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사랑의 낭만적 얼굴을 들추다 - 로테/운수 [공연]

글 입력 2021.11.04 1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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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치게 신성화되어 있는 단어들이 존재한다고 느낀다. 꿈, 희망, 믿음, 그리고 '사랑'. 수많은 예술 작품이 '사랑'이라는 주제 하에 창작되는 이유, 수많은 예술가들이 이 모호한 가치가 스스로를 다치게 함을 알면서도 끝내 발화를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는 사랑이 신성함이라는 두꺼운 헤일로에 둘러싸여 있는 불가침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모든 시도들이 가치 없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우리는 끝없이 신성화되기에 바빴던 사랑의 속살을 들춰볼 필요가 있다. 미학적으로 훌륭한 구성을 갖춘 동시에 이를 과감히 시도한 결과로써 연극 <로테/운수>를 관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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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전제된 관계에서는 일종의 권력 관계가 작용한다. 짝사랑의 비애를 묘사한 것이긴 하지만, 사랑 앞에 선 자신을 식민지인으로 비유한 문학작품도 존재한다. 권력 관계를 낳은 것이 애정의 크기 차이이든, 경제력의 차이이든, 사회적 명예 정도의 차이이든 간에 사랑은 때로는 한쪽을 독재자로 드높여 다른 한쪽을 무참하게 식민지화하도록 이끈다. 이것이 대부분 '남성:여성'의 구도로 나탄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사실 이 사이에 작용하는 감정을 '사랑'이라고 정의하는 것부터가 옳지 않다고 <로테/운수>는 말한다. 그것은 명백히 폭력이며 범죄로 인식하고 법으로 다스려야 한다. '개인들의 사정이므로 알아서들 해결하라'는 식의 회피 아래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사랑의 미명 하에 죽어가야 했던가.

 

<로테/운수>는 유구한 고전으로 일컬어지는 문학 작품,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과 <운수 좋은 날>을 21세기 한국이라는 배경 하에 페미니즘적으로 재해석한 매우 흥미로운 연극이다. 무대 장치는 간단하다. 온통 흰 벽과 바닥으로 이뤄진 세트에 작은 탁자와 의자, 그리고 책 몇 권 정도만 놓여져 있다. 그러나 연극이 진행되는 약 70분의 시간 동안, 그 조명이 하얗게 부서지던 세트는 사랑의 폭력에 찢기고 쓰러진 여성들의 울부짖음으로 까맣게 바래진다.

  

1막은 젊은 베르테르 슬픔의 여자 주인공인 '샤를 로테'(애칭은 '로테'로 널리 알려져 있다.)를 모델로 한 '김로테'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형식은 김로테가 정신과 의사와의 상담 자리에서 자신의 사연을 들려주는 식이다. 인상적인 것은 그의 이야기가 진행될 때마다 어떠한 무대 의상도, 분장도 갖추지 않은 한 여성이 긴 페인트 롤러를 갖고 흰 바닥을 가쪽에서부터 한줄씩 검은 색으로 채워가는 독특한 퍼포먼스를 진행한다는 것이다. 이는 김로테의 내면을 형상화 한다.

 

'김로테'의 비애는 스토킹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부교수 직까지 오른 젊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그에게 행하도록, 혹은 행하지 않도록 기대되는 행동들은 수없이 많다. 초반에 김로테는 이들에 순응하기 보다는 제법 당차게 맞서나갈 기개를 가진 인물로 묘사된다. 그런데 그의 모든 개별성은, 교수로서의 능력과 명예, 단단한 자의식은 그를 둘러싼 남성들의 폭력에 의해 한줄씩 까맣게 지워져 간다. <젊은 베르테르 슬픔>의 출간 커머셜 비디오가 흘러나오자 극 밖에서 얌전히 페인트 칠을 하던 여성이 모든 무대장치를 뒤집어놓으며 온 바닥을 까맣게 칠해놓는 연출은 그야말로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온 바닥이 까맣고 따가운 페인트 냄새는 공간을 온통 메운다. 김로테는 일터를 비롯한 세상 그 어떤 곳은 물론 제 안의 그 어떤 방에서도 온전히 두 발 딛고 설 수 없는 처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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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김로테는 그 스스로 일궈왔던 모든 것을 잃고 정신적 장애를 앓게된 후에도 정신과 의사에 의해 딱딱한 병명으로 진단될 뿐이다. 병의 원인은 남성의 폭력이 아니다. 폭력에 대한 김로테의 부적절한 반응 때문이다. 포기해야 할 곳에서 포기하지 않았고, 사랑을 인정해야 할 곳에서 사랑하지 않는다고 부정했고, 자신을 버려야 할 때에서 버리지 않은 김로테의 지독함과 고집 때문이다. 세상은 김로테에게 스스로 피해자임을 끝없이 증명하게 한다.

 

2막의 '이운수' 역시 자신의 피해자성을 증명하도록 강요받는다. 남편 김첨지를 살해하고 법정에 선 이운수는 가정폭력의 끔찍한 기억을 끊임없이 회상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인다. '말을 해'라는 마음의 소리는 남편의 폭력성 짙은 언어를 그대로 옮겨 놓은 것인 동시에 가해자가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는 것이 아닌 피해자가 피해 사실을 증명해야만 하는 현실의 모순을 보여준다. 사랑의 탈을 쓴 폭력을 끝내기 위해서는 폭력의 주체가 그만 두는 것이 이상적이지만, 모든 행위와 대답을 강요받는 것은 언제나 피해자 쪽이다.

 

올해 10월 21일부터 스토킹처벌법이 본격적으로 실행되었고, 실행 첫날부터 헤어진 전 연인의 집을 찾아가 스토킹을 지속한 남성이 체포되었다. 이는 많은 이들의 충격을 낳았다. 스토킹처벌법이 통과되기 이전에는 이러한 스토킹 행위가 초기에 제대로 처벌되지 못해 강간 살인 등의 강력 범죄로 이어진 사례가 잦았다. 여성들이 보장될 수 없는 안전이별에 사랑의 감정에 접어들어 관계를 맺는 것조차 두려워하고 있는 실정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이러한 수많은 종류의 데이트 폭력, 가정 폭력의 가해자들의 가해 동기는 대부분 '사랑'의 신성함 때문임을 <로테/운수>는 명확히 꼬집는다.

 

그러나 이 여성들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아마도 또 다른 종류의 사랑이다. 2부, 재판 장면에서 운수의 내면으로 묘사되는 여성 배우와의 호흡은 관람하던 모든 이의 숨을 옥죄어올 만큼 생생하고 또 훌륭했다. 이를 통해 여성들 사이의 연대와 이들을 구원할 수 있는 선한 사랑의 가치에 대해 재고하게 되는 것이다. 연출자를 비롯한 극작가는 사랑의 가치를 완전히 져버리고 포기한 것이 아니다. 그저 그것의 다른 얼굴을 훌륭하게 조명했을 뿐이다. 이 점이 <로테/운수>의 미학적 가치를 더욱 드높인다.

 

<로테/운수>는 새로운 종류의 여성 서사를 기다리는 모든 이들에게 실망스럽지 않은 경험을 선사할 것이다. 꼭 관람하기를 추천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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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송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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