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역사를 대하는 고민 - 라스트 듀얼

잘 고증된 역사 소설의 매력
글 입력 2021.11.05 2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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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 시절 역사 공부를 좋아하지 않은 학생 대부분에게 암기는 고역이었다. 물론 커다란 역사적 사건을 배우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각종 사건이 일어난 연도를 달달 외우다 보면 역사 속 중요한 사건은 한 구석으로 치워지고 만다.


역사 공부하며 가끔은 숫자로 적힌 이야기가 아니라 삶이 궁금할 때가 있다. 조선 시대엔 화장실을 어떻게 사용했을지, 비누는 언제부터 나왔고 세안은 어떤 식으로 진행되었을지 따위의 중요하지 않고 도움이 되는 지식도 아니지만 알고 싶은 것들. 이런 호기심을 한 번이라도 느껴본 사람에게 책 “라스트 듀얼”은 흥미로울 것이다.

 


만약 이 결투 재판에서 그녀의 챔피언이 적수를 죽여 승리를 거둔다면 그녀는 자유의 몸이 될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그가 죽임을 당해서 결투에 진다면, 그녀는 위증하고 거짓 서약을 한 죄로 산 채로 화형에 처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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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트 듀얼”은 강간 의혹 사건의 가해자를 가리기 위한 결투 재판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는 실제 프랑스에서 마지막으로 열린 결투 재판으로 역사가가 약 10년에 걸쳐 찾은 사료를 스릴러적 요소와 결합해 소설로 재탄생시켰다.

 

소설은 프랑스와 잉글랜드의 전쟁으로 인한 당시의 정세부터 시작해 카루주 가와 르그리 가의 우정과 배신에 이르기까지 현실에 기반해 세세하게 풀어나간다. 그뿐만 아니라 결투 재판 과정, 갑주와 무기, 귀족의 지위와 궁정의 정치 등 폭넓은 지식을 드러내며 독자들을 14세기 당시로 끌어들인다.



르그리는 결혼해서 여러 아들을 낳았다. 그런 그가 툭하면 외간 여자에게 지분거리는 버릇이 있는 호색한이었으며 (중세의 종 기사나 성직자에게는 드문 일이 아니었다) 피에르 백작이 정부들과 벌이는 난잡한 연회에도 곧잘 참가했음을 시사하는 기록도 여기저기에 남아 있다. _39쪽

 

 

자크 르그리와 장 드 카루주는 오래전부터 친분을 쌓아왔고, 피에르 백작의 봉신이 되었을 무렵에는 깊은 우정과 신뢰로 맺어진 사이였다. 카루주는 아내인 잔이 아들을 낳자 자크에게 아들의 대부가 되어 달라고 부탁했다. 이것은 중세에서는, 특히 귀족 사회에서는 크나큰 명예로 간주되었다. 대부는 실질적으로 가족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갓 태어난 갓난아기의 무방비한 영혼을 지키기 위해 최대한 빠른 시기에 행해지던 유아세례에서 자크는 갓난아기를 안고 침례반 앞에 섰다. 사제가 성수에 카루주의 아기를 담그자 르그리는 악마로부터 아기를 지키고, 향후 7년 동안 이 아기를 "물과, 불과, 말발굽과, 사냥개의 이빨"로부터 지키겠다고 맹세했다. _39쪽

 

 

마르그리트는 고백을 마친 후 남편의 명예를 위해서 복수를 해 달라고 간청했다. 마르그리트는 이번 사건으로 인해 남편의 명예와 명성이 유지되든 실추되든 간에, 앞으로는 자신도 남편과 무조건 같은 길을 나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은 결혼에 의해 이미 부부가 되었지만, 지금부터는 그보다 훨씬 더 긴밀한 운명 공동체가 되어 바깥세상에 대처해야 했다. 봉건법에서 이런 범죄를 고발할 경우, 남편의 지원과 변호가 없으면 아내인 자신에게는 아무런 법적 권리도 없다는 사실을 마르그리트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_120쪽

 

 

“라스트 듀얼”은 내용을 묘사하며 고증에 기반한 증거를 덧붙이며 당시 문화를 설명한다. 이런 설명조의 문체가 기존 소설과 다른 탓에 초반에는 낯설게 느껴진다. 하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꼼꼼한 해설에 궁금증이 해소되어 속 시원하다. 낯선 방식의 서술이 다소 어색하지만, 상황을 정확하게 이해하게 되면서 몰입도를 높인다.


작가는 그러면서도 상상력을 덧붙이길 주저하지 않는다. 때론 괄호를 통해 인물의 대사를 표현하고, 때론 그들의 심리 상황을 추측하기도 한다. 심리를 추측하거나 현실에 기반하지 않는 내용을 표현할 때 이랬을 수도 있겠다는 설 중 하나로 제안할 뿐 확신하지 않는 것 역시 이 소설의 특색이다.


이러한 형식은 독자에게 어디까지가 상상이고 어디까지가 실제 사건인지 혼란을 겪게 하지 않으면서, 작가의 입맛대로 현실을 왜곡하는 일을 줄인다. 대부분은 작가는 방관적인 역사가의 시선으로 상황을 묘사한다. 이미 당사자가 모두 죽어버린 지금, “이 사건의 진실을 정말로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셈이니 작가의 조심성은 현실의 사건을 다루는 소설에 적합하다.

 

 

흥분한 군중의 시선은 두 용맹스러운 기사와 화려하게 치장한 신하들을 거느린 젊은 왕뿐만 아니라, 한 여성을 향해 있었다. 젊고 아름다운 그녀는 머리에서 발끝까지 검은 상복을 두르고, 역시 위병들에게 둘러싸인 채로 검은 천으로 뒤덮인 높다란 처형대에 홀로 앉아 결투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자신을 향한 군중의 시선을 느끼며, 곧 시작될 시련에 대비해서 마음을 굳게 다지려고 노력하며 그녀는 평평하게 다져진 넓은 결투장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녀의 운명이 피로 각인될 장소를.

만약 이 결투 재판에서 그녀의 챔피언이 적수를 죽여 승리를 거둔다면 그녀는 자유의 몸이 될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그가 죽임을 당해서 결투에 진다면, 그녀는 거짓 선서를 한 죄로 자기 목숨을 내놓아야 한다. _12쪽

 

 

이번 결투와는 개인적으로 아무 관계도 없는 관중들은 딱히 어느 쪽 편을 들거나 하지는 않았다. 심지어 자세한 사정을 모르는 경우도 많았다. 그날 시합장으로 결투를 보려고 온 단순한 구경꾼들에게 이번 결투는 최근에는 거의 볼 수 없었던 희귀한 이벤트였고, 화려한 행사와 노골적인 폭력으로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한층 더 띄워 줄 재미있는 구경거리에 더 가까웠던 것이다. 물론 그중 일부가 마르그리트에게 동정했던 것은 틀림없지만, 대다수는 추운 아침 공기 속에서 황당무계한 소문이나 악의적인 가십으로 불을 지피며 곧 시작될 결투와 그 뒤에 있을지도 모르는 화형식이라는 엄청난 볼거리에 기대를 한껏 부풀리고 있었다. _236쪽

 

 

"자백해! 네 죄를 자백하라고!"?르그리는 한층 더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마치 면갑의 죔쇠를 풀려는 카루주의 시도에 필사적으로 저항하는 와중에도 자기 죄를 인정하기를 단호하게 거부하는 것처럼. _273쪽

 

 

결투 문화가 없는 문화권과 시대에서 자란 사람들에게 그들의 무모함과 용맹함은 낯설게 느껴진다. 목숨을 바쳐서라도 증명하고 싶은 진실성은 고결하지만, 신에게 운명을 맡긴다는 발상이 비합리적으로 느껴진다. 근력과 체력이 없는 사람은 억울하게 죽었을까.


생각을 읽은 듯 반론하는 것이 바로 “라스트 듀얼”의 매력이다. 책은 당시에도 결투 재판 제도뿐 아니라 결투 자체가 다소 비합리적으로 느껴져 쇠퇴하고 있었음을 명시한다. 또 정치적 이유로 책의 중심 내용인 카루주-르그리 가분의 사건은 신에게 판결을 일임하는 것이 최선이었다고 설명한다. 단순하게 전투 재판이 일어난 경위만 서술했다면 납득하지 못할 부분을 챙기는 세심함이 즐겁다.

 

“라스트 듀얼”은 현재도 강간 사건의 피해자가 여러 구설에 오르고 있다는 말과 그들의 주장에 반박하는 말로 이야기를 맺는다. 카루주의 사후 마르그리트의 향방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떠들어대는 다양한 이야기는 그 주장만 본다면 신빙성이 있어 보이지만, 어떤 근거도 없다.


책을 덮으며 현대의 이야기 중 어떤 부분이 잊히지 않는 역사가 되어 소설과 영화로 나올지 생각해본다. 내 이야기가 이렇게 널리 퍼져 사람들의 입맛에 따라 재단된다면, 혹은 몇 줄의 글로 정리된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고민이 깊어지면 역사와 현실의 거리감이 사라진다. 현재가 곧 과거가 되듯이 현대가 곧 역사가 된다. 단순한 암기식 역사 공부보다 삶을 보는 역사책이 더 깊게 와닿는 것은 과거를 현재로 끌어내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라스트 듀얼”의 고증에 기반한 상상력은 역사를 다루는 이야기가 무엇을 조심해야 할지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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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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