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환상 속에서 살 수밖에 없는 여자, 연극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글 입력 2021.10.28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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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랑쉬는 앨런과의 순수했던 첫사랑, 그 순간을 잊지 못하여 살아간다.


블랑쉬는 낯선 남자의 친절이라 할지라도, 그 친절의 순간을 유지하고자 낯선 남자와의 만남을 이어간다.


이에 사람들은 육체적 욕망에 빠진 여자라고 하며 블랑쉬에게 손가락질했고, 블랑쉬는 결국 그곳을 떠난다.


연극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시놉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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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순수했던 순간으로의 계속된 회귀



본 연극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의 주인공은 몰락한 귀족 '블랑쉬'다. 우아하고 아름다운 그녀는 가문의 저택 벨르브를 잃고, 고향을 떠났던 동생 스텔라의 집으로 향한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타고 '극락(또는 낙원)'에 도착을 한 것이다. 허름하고 품위란 없는 빌라에서 살고 있는 스텔라를 보며 블랑쉬는 괜찮냐고 묻는다. 그리고 동생 스텔라는 고향에 있을 때보다 더 행복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런 스텔라의 남편은 가부장적이고 폭력적인 스탠리다. 품위라곤 찾아볼 수 없는 스탠리와 돈이 없어도 품위만 찾는 블랑쉬는 같은 집에 살면서 계속 부딪힌다.


이 과정에서 블랑쉬는 계속 그 허름한 빌라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동생 스텔라에게 백만장자 친구가 자신을 구하러 올 것이라고 말한다. 더불어 블랑쉬는 동생 스텔라에게도 계속 거짓말을 한다. 그렇게 동생 스텔라에게 자신의 과오를 숨긴다. 블랑쉬는 계속 자신을 꾸미기에 집중하고, 밝은 불빛보단 어두운 불빛을 선호하고, 자신의 애인인 미치와도 낮에는 절대 만나지 않는다. 모든 것이 환해지는 순간, 블랑쉬는 자신의 모든 것이 드러날까 무서웠던 탓이다. 블랑쉬가 하는 모든 말들은 환상 속에서 내뱉는 것에 가깝다. 그런 블랑쉬를 보고 있노라면 답답하다가도 대체 왜 그녀가 왜 저럴까에 대한 질문이 남는다. 어차피 다 드러날 거짓말을 내뱉는 블랑쉬는 대체 어떠한 이유로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타고 극락으로 온 것일까.


블랑쉬가 동생 스텔라를 만나고자 함은 갈 곳이 없었던 것이기도 하지만, 과거로의 회귀가 아닐까 싶다. 스텔라는 대사에서 암시하는 것을 보면 고향을 답답하게 여겼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 동생에게 블랑쉬는 말한다. 그렇게 떠나선 안 됐다고. 블랑쉬는 동생 스텔라의 집에서 허영스러운 모습과 환상 속에 빠진 듯 보인다. 사실 블랑쉬는 '환상 속에서 살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가장 순수했던 시절의 사랑만을 떠올리며 속은 텅 비어버린 블랑쉬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자기 자신을 포장하고 있었다. 그래서 결국 아무 데도 갈 수 없던 블랑쉬가 선택한 곳은 가장 어릴 적 함께 했던 동생의 집이 아니었을까. 스텔라는 남편 스탠리에게 블랑쉬를 옹호한다. 언니가 얼마나 순수했던 사람이라는 알면 이러면 안 되는 것이라고 말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도 계속 블랑쉬는 거듭한다. 가장 순수했던 순간으로의 계속된 회귀를. 아직도 그녀는 순수했던 그 과거를 잊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둔 환상의 세계는 깨어지기 마련이었다.

 

 

[욕망이라는이름의전차]_공연사진9.jpg

 

 

 

결핍 VS 결핍



본 연극의 가장 주요한 외적 갈등은 스탠리와 블랑쉬의 갈등이다. 여기서 이 둘의 갈등을 현실적인 스탠리와 환상에 빠진 블랑쉬의 갈등으로만 볼 수 있을까? 서로가 서로를 맞지 않는 사람들로 규정한 그들의 갈등은 '결핍'에 기초되어 있다.


우선 스탠리의 결핍은 명확하다. 폴란드계의 노동자 스탠리는 인종차별을 당하는 노동자다. 그렇기에 온전한 미국인으로 인정받길 욕망한다. 이러한 기조에서 시작된 자격지심들로 인해 자신이 만든 가정의 온전한 왕이 되길 강렬하게 바란다. 그러한 욕망의 투영은 임신한 아내 스텔라에 대한 폭력으로 표현된다. 다시 말해, 스탠리는 현실적인 사람이어서 블랑쉬와 부딪히는 것이 아니라 귀족 집안의 블랑쉬를 보며 자격지심을 느끼는 것이며, 환상을 말하며 자신의 가정을 부술 것 같은 블랑쉬를 경계하고 싫어하는 것이다. 이러한 스탠리의 행동은 현대에서 바라보았을 때, 굉장히 폭력적이며 불쾌하게 다가온다. 이번 공연에서 임주환 배우는 과거에 그러려니 했던 행동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것이 방향성 중 하나라고 인터뷰에서 밝혔다. 과거엔 마초적인 행동 그 자체로 여겨졌던 것들이 현대에서는 비뚤어진 인물, 악역으로 여겨진다. 또한 연출적으로도 뺨을 치는 장면을 직접적으로 보이지 않고, 벽 뒤로 숨긴다. 현대에서 과거의 작품을 재해석할 때, 원작의 방향성을 지키며 현대적인 재해석이 들어갔음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자격지심과 폭력성이 가득했던 스탠리는 블랑쉬의 모든 환상을 부숴버린다.


블랑쉬의 결핍은 꽤나 복합적이었다. 귀족 집안의 자제로서 자라온 삶, 순수했던 첫사랑, 그리고 그 첫사랑의 비밀과 죽음은 블랑쉬에게 계속 공허감을 남겼다. 첫사랑의 비밀을 알지 않았다면 블랑쉬는 행복했을까. 블랑쉬는 사랑했던 이의 배신으로 '순수한 사랑'에 결핍을 느꼈고, 그러한 공허감을 낯선 남자들에게서 채웠다. 게다가 몰락해버린 집안까지. 그 집안의 몰락 역시 오랫동안 이어졌던 조상들의 허영 때문이었다. 사실 블랑쉬가 이 비극의 시작이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순수한 귀족이었을 뿐이다. 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가장 순수했던 블랑쉬는 첫사랑의 아픔과 집안의 몰락을 겪으며 이러한 절망을 제대로 헤쳐나갈 힘을 갖지 못했다. 누군가에게 의지하기 시작했고, 낯선 이의 친절을 반겼다. 그렇기 이어진 문란한 사생활은 블랑쉬를 완전히 망가뜨린다. 그래서 가장 좋았던 시절, 과거로 회귀하는 것이다. 분명, 누군가가 자신을 구하러 올 것이라고 생각하며 스스로 헤쳐 나가질 못한다.


이러한 블랑쉬의 모습은 그 시절 몰락해버린 귀족들의 모습을 투영한다고 볼 수 있다.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귀족이었던 환상 속에 빠져 현실을 헤쳐나갈 힘을 잃어버린 모습, 그리고 그러한 환상의 끝이 어떻게 끝나는지 말이다. 그래서 노동자 계급인 스탠리가 그 환상을 깨버린 것일지도 모르겠다. 연극의 결말부, 정신병원에 들어가게 된 블랑쉬가 애잔했던 이유를 계속 질문했고 그 이유는 앞서 말했듯이 하나였다. 이 모든 비극의 시작점에 블랑쉬는 사실 아무것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첫사랑의 실패 역시, 시작은 블랑쉬가 아니었고, 집안의 몰락 역시 쌓여온 조상들의 허영에 있었다. 그리고 블랑쉬가 비극적인 결말을 마주하게 된 이유 역시 하나였다. 블랑쉬는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블랑쉬는 환상 속에서 스스로 걸어 나왔어야 했다. 언젠가, 블랑쉬가 스스로 그 환상에서 나와, 스텔라와 함께 더 나은 현실을 찾아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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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혜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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