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연극 다운 연극, 그 안에서 피어오른 공존 - 태양

글 입력 2021.10.19 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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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연극 다운 연극


 

극장을 나오자마자 인터넷 서점에서 해당 작품의 희곡집을 구매했다. 사실 나와 비슷하게 이 작품을 감상한 사람이라면, 텍스트와 연극의 차이를 비교하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기 어려웠을 것이다. 나중에 다시 강조하겠지만, 연극 `태양`은 연극적 요소가 강조된 작품이다. 그러한 인상을 처음 극장에 나올 때 받았고, 당연히 텍스트를 어떻게 해석했는지 궁금했다.


두 매체로 전달된 `태양`을 비교한 결과, 이러한 나의 추측은 꽤 유의미한 것이었다. 연극 `태양`에는 텍스트로 전달할 수 없는 비언어적 요소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후술하겠지만, 작품은 크게 `움직임`과 `어투`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기존 텍스트에 없던 장면을 추가하고, 캐릭터를 두드러지게 만드는 작은 연출을 끼워 넣어 작품을 더 풍부하게 만들었다.


연극 `태양`을 리뷰하는 이 글에서 구구절절 쓰기는 어렵지만, 두 매체의 연출 방식을 비교하는 것도 꽤 흥미로웠다. 물론 연극을 위한 글이라는 점에서 텍스트 `태양`은 그 자체로서 보다는 연극의 한 요소로 기능할 것이다. 하지만 알마 출판사의 `태양`은 그 나름대로 책에서 보여줄 수 있는 방식으로 작품을 연출하였다.


대표적으로 일방향적이고 선형적으로 전개되는 텍스트의 중간중간에 양면을 차지하는 그림을 끼워넣은 것이 대표적이다. 독자는 일방향적으로 텍스트 수용하다가, 적절한 순간에 통합적인 관점에서 독해해야 하는 그림을 마주한다. 어떤 `통합`을 지향하는 작품의 메시지로 인해, 이러한 연출 방식은 이상한 감동을 주었다. 개인적으로는 가네다와 소이치가 함께 태양을 마주하는 장면은 연극의 장면과 겹치면서 이상한 열광에 휩싸였다.


이처럼 텍스트에서도 비언어적인 메시지를 활용하여 독자의 감동을 끌어낸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연극 `태양`과 비교해서는 덜 풍부한 맥락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공 용어를 모르니, 나는 일단 이것을 `뉘앙스`라고 부르겠다. 연극은 텍스트를 거의 그대로 가지고 왔음에도 불구하고 더욱 생생한 뉘앙스를 전달했다.


희곡이 소설과 달리 자세한 묘사를 활용하지 않는 것도 한몫했을 것이다. 하지만 희곡이 아니라 소설이라 해도 연극 `태양`의 뉘앙스를 따라 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연극에서 활용하는 비언어적인 요소는 그야말로 연극에서만 맛볼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연극 `태양`은 정말 말 그대로 `연극 다운 연극`이었다.

 

 


2. 극 요약


 

연극을 기준으로 작품의 전체적인 내용을 요약하고 주요한 연출을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연극의 전체적인 이야기 적 구성은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된다. 첫째, 전체 배경설정의 전달. 둘째, 등장인물의 소개. 셋째, 각 등장인물의 관계 전개. 넷째, 각 관계의 결론.


작품이 시작되면, 녹스의 감시관인 모리시게와 큐리오 데쓰히코가 무대에 등장한다. 모리시게는 로봇같이 딱딱하고 끊어진 움직임으로 춤을 추고, 데쓰히코는 웨이브와 같은 부드러운 움직임으로 춤을 춘다. 두 사람은 가끔 교차하지만, 기본적으로 평형한 상태에서 움직인다. 두 사람이 돌아가면서 전체적인 배경을 설명한다. 모리시게는 TTS처럼 높고 낮은 음중 하나를 선택해서 다소 무감정해 보이는 목소리로 연기하고, 데쓰히코는 높낮이를 자연스럽게 오가는 감정적인 사람처럼 연기한다.


미래의 어느 시점, 인류는 바이러스의 감염으로 멸종의 위기에 처한다. 개중 몇몇은 바이러스로부터 면역체계를 자연 형성한 새로운 인류가 등장한다. 그들은 그들 자신을 스스로 호모녹센티스로 자처하고, `녹스`라 불리게 된다. 녹스는 노화하지 않았다. 최적의 신체는 효율적인 사고 과정과 쇠하지 않는 기력을 보장했다. 처음에 녹스는 차별받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대부분의 사람이 더 건강하고 현명한 녹스가 되길 희망했다. 녹스가 될 수 있는 것은 대체로 20대까지였고, 대부분의 사람이 녹스가 되길 자처했다. 이제 대부분의 사람이 녹스가 되었고, 녹스가 되지 않은 인간들은 골동품을 뜻하는 경멸하는 명칭인 `큐리오`라 불리게 되었다.


여기까지 두 사람이 돌아가면서 설명한 후, 데쓰히코가 무대의 중간에서 춤을 춘다. 조명은 데쓰히코를 중심으로 비춘다. 그리고 그 주변을 모리시게가 빙빙 돈다. 초반에 제시된 이 장면은 작품의 전체적인 메시지를 잘 보여주는 연출이다. 이 작품에서 큐리오는 종종 태양을 등지지 않은 자로 표현된다. 이러한 묘사에 맞추어 큐리오 데쓰히코는 태양, 녹스 모리시게는 그 주변의 행성처럼 빙빙 돈다.


두 번째 무대가 시작된다. 녹스 청년이 불타 죽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태양은 침투하듯이 그를 비추고 격렬한 움직임이 얼마 지나지 않아 멎는다. 같은 배우가 옷을 빠르게 갈아입은 후 그것을 덤덤하게 바라보는 가쓰야를 연기한다. 그의 누나인 준코가 살인 현장을 목격한 후, 친하게 지내던 녹스를 살해한 이유와 녹스를 살해하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에 대해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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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쓰야는 변변치 않은 대답을 하고, 준코는 몸이 성치 않은 소이치와 그를 도망가게 하려 한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녹스의 수사관이 찾아오고, 준코는 가쓰야에게 자백할 것을 부탁한다. 하지만 가쓰야는 죽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짐을 싸서 도망가고, 준코는 그것을 눈감아준다. 이를 계기로 마을은 그 보복으로 경제봉쇄가 된다. 준코의 집은 같은 동네 사람에 의해 불에 탄다. 10년 후 경제봉쇄가 끝나고 녹스의 공무원인 세이지와 모리시게가 마을에 찾아온다. 그들은 엉망이 된 마을을 보면서 그들의 나태함을 탓한다. 하지만 동시에 녹스는 큐리오들을 위해 적극적으로 의사를 지원해주겠다고 밝힌다. 준코는 쓴웃음을 지으며 그들의 협력에 감사한다고 전한다.


준코와 소이치는 준코의 아들 데쓰히코와 소이치의 딸 유우에게 그들이 남아있었던 이유 중 하나를 밝힌다. 그들의 아들딸은 10년 동안 사람이 드문 곳에서 살아간 덕분에 녹스로 전환할 수 있는 추첨권에 당첨될 확률이 높았다. 유우는 10년간 녹스와 녹스가 된 어머니에 대해 원망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추첨을 넣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유우는 녹스들의 지배받지 않고 독립한 마을이 있으니, 그쪽에 가자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소이치는 녹스가 되는 것이 안전한 길이라고 말하며 그녀를 추첨에 넣는다. 하지만 데쓰히코는 학교에 가고 싶다는 이유로 녹스가 되길 원한다.


데쓰히코는 녹스에 대해 부러움을 품고 살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마을에 파견된 감시원인 모리시게에게 관심을 가진다. 그는 모리시게에게 직접 키운 찻잎을 주면서 친구가 되자고 말하고, 큐리오에 관심이 있었던 모리시게는 빠르게 가까워진다. 둘은 급속도로 친해지고, 함께 별을 본다. 둘은 시야의 차이로 인해 다른 하늘을 보지만, 둘다 아름다움을 느낀다.


한편, 마을의 출신이었던 가네다가 인간들의 의사로서 주 1회 파견된다. 그는 제일 먼저 오랜 친구였던 소이치를 만난다. 소이치는 녹스가 된 그를 반기지 않지만, 가네다는 늙은 자기 친구를 신기하고 낯설게 느끼면서도 친밀감을 느낀다. 가네다는 자신이 소이치를 만난 것을 같은 출신인 레이코에게 이야기하고, 레이코는 큐리오였던 자신의 혈육인 유우를 떠올린다. 그녀는 이제 애인 세이지와 함께하고, 유우나 소이치에 대해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않지만 그녀를 궁금해한다. 레이코는 가네다에게 자신에게 유우를 보여달라고 이야기한다.


가네다는 레이코의 부탁으로 유우에게 데려다준다. 감정적이고 비이성적인 큐리오인 유우를 자극하지 않도록 레이코는 자신이 어머니임을 밝히지 않는다. 유우는 레이코를 낯설어하지만, 레이코는 그녀에게 매력을 느낀다. 레이코는 그녀와 함께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고, 유우를 끌어안는다. 그 순간 유우는 레이코가 자신의 어머니라는 것을 깨닫고, 금새 사라진 레이코를 향해 뛰어다니며 운다.


레이코의 애인인 세이지는 레이코가 큐리오 아이를 입양하려 한다는 사실을 불편해한다. 그가 보기에 큐리오 들은 비이성적이고 하찮은 존재들이다. 둘은 큐리오였던 시절과 녹스였던 시절을 비교한다. 녹스가 되었을 때 그들은 더 똑똑해지고, 더 전능한 느낌을 받은 기분을 나눈다. 가네다는 녹스가 됨으로써 특권의식이 생길 수 있지만, 큐리오들만이 만들 수 있는 예술이 있음을 지적한다. 이어 그는 차별주의자가 되지 말라고 조언하고, 세이지는 그 자신이 차별주의자임을 받아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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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번째 무대, 유우는 녹스 전환권에 당첨된다. 하지만 그는 녹스 어머니 레이코 생각만 가득하다. 녹스가 되고 싶었던 데쓰히코는 울상이 된다. 모리시게는 그런 데쓰히코에게 큐리오의 장점을 이야기한다. 평생 녹스였던 그가 보았을 때, 큐리오 들은 한 곳에 빠져 성취를 이루고 태양 밑에서 사물을 볼 수 있는 위대한 존재다. 모리시게는 나중에 자신과 함께 녹스와 큐리오로서 여행을 가자고 제안하지만, 데쓰히코는 녹스니까 그런 말을 할 수 있다면서 그에게 화를 낸다.


이들이 투닥거리고 있는 중, 가쓰야가 등장한다. 가쓰야는 마을의 통제가 풀렸다는 것을 알고 마을에 돌아왔다. 그는 녹스인 모리시게를 보자마자 그를 수갑에 채워 밖에 묶어버리고 사라진다. 일출이 한 시간도 남지 않은 시간, 데쓰히코는 모리시게가 죽을 것을 두려워한다. 그는 온 힘을 다해 수갑을 풀려고 하지만 잘 풀리지 않는다. 그는 준코와 손도끼를 가지고 와 수갑을 잘라내려고 하지만 수갑이 잘리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다.


모리시게는 자신의 손목을 잘라달라고 부탁하고, 데쓰히코는 울상이 되어 그의 손목을 자른다. 모리시게를 슬리핑 백에 넣은 후, 준코와 테쓰히코는 다시 돌아온 가쓰야를 마주한다. 가쓰야는 엉망이 된 마을을 보며 준코와 마을 사람들이 마을을 위해 노력하지 않았다고 비판하고, 녹스들에게 복수를 맹세한다. 그런 가쓰야에게 침낭에 들어간 모리시게는 서로 싸워서 될 것이 없다고 반발한다. 그런 모리시게에게 다가가는 가쓰야를 향해 데쓰히코는 달려든다. 오랜 수련을 한 가쓰야에게 테쓰히코는 상대도 되지 않지만, 가쓰야가 스스로 녹스의 피에 넘어지면서 감염되고 만다. 가쓰야는 급속도로 감염되어 사망에 이르고 만다.


한편, 유우는 녹스인 어머니 레이코를 찾아간다. 레이코는 자신의 호기심으로 그녀를 받아들이는 것을 선택하고, 세이지는 차별주의자인 자신을 극복하기 위해 그를 입양하는 것을 선택한다. 유우는 녹스로 전환하는 것을 선택하기 전에, 녹스의 영향력을 받지 않은 마을에 가보고 싶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세이지는 적극적으로 지원해줄 수 있고 그런 마을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빈부격차가 심한 독재체계로 운영될 뿐만 아니라 녹스에 대한 차별교육이 이루어지고 있어 위험하다고 이야기한다. 유우는 녹스 없이 살 수 있다고 믿은 자신의 이상이 무너지자 절망한다. 유우는 녹스 전환 수술을 받는다. 수술을 집행하는 가네다는 유우에게 다시 한번 생각해보라고 몇 번이나 잡지만, 유우는 마음을 굳힌다. 유우는 수술을 받는 중 고통스럽다는 듯이 몸부침치고, 그런 그를 레이코가 막 태어난 아기를 안는 것처럼 안아준다.


마지막 무대, 모리시게는 건강한 녹스답게 손을 붙이고 다시 등장한다. 데쓰히코는 유우가 자신에게 녹스 전환 추첨권을 넘겼다는 사실을 밝힌다. 모리시게는 안타까워하고, 둘은 함께 추첨권을 보는 중에 찢어져 버린다. 데쓰히코는 모리시게를 탓하며 쫓아간다. 한편, 녹스가 된 유우가 마을을 방문한다. 유우는 이제 깨끗하고 고저없이 이야기한다. 소이치는 유우가 녹스가 되었음을 기뻐하고,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유우를 보며 흐느낀다. 유우는 그의 복잡한 마음을 이해할 수 없지만, 이제 소이치와 같은 큐리오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이야기한다. 그는 지금까지 시간을 너무 낭비했다고 이야기하지만, 소이치는 낭비하지 않았다고 흐느낀다.


유우가 돌아간 후, 가네다는 소이치에게 사과한다. 그리고 그는 녹스의 출산 문제는 해결되지 않아 영원히 큐리오들의 아이들을 데리고 와야 한다고 밝히며, 큐리오가 아니라 녹스가 기생충이었음을 밝힌다. 소이치는 그런 그를 웃으면서 이제 알았다면서 돌아가라 하지만, 가네다는 돌아가지 않는다. 그는 마지막을 소이치와 함께 보는 태양을 보는 것으로 장식하고 싶다고 밝힌다. 소이치는 돌아가라 하지만, 가네다는 제멋대로 옷과 구두를 벗고 태양을 기다린다. 소이치는 그를 외면하지 못하고 함께 손을 잡고 태양을 바라본다. 가네다는 계속해서 쓰러지지만 태양을 마주한다. 둘은 함께 웃는다.


그런 그들을 배경으로 모든 등장인물이 경주하듯 자세를 잡는다. 레이코와 유우가 선두에 서고, 큐리오 들은 느리게 그들을 따라잡는다. 세이지는 빠르게 치고 나가지만 가쓰야가 그의 다리를 잡는다. 조명은 더 강하게 비추고, 가네다는 더 쓰러질 것처럼 움직인다. 막이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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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완벽한 녹스, 불완전한 큐리오



녹스가 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있을까? 그들은 언제나 건강하고, 똑똑하다. 녹스는 진보적인 가치관을 따르고 있고, 사실 큐리오보다 더 윤리적이다. 윤리적이라는 말에 조금 의아한 느낌을 받을 수 있지만, 작품 전체에서 이들이 큐리오보다는 여러 방면에서 깨어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특권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녹스 사회는 큐리오 사회를 적극적으로 지원해왔다. 사실 그 배경에는 그들이 언제나 큐리오의 아이를 입양해야 한다는 사실이 깔려있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작품에서 묘사된 녹스는 진보적이다.


대표적으로 세이지와 같은 캐릭터는 자신이 차별주의자임을 인정하지만, 그런 자신을 극복하기 위해 큐리오 아이를 입양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녹스인 모리시게 역시 큐리오와 비교해 지나치게 이상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자신을 위협한 가쓰야에게 부드럽게 접근하고, 갈등을 만들지 않기 위해 자신을 살해하려 한 것이 녹스임을 밝히지 않는다.


그는 나아가 녹스의 장점을 발견하고 함께 공존하길 바란다. 감정적인 인간과 달리 이상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모든 녹스가 모리시게처럼 선량하지는 않겠지만, 녹스 사회가 큐리오 사회보다는 진보한 것은 사실이다. 유우가 꿈꾸었던 큐리오 사회는 진흙탕에서 뒹굴고 있지 않았는가.


개인적으로 녹스가 큐리오보다 사회를 끌어갈 만한 잠재력이 있다는 연출이 마지막 장면에서 연출되었다고 생각한다. 등장인물들이 경주마처럼 달리는 모습으로 연출되는데, 가장 녹스다운 인간인 유우와 레이코가 그 선두에 선다. 유우가 마지막 무대에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그는 큐리오들을 위한 사회를 위해 끊임없이 노력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데도 녹스는 그저 위대한 존재로 묘사되지 않는다. 가네다가 말했던 것처럼, 그들은 결코 스스로 존재할 수 없다. 그들은 큐리오들의 아이들을 입양해오지 않고서는 대를 이을 수 없다. 사실 가네다가 마지막 장면에서 자살과 다를 것 없는 선택을 한 이유도 존재한다. 그들은 생물의 기원이 되는 태양을 등졌다. 단순히 태양을 등진 사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인간의 가장 근원이 되는 감정이 없다.


작품 내내 녹스들은 큐리오들이 `시간을 낭비했다`라고 이야기한다. 로봇처럼 움직이고 감정의 고저 없이 이야기하는 그들에게는 생산성만이 최고의 가치를 갖는다. 녹스들이 태양을 등졌다는 것은 인간의 근원이 되는 들끓는 마음이 없다는 것과 같다. 가네다는 감상 없이 그들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이야기하는 유우와 흐느끼는 소이치를 보면서 녹스의 존재에 대해 다시 고찰한 것으로 생각된다. 가네다는 계속해서 `정답`을 외치는 인물이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정답이 아닌 것을 고른다. 그래서 그는 마지막 장면에서 큐리오 시절의 친구와 함께 태양을 마주하며 죽는다. 생명력을 가진 큐리오로서 죽길 바랐던 것이다.


사실 개인적으로는 녹스가 큐리오와 비교해 절대적인 우위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작품을 보는 내내 약간의 불편함을 느꼈었다. 이러한 감상은 가쓰야의 출연이나 가네다의 선택으로 반전되었다. 하지만 이 작품은 결코 어떤 유형의 인간을 우위로 둔다거나, 각 사회의 차별을 담은 작품이 아니다. 가네다가 선택한 것처럼 녹스가 큐리오가 되기 위해 노력했던 것만이 답은 아닐 것이다. 사실 작품 내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연출 중 하나는, 큐리오인 가쓰야가 같은 큐리오에게 `시간을 낭비했다`라고 이야기한다는 점이다. 가장 큐리오 다운 녹스가 가네다라면 가장 녹스다운 큐리오가 가쓰야다. 두 캐릭터의 의미와 그 발언의 의미는 다르지만, 뭐가 어쨌건 어떤 가치를 우위에 둔 인물들은 파멸을 맞이했다.


개인적으로 이 작품에서 이야기하는 `공존`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시 첫 장면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본다. 큐리오는 가장 근원적인 존재, 생명력을 가진 존재다. 큐리오인 데쓰히코를 녹스 모리시게가 빙빙 돈다. 모리시게가 말했던 것처럼, 두 존재가 서로를 인정하고 함께하는 순간 더 먼 곳을 여행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처럼 태양이 지구보다 우월하거나, 지구가 태양보다 우월하지 않는 것처럼 두 존재는 함께 공존할 뿐이다.


모리시게와 데쓰히코의 우정은 두 존재의 새로운 결론이다. 두 사람은 너무 많은 부분에서 차이가 난다. 모리시게는 이상주의자고 침착하며, 세상에서 많은 것을 본다. 그는 덥고 추운 것 중 하나를 선택한다. 하지만 데쓰히코는 감정적이고 극단적이며, 녹스보다는 적은 스펙트럼을 가졌지만 집중한다. 그는 덥고 추운 것 중 중간을 선택한다. 이 둘이 함께 여행한다는 것에는 굉장한 위험이 따른다. 녹스는 햇볕이 비추면 죽을 수 있고, 큐리오는 병에 취약하다. 하지만 모리시게는 함께 하는 것을 제안한다. 그들은 최소한 아름다운 밤하늘을 공유한다.

 

 

 

4. 나가며



개인적으로는 전체 작품에서 묘사되는 녹스와 큐리오가 하나의 인간 유형이라기보다 인간사회의 다양한 면모로 느껴졌다. 녹스는 유능하고 이상적이다. 그는 인간의 초자아, 자본주의의 비전, 인간들이 욕망하는 이상적인 영웅상을 닮았다. 그와 대조적으로 큐리오는 열등하고, 비이상적이지만 무한한 에너지를 가진 원초아, 생물의 생명력, 인간들이 두려워하지만 가장 근본적인 생물상을 닮았다. 그 안에 어떤 상징이 들어차건, 공존을 꾀하는 작품의 메시지는 큰 감동을 준다.


인간 중에 녹스가 되길 거부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 글을 쓰는 나 역시 시간을 낭비하는 나를 경멸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를 형성하는 것은 언제나 나의 끔찍한 부분이었다. 부족하고 엉성한 부분이야말로 그 인간의 가장 큰 가능성이니까.

 


[이승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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