었다. 그 이질감이 실로 생경했다. 내가 지금 하나도 느끼지 못하는 감정을 마주하니 이질적이었고, 한 편으로는 그래서 기록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스쳤다.

 

사실 감정이라는 게 그런 것 같다. 시시각각 달라져서 약간의 실루엣만 비슷할 뿐이지 세세한 온도는 늘 다른 것. 비스무리한 감정들을 뭉뚱그려서 한 단어로 표현할 뿐이지, 그 깊이를 파고 들어가 보면 미세하게 맛이 다른 것. 즐거움, 행복, 피곤함 따위의 단어의 틀 안에 내 마음을 집어넣으려고 하니까 모양이 맞지 않은 틀에다가 억지로 집어넣은 듯한 느낌을 줄곧 받았는데 감정을 글로 정리하면서는 나만의 언어로 감정을 재창조하는 과정에 들어섰다고 생각한다. 이래서 사람들이 계속해서 기록하려는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었다.

 

사색이 어렵다면 한순간에 '탁' 치고 올라오는 뭣 모를 그 감정을 메모하는 연습을 해보면 어떨까. 나의 메모장엔 185개의 메모가 들어있다. 어디선가 내 안에서 큰 파동이 일어날 때가 생기면 그걸 와다다다 정리해서 메모하는 습관이 생겼다. 그럼 시간이 흘러서 완전히 다른 상태의 내가 그 글을 마주할 땐 흥미롭기만 할 뿐 아니라, 또 비스무리한 감정을 직면했을 때 대처할 가이드라인이 되어준다. 그때는 그 감정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알 수 없어서 끙끙 앓았다면, 기록물이 된 나의 감정들을 마주하고 나서는 내가 내 편이 된 듯한 위안을 느끼곤 한다. 뭐야. 이때도 이랬어? 나도 지금 이 상태인데.

 

감정을 다루는 일은 나를 다루는 일이기도 하다. 사색 또한 나를 다루는 연습의 연장 선상이기도 하고. 그러나 우리가 사는 이 사회가 너무도 바빠서, 충분히 자기 자신을 다루는 연습이 부족한 채로 사회의 일원이 되는 것 같다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되는 요즘이다. 자기 사색의 중요성을 강조하던 나도 내 감정을 보살피지 못할 때가 너무도 많다. 그래서 우리는 써야 한다. 쓰고 다듬어서 감정을 자기의 언어로 만들어야 하고, 예상치 못하게 내 감정을 직면하게 되는 순간의 대책을 세워야 한다. 따라서 자기감정을 다루기엔 너무나 바쁜 사람들에게, 사소한 기록이 그들에게 도움이 되리라 믿어본다. 그들이 무너지지 않도록.

 

 

[이보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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