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TMBP 12. 운명이 우리를 야속하게 대하더라도

당신이 내게 슬픔을 이야기하고 내가 그 슬픔을 듣기도 했다는 것
글 입력 2021.10.31 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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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MBP[Too Much 'B'formation Project]

 

TMB프로젝트는 한국말로 구구절절이라는 뜻의 '투머치인포메이션'이라는 단어에서 영감을 얻은 프로젝트로, Inforamtion의 I 대신 제 이름 첫 글자이자 마지막 글자인 B를 넣었습니다. 나로 시작해서 타인에게 가닿기 위한 에세이 프로젝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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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의 편지는 긴 시간을 건너 편지에 적힌 수신인이 아닌 내게 도착했다. 고등학생 정희는 하루일과를 마치고 어둠이 깊어 초롱별도 보이지 않는 새벽에 그 편지를 썼다. 또래보다 일찍 취업해 학교와 고향을 떠나 서울에서 일하고 있는 숙희가 사무치게 보고 싶은 마음을 담아 보냈다. 애써 묻지 않아도 서로의 상황을 알고 있던 숙희와 정희는 편지를 주고받음으로써 속내를 알게 됐다. 그곳의 시간은 어떤지, 잠자리는 불편하진 않는지 정희는 숙희에게 그런 것들이 궁금했다. 그들이 공유하고 있는 세계는 좁아졌다. 그런데도 정희는,


“비록 운명이라는 단어가 너와 나를 야속하게 대하더라도 우리들의 운명을 원망치 않는다.”라고 썼다.


초대받지 않은 수신인인 주제에 나는 어떻게 그럴 수 있었냐고, 어떤 이유에서 야속한 운명을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을지 알았냐고 1988년의 편지에 묻고 싶었다. 야속한 이별을 어떻게 원망치 않을 수 있을까. 둘이 있다가 혼자가 된 나는 자주 되뇌었으니까. 어떻게. 우리가 어떻게. 자주 원망했고 괘씸해 했고 때로는 저주했다. “매일 안부를 물어줄게” “곁에 있을게” 고장 난 문고리 같은 목소리로 마음의 문을 열었던 말들을. 통째로 다 믿은 건 아니었지만 그런 말을 들을 때의 나는 우리가 앞으로 더 어떤 일들을 함께하고, 서로를 속속들이 알면서도 좋아할지 생각했다. 가까운 시일에 경주로 여행을 가기로 약속해놓고 이별한 다음 날 아침, 여행지에서 입으려고 산 커플티가 도착했을 때의 나는 와르르 무너져 며칠간 택배를 뜯지 않고 째려만 봤다.


정희랑 숙희는 결국 마주치지 못할 만큼 멀어졌다. 누군가와 이별할 때마다 영화 〈이터널 선샤인〉을 본다. 클레멘타인과 조엘은 한때 사랑했던 사이지만, 이별 후 기억을 지워주는 회사에서 서로의 기억을 지운다. 클레멘타인이 먼저 기억을 지웠고, 그 사실을 알게 된 조엘이 뒤따라 기억을 지운다. 하지만 기억을 지우는 과정에서 직원들의 업무태만으로 인해 조엘은 자신의 기억 속에 방치된다. 클레멘타인과 조엘이 사랑했던 장면은 다시는 되돌릴 수 없다는 점에서 눈부시게 아름답고 처연하다. 조엘은 결국 클레멘타인의 기억을 지우는 것을 후회하고, 기억을 지키기 위해 도망다닌다. 기억을 지우는 회사에서 알지 못하는 자신의 어린 시절로 클레멘타인을 데려가 숨긴다. 친구들의 괴롭힘으로 어린 새에게 강제로 돌을 던져야 했던 기억, 대인관계에 서툴러 친척들이 오면 식탁 밑에 숨어 안 나왔던 기억들에 클레멘타인이 나타나 조엘을 도와준다. 클레멘타인은 조엘의 창피한 기억들에 나타나 조엘을 구해주거나 창피해하는 조엘 옆에서 박장대소한다. 그 기억들은 실제로 조엘과 클레멘타인이 함께 있었던, 이대로 죽어도 좋을 만큼 행복했던 기억과 교차한다. 서로의 존재가 고통스러워 기억을 지우기로 결정한 이 둘이 한때 서로의 트라우마를 이야기하고 사랑을 나눴다는 것을 보여준다.


올해 한 이별은 쉬워도 정말 쉬웠다. 이별 자체도, 함께 했던 시간을 지우는 것도. 메시지 전송 버튼을 누름으로써 이별했고, 핸드폰 사진첩에는 시스템이 알아서 그 사람의 얼굴을 인식해 사진을 모아둔 덕분에 ‘사람들에서 이 사람 삭제’를 눌러 한꺼번에 삭제했다. 이별이 이렇게 쉬워도 되는 걸까 싶으면서도 얼른 잊고 새출발하고 싶은 마음이 동시에 교차했다. 지금 생각하니 참으로 현대인의 이별다웠다. 바쁘다 바빠 현대사회에 맞게 보다 편리하게 망각할 수 있게끔 기술이 돕고 있지만, 망각이 아닌 기억함으로써 이별에 대처할 수 있다는 걸 정희의 편지를 읽고 생각해보게 됐다. 멀어질 걸 알기에 더 소중한 인연이 있음을 정희는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누구나 이별하게 된다. 연인, 친구, 가족, 반려동물과 이별한다. 우리 모두 결코 잃고 싶지 않았던 이를 잃게 되는 운명에 처해있다. 야속한 운명을 원망하지 않을 방법은 우리가 한때 서로의 곁에서 시간을 아름답게 채웠음을 기억하는 거다. 그렇게 함으로써 함께 했던 시간을 부질없는 것으로 치부하지 않을 수 있다. 순간을 통해 영원을 경험한 적이 있다는 것. 둘만의 우주를 공유했다는 것.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숨을 허덕이며 놀던 시간이 지나고 서늘한 바람이 스치는 이 계절에” 편지를 보낸 정희에게 멀어진 이를 원망하지 않는 마음을 어렴풋이 느껴볼 수 있었다고, 답장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쓴다. 숙희는 나와 잘 지내고 있다고, 엄마에게 좋은 친구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해줘서 고맙다고.

 

 

(...)

망각의 이유를 물을 필요도 없이

언젠가 우리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새들이 날개로 하루를 성스럽게 하는 시간

다르질링 홍차를 마시며

당신이 내게 슬픔을 이야기하고

내가 그 슬픔을 듣기도 했다는 것

어느 생에선가 한 번은 그랬었다는 것을

기억하겠지 당신 몸에 난 흉터를 만지는 것을

내가 좋아했다는 것을


류시화, 홍차 중 

 

 

정희에게,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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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
  •  
  • 지수환
    • 좋은 글 잘 읽었어요
    • 1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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