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예측 불가하게 모순적인 삶에 대하여 [영화]

영화 <킬러들의 도시>를 보고
글 입력 2021.10.15 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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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만 봐서는 여느 범죄 영화와 다를 것 없겠구나 싶었다. 검은 옷을 입고 미간을 잔뜩 찌푸린 남자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와 말 끝마다 욕설을 붙이는 장면이 즐비하는 영화는 좋아하지 않아 재생 버튼을 누르기 전부터 한숨이 튀어나왔다.


결론부터 꺼내자면, 이 영화는 내 예상과 완전히 달랐다. 이내 영화 속 '킬러'들의 이야기에 자연스럽게 빠져들고, 여러 가지 의문점을 떠올렸다. 삶과 죄, 우정과 원칙, 과거와 현재에 대해 끊임없이 넘나들며 고민하게 하는 이 영화는 마틴 맥도나 감독의 <킬러들의 도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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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모르는 킬러 이야기


 

'킬러'하면 떠오르는 전형적인 특징들이 있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그들은 대개 어두운 색의 옷을 입고, 거친 인상을 가지고 있다. 때때로 얼굴 위로 과거의 행적을 짐작할 수 있게 하는 무시무시한 흉터가 그려져 있기도 하다. 그들의 언사도 역시 마찬가지로 굉장히 거칠고 투박하다.


나는 그들이 대략 두 시간의 러닝타임에 걸쳐 욕설과 폭력이 난무하는 사건 현장을 배회하며 참회하거나 자멸하기를 기다리는 데는 영 흥미가 없었다.


그러나 <킬러들의 도시>에 등장하는 이 킬러들은 조금 다르다. 켄과 레이는 대주교를 암살하는 작전을 마치고 영국에서 도망쳐 벨기에의 브뤼헤에 잠시 머무르게 된다. 중세의 건축물과 고즈넉한 풍경이 아름답게 어우러지는 작은 도시에서의 시간을 만끽하는 켄의 모습은 매우 낯설게 보인다. 노란 햇살을 맞이하는 푸근하고 부드러운 인상은 킬러의 전형적인 모습과 전혀 다른 지점을 가리킨다.


레이는 켄보다 조금 더 젊은 청년으로, 작고 조용한 도시가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듯 투덜거린다. 방황하며 인근을 배회하던 레이는 영화 촬영장에서 만난 한 여성과 사랑에 빠져 데이트를 나가는 등 여느 청년들과 다를 것 없어 보이기도 하지만 틈틈이 난데없이 과격하게 폭력을 휘두르며 주위를 경악하게 만든다. 그런 그에게도 예상하지 못한 면모가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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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브뤼헤로 도망치기 직전, 대주교를 향해 쏜 총알이 대주교의 몸을 관통해 기도하고 있던 어린 소년을 해하는 실수가 있었다. 레이는 어린아이를 죽였다는 죄책감에 몹시 괴로워하며 눈물을 자주 흘린다.


저마다의 이중적인 면모를 가지고 있는 인물들은 한층 더 입체적으로 느껴진다. 우리가 공식처럼 알고 있던 킬러의 전형을 과감히 깨뜨리며 허황되고 상상에 불과할 것만 같은 킬러들의 세계를 보다 사실적인 것처럼 그려낸다.


이런 모습의 킬러들이 동화같이 작고 아름다운 도시 브뤼헤에서 겪게 되는 일들은 그야말로 예측불허인 블랙코미디다.


레이가 하루라도 빨리 보스인 해리의 지령을 받고 이 지루한 도시를 벗어나고자 하는 사이, 켄은 킬러의 원칙을 깬 레이를 사살하라는 명령을 받게 되며 긴장이 고조되기 시작한다. 이어 켄이 명령을 따르지 않아 일이 꼬이자 해리가 직접 브뤼헤로 찾아오는 순간부터는 선혈이 낭자하는 추격전이 이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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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옥과 삶과 도시


 

고풍스러운 고딕 양식의 건축물 사이사이를 둘러보던 켄과 레이는 히에로니무스 보스의 그림 <최후의 심판>을 보며 연옥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그리고 이 시점 이후로 이들이 벗어나지 못한 공간 '브뤼헤'에 대해 조금 더 깊이 지켜보게 된다.


죄책감에 고통스러워하던 레이가 '선택의 결과는 사라지지 않는다'는 말한다. 레이를 죽이려고 총구를 겨냥했으면서도 자살하려는 레이를 보고 화들짝 놀라 막아선 켄은 '그럼 다음에 만나는 아이는 네가 살리라'고 위로한다. 이밖에도 아이러니한 상황과 선택은 연속적으로 이어진다. 차별을 받고 자란 이조차 또 다른 차별과 혐오를 품고, 확신하고 저질렀던 일은 착각과 오해로 점철되었던 것임을 뼈저리게 깨닫는다. 보이는 것은 전부가 아니며, 인간은 서로를 너무나 쉽게 속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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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이들을 보며 문득 궁금해진다. 선은 무엇이고 악은 무엇일까? 둘을 가르는 절대적 기준이 과연 존재하는 걸까? 그 질문에 선뜻 답하지 못하면서도 자연스럽게 켄과 레이, 해리를 포함한 영화 속 인물들을 자신만의 관점으로 심판하게 된다.


누구도 함부로 벗어날 수 없는 공간으로 설정된 브뤼헤라는 작은 도시는 어쩌면 정말 레이의 말처럼 지옥, 아니 연옥 인지도 모른다. 삶이라는 것은 계속해서 그런 모순들을 저울질하며 최선과 차선을 넘어 차악을 선택하는 그 지난한 과정처럼 보인다.


누군가를 죽이는 끔찍한 일을 업으로 삼고, 차별적이고 구시대적인 발언을 일삼는 킬러들이지만 그런 구렁텅이 같은 삶과 선택들에 반하는 인간적인 면모 역시 가지고 있는 그들을 보며, 최악의 상황에서 인간이 어떤 선택을 할 수 있는지 마치 신의 입장에서 관조하듯 그들을 지켜보게 된다.


레이와 해리의 결투가 영화 촬영장 안에서 끝난 것도 우연처럼 보이지 않는다. 연옥을 그린 그림 속의 기괴한 심판자의 모습처럼 갖춰 입은 배우들 사이에서 어린아이를 죽였다는 이유로 레이를 처단하려던 해리는 자신이 쏜 총에 소인이 죽자 그를 어린아이로 오인해 그대로 자살했다. 그 모습을 끝까지 지켜본 레이는 구급차에 실려가며 그제야 그곳이 자신의 '지옥'임을 깨닫는다. 바닥을 구르며 쓰러진 레이의 시선에 신에게 가닿을 수 있을 만큼 하늘 높이 치솟은 고딕 성당의 뾰족아치가 등장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지금껏 그들이 절대적 존재, 혹은 원칙으로부터 심판대에 올라있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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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번은 더 봤을 갱스터 영화에서 벗어나고 싶다던 마틴 맥도나 감독의 말처럼 이 영화는 단순히 폭력과 피로 얼룩진 킬러들의 혈투만을 다루고 있지 않다. 고풍스러운 중세시대의 건축물과 동화처럼 아름다운 풍경들 사이를 지나며 죄와 속죄, 원칙 같이 인간 본성을 다루는 무거운 주제들을 고찰하는 '살인을 업으로 삼는 자'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보여줌으로써 삶의 모순을 더욱 직관적이고 위트 있는 방식으로 발견하게 한다.


정말 우리 삶은 연옥과 같은 것일까? 브뤼헤처럼 마음대로 벗어날 수도 없고, 양심에 따라 속죄하는 마음에서 멀어질 수도 없다. 모든 상황과 선택이 최선일 수는 없는 차가운 현실 속에서 우리는 어떤 길을 선택하고, 어떤 결과를 맞이하게 될까? 답은 여전히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삶은 태초부터 모난 모순으로 이루어져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는 있을 것도 같다.

 

 

[고민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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