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증오는 두려움의 자식이다 - 혐오의 시대 #1

글 입력 2021.10.15 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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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금 혐오의 시대를 살고 있다. 이것이 내가 지난 시간에 내린 결론이다. 그렇다면 이제는 다음 스텝을 밟아야 한다. 혐오의 시대를 살아가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다. 똑같이 흐름에 휩쓸리거나, 똑바로 흐름을 직시하거나.

 

만약 휩쓸리기를 선택했다면 이 글은 시작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 사회를 뒤덮는 혐오의 흐름을 직시해야 한다. 혐오의 뿌리를 찾아내야 한다. 그렇기에 우리의 질문은 가장 근본적인 수준으로 돌아가야만 한다. 왜 우리는 혐오를 하는 것일까? 혐오는 도대체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아마도 최초의 출발점은 ‘편견’이었을 것이다. 여러분은 편견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을지 모르겠다. 아마도 대부분은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않을까? 왜냐하면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함부로 편견과 선입관을 가지면 안 된다는 가르침을 계속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당신은 지금으로부터 수천 년 전에 이 세계에서 살아가던 원시인이다. 그런 당신 앞에 커다란 덩치와 날카로운 발톱과 이빨을 지닌 짐승이 나타난다면 어떨까? 아마도 당신은 그 자리에서 도망치려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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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 순간 내가 다가와 왜 도망가냐고 묻는다면? 덩치가 크다는 이유로, 이빨이 날카롭다는 이유로 그 짐승을 사람을 해치는 사나운 동물로 생각하는 건 당신의 편견이라고 말한다면? 당신은 내게 코웃음을 칠 것이다. 내가 미쳤다고 말할 수도 있다.

 

만약 그때 나의 말을 듣고 도망치지 않았다면 그 사람은 높은 확률로 크게 다치거나,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말하자면 지금까지 살아남은 인류에게 ‘편견’은 아주 자연스러운 인간 심리인 셈이다. 오죽하면 진화심리학에선 인간이 ‘편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생존에 성공했다는 말을 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편견을 미화하려는 건 아니다. 나는 그저 편견이 가진 효율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생존에서 효율성은 늘 유리한 덕목이었다. 어쩌면 바로 이것이 오늘날에도 우리가 여전히 편견과 선입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이유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아직도 생존만을 위한 원시사회를 살아가고 있을까? 물론 생존은 여전히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목표는 아니다. 일부 국가나 지역을 제외하면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생활을 위협받을 순 있어도 생존을 위협받진 않는다. 그만큼 수 세기 동안 우리 모두가 평화롭고 안정적인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편견이 가지는 위치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 오늘날의 편견은 생존의 덕목보단 혐오의 시작점으로서 갖는 의미가 더 크다. 그렇다면 편견을 막는다면 혐오도 막을 수 있을까? 안타깝게도 그건 쉬운 일이 아니다. 진화심리학의 말마따나 편견이 정말 인간 본성의 일부라면 그것을 떼어놓는 건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허나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분명 모든 혐오는 나름대로의 편견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편견이 혐오로 이어지진 않는다. 편견이 혐오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반드시 필요하다. 따라서 그중 하나라도 막을 수 있다면 혐오의 발생을 억제할 수 있다. 그럼 이쯤에서 떠오르는 질문, 편견을 혐오로 발전시키는 두 가지는 과연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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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BBC)

 

 

지난 4월, 뉴욕의 한 지하철에서 흑인 남성이 아시아계 남성을 폭행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이 더욱 충격적이었던 건 당시 지하철에 함께 탑승했던 승객들 중 어느 누구도 흑인 남성의 폭행을 말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들은 마치 그 광경이 좋은 구경거리라도 되는 마냥 동영상을 찍거나 환호성을 지르기도 했다.

 

서구권에서 아시아인을 향한 차별 및 혐오 행위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하지만 코로나19 발생 이후 아시아인 혐오의 정도는 더욱 심해졌다. 미연방국 수사국(FBI)이 공개한 ‘연례 증오범죄 보고서’에 따르면 인종 및 민족 혐오에 의한 범죄 행위가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한다고 한다. 그중 아시아인을 대상으로 한 폭행 사건은 2019년 158건에서 2020년 274건으로 전년대비 무려 73.4%나 증가했다.

 

실제로 우리는 올해 초부터 각종 뉴스 채널을 통해 해외에서 아시아인을 대상으로 한 증오 범죄를 접해왔다. 오죽하면 바이든 행정부가 아시아인을 상대로 한 혐오 행위를 중단하라는 행정 명령을 내렸을 정도다. 시위도 몇 번 벌어졌다. 물론 최근에는 보도의 빈도가 다소 줄어들긴 했지만, 아시아인을 향한 증오 범죄는 여전히 발생하고 있다. 지난 9월만 하더라도 미국 뉴욕에서 아시아계 운전자가 교통사고 후에 10여 명으로부터 폭행을 당한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러한 경향은 우리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일부 서구권 시민들이 코로나19의 책임을 아시아인들에게 묻는다면, 같은 아시아 국가인 대한민국에선 그 책임을 중국인들에게 묻는다. 실제로 코로나19 발생 이후 한국 내에서 중국과 중국인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은 눈에 띠게 높아졌다(물론 여기에는 코로나19 말고도 동북공정, 홍콩 탄압 등 중국 정부가 이제껏 보여준 행태들도 한몫했다). 중국 관련 뉴스 기사나 영상에서는 중국인을 비하하는 댓글들이 가득하다. 수위 역시 놀라울 정도다. 지난 1세기 동안 6.25 전쟁 이후로, 반중 감정이 이렇게 고조된 적이 있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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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사례도 있다. 지난 2001년 전 세계를 뒤흔든 9.11 테러 사건 이후, 이슬람 국가를 향한 전 세계의 시선은 부정적으로 변했다. 이러한 모습이 가장 잘 드러난 작품이 바로 영화 <내 이름은 칸>이다.

 

평화롭던 주인공과 그의 가족들의 삶은 9.11 테러 사건 이후 송두리째 흔들린다. 친하게 지내던 이웃은 멀어졌고 크고 작은 괴롭힘들이 그들을 따라다녔다. 급기야 주인공의 아들이 불량 학생들로부터 폭행을 당하다 사망하는 사건까지 벌어졌다. 이 모든 게 주인공의 종교가 이슬람교였기 때문이다. 이에 주인공은 자신은 테러리스트가 아니라는 말을 전하기 위해 미국 대통령을 만나러 무모한 여정을 떠난다.

 

상당히 영화적인 스토리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이는 비단 영화 속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실제로 이 영화의 주인공 역할을 맡았던 배우 ‘샤룩 칸’은 지난 2009년 미국을 방문했다가 자신의 자신의 이름이 이슬람계라는 이유로(‘칸’은 흔한 이슬람계 성씨 중 하나다) 공항에서 억류되었다. 인도에서는 전 국민적인 인기와 지지를 받는 톱스타인 그가 말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유재석 같은 사람이 북한의 스파이일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미국에서 억류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당연히 이 일은 인도 국민들에게도 상당한 충격을 안겨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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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뉴스민)

 

 

우리나라에서도 이슬람 혐오는 중대한 문제다. 최근만 하더라도 대구시에서 이슬람 사원 건립을 두고 벌써 9개월째 찬반 논쟁이 이어지고 있다. 지난 9월엔 아프가니스탄에서 우리나라 정부 활동을 돕던 난민 일부를 탈출시켜 데려온 일이 있었다. 해당 작전은 ‘미라클 작전’으로 불리며 수많은 찬사를 받았지만 일부 사람들로부터는 잠재적 테러리스트를 데려왔다는 비아냥을 듣기도 했다.

 

지난 2018년엔 제주에 예맨 난민이 대거 입국한 일이 발생했다. 언론은 앞다투어 이를 보도했고, 여론은 그들을 가짜 난민으로 규정하며 제주에서 추방할 것을 주장했다. 정부의 조치 역시 이러한 인식에 일조했다. 우리나라는 세계 최초로 난민 협약에 가입한 국가 중 하나다. 하지만 난민의 지위에 대한 심사는 그 어떤 나라보다도 까다롭다. 법무부에서 내놓은 ‘2020년 출입국·외국인 정책 통계연보’에 따르면 지난 1년간 6,700여 건의 난민 신청이 접수되었는데 그중 통과된 건 69건(1%)에 불과하다. 그보다 한 단계 낮은 인도적 체류 역시 고작 150여 명에게만 허락되었을 뿐이다.

 

이렇듯 까다로운 심사 정책은 자연스레 난민을 위험하고 통제가 필요한 존재로 생각하게 만든다. 실제로 지난 5월, 중앙일보에서 진행한 여론 조사에 따르면 전국 19세 이상 남녀 1000명의 응답자 중 59.5%가 '난민 유입 이후 유럽 주요국 범죄율이 올라갔다'는 명제가 사실이라고 답했다. 그렇다면 이들의 인식대로 난민을 받아들인 유럽의 범죄율은 정말 높아졌을까? 아니다. 오히려 떨어졌다. 유럽 연합 통계청에 따르면 유럽연합(EU) 27개국의 2018년 강도 건수(경찰 신고 기준)는 2012년 대비 34%나 떨어졌다. 고의적인 살인 사건도 30%가량 감소했다. 난민 증가와 범죄율 급증의 상관관계가 입증되지 않은 셈이다.

 

그렇다면 그때로부터 벌써 3년이 지난 제주도는 어떨까? 여전히 아름답고 평화로운 섬이다. 그때 입국했던 난민들이 사고를 일으켰다는 소식 역시 들려오지 않고 있다. 세금 낭비를 한다는 것도 헛소리다. 당시 체류 자격을 부여받기 위해 난민 신청을 했던 484명 중 고작 2명만 난민으로 인정받았고, 대부분은 인도적 체류 허가만 받았다. 실제로 그들을 인터뷰한 중앙일보의 기사에 따르면 지원금을 받았던 난민은 거의 없었다고 한다(지원금의 규모 역시 그리 크지 않다. 1인 가구는 43만 원, 5인 가구일 때만 138만 원 가량이 지급되었다). 말하자면 이 모든 건 잘못된 인식이 불러온 혐오의 결과물이었을 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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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국제 엠네스티 한국 지부)

 

 

그렇다면 이러한 일들이, 특히 외국인, 인종, 민족 등을 대상으로 혐오가 발생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첫 번째 이유는 우리가 그들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미지의 대상에게 편견을 갖는 건 인류의 아주 오랜 본능이다. 특히 외국인일수록 그런 부분에서 훨씬 취약하다. 사용하는 언어, 생김새, 피부색 등 눈에 보이는 외적인 부분에서부터 차이가 확연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살아온 역사와 문화까지 다르다면 경계심은 더욱 쉽게 생긴다.

 

두 번째 이유는 미디어다. 프랑스의 영화감독 장 뤽 고다르에 따르면 영화는 현실의 반영이 아니라 반영의 현실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 영화는 실제 현실이 아닌 만든 이들의 의식이 반영된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지난 십수 년 동안 한국 영화에서 다른 아시아계 민족 캐릭터들은 범죄조직원, 살인자, 인신매매범, 매춘부 등 부정적인 역할을 도맡아 왔다. 헐리우드 역시 마찬가지다. 헐리우드 영화 속 이슬람계 캐릭터의 역할은 높은 확률로 테러리스트거나 테러와 관계된 사람이었다.

 

언론 보도 역시 문제다. 오늘날 대부분의 언론사들은 취재의 효율성을 위해 뉴스 통신사로부터 외국의 뉴스를 전달받는다. AP, AFP, 로이터 등이 대표적인 뉴스 통신사다. 문제는 이들 뉴스 통신사가 대부분 서구권 국가들에 본사를 두고 있다는 점이다. 당연히 이들이 작성하는 기사 역시 서구권 시민들의 입장과 시각에서 쓰여질 수밖에 없다.

 

반면 뉴스의 대상이 되는 나머지 국가들은 자신들의 의사와 상관없이 왜곡되고 불리한 기사가 나갈 확률이 높다. 특히 언론 현장에서는 수많은 기삿거리 중에서 뉴스로 내보낼 기사를 선택하는 과정을 거치는데 아무래도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 쉬운 자극적인 기사들이 통과되기가 좀 더 쉽다. 우리가 중동 지역에서 발생한 내전, 테러 등의 소식은 자주 접하지만 일상적인 뉴스 기사들을 자주 보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그리고 제한된 기사를 접하게 된 우리는 해당 지역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가질 수밖에 없다.

 

결국 이렇게 생산된 미디어 속 이미지들은 외국인, 다른 인종, 다른 민족에 대한 인식을 고착화 시킨다. 또한 고착화된 이미지는 대중문화 속에서 재생산되어 우리의 인식을 더욱 강화하는 결과를 낳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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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시민건강연구소)

 

 

이외에도 혐오를 부추기는 원인은 무수히 있다. 각 나라와 인종의 정치, 사회, 역사 문제까지 파고들면 끝도 없이 찾아낼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원인들도 실타래의 끝을 잡고 계속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하나의 점으로 귀결된다. 그 점의 이름은 바로 ‘두려움’이다.

 

“두려움은 분노를 낳고, 분노는 증오를 낳고, 증오는 고통을 낳지.” 영화 <스타워즈>에 나오는 유명한 대사 중 하나다. 이 대사를 읽고 앞선 두 사례를 다시 떠올려보자. 지난 2019년 처음 발생한 후, 전 세계를 강타한 코로나19는 우리의 일상을 갉아먹으며 수많은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었다. 이러한 바이러스의 횡포는 사람들에게 다시는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지 못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을 야기한다. 이에 사람들은 바이러스의 원인을 찾아 헤매기 시작하고, 결국 두려움은 바이러스가 최초 발생했던 지역의 사람들에 대한 분노로 번진다. 바로 이것이 코로나19 발생 이후, 아시아인에 대한 증오 범죄가 급증한 이유다.

 

이슬람 혐오 역시 마찬가지다. 일부 이슬람 세력이 벌인 테러 행위는 전 세계 사람들로 하여금 사랑하는 가족과 이웃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심었다. 그리고 그 공포는 모든 이슬람교도에 대한 반감과 분노를 야기하고, 결국 사람들의 혐오를 촉발 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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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한국일보)

 

 

사실 이러한 메커니즘은 예삿일이 아니다.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오랫동안 꾸준히 반복되어 왔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발생했던 홀로코스트 역시 이러한 메커니즘으로 설명할 수 있다. 1차 세계대전 직후 막대한 전쟁배상금을 안고 살아가야 하던 독일 국민들에게 1929년 발생한 세계 대공황은 생존에 위협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독일의 정치가들이 국민들이 느끼는 공포의 원인은 정치의 무능이 아니라 유대인에게로 돌려버린 것이다. 1차 세계대전 패배의 배후에 유대인이 있었다는 둥, 유대인이 어린아이를 해친다는 둥의 소위 가짜 뉴스를 뿌려대면서 말이다. 덕분에 사람들은 자연스레 자신들이 고통받는 이유에 유대인이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유대인에 대해 분노를 품게 되었다. 더군다나 당시 유대인들 중 상당수가 자본가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분노는 더욱 쉽게 번졌다.

 

이런 상황에서 집권한 히틀러와 나치당은 단순한 음모론에서 벗어나 보다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사회 시스템으로 사람들의 두려움을 퍼뜨리고, 그 두려움을 혐오로 정착시켰다. 유대인을 2등 시민으로 격하 시키고, 재산을 몰수하고 가슴팍에 다윗의 별을 부착시키고, 수용소를 지어 거주 지역을 분리하는 등 유대인을 일반 독일 국민으로부터 완전히 분리하고, 그들을 마음껏 미워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든 셈이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은 오늘날 발생하는 수많은 혐오 문제들과 상당 부분 조응한다. 이를테면 상대방이 열등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조건을 만든다거나, 나와 상대가 서로 다른 영역에 속한 사람이라고 인식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방식 등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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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영화 <레 미제라블>)

 

 

영화 <레 미제라블>(2021 개봉)을 보면 이런 장면이 나온다. 일명 ‘핑크돼지’라 불리는 강력반 경찰들은 서커스단에서 아기 사자를 훔친 도둑을 잡던 중 소년 ‘이사’에게 고무탄을 발사한다. 문제는 그 장면이 마침 하늘에 떠 있던 드론에 고스란히 담겼다는 것이다. 이에 경찰들은 사건을 수습하기 위해 드론의 주인인 또다른 소년 ‘뵈즈’를 찾아나서고 겁이 난 뵈즈는 과거엔 범죄에 몸을 담았지만 현재는 회개하여 식당을 운영하고 있는 ‘살라’에게 도망친다.

 

경찰들은 메모리 카드를 돌려받기 위해 갖은 회유과 협박을 해보지만 살라의 행동은 완강하다. 결국 보다 못한 ‘스테판’이 나서서 살라를 설득하기 시작하고, 스테판의 진심 어린 말에 살라는 마음이 움직였는지 메모리 카드를 건넨다. 하지만 메모리 카드를 돌려주며 동시에 그는 의미심장한 말을 함께 내뱉는다. “당신의 말을 믿고 싶지만, 그들의 분노를 피할 수는 없을 거야.”

 

이후 스테판은 이사에게 고무탄을 쐈던 경찰 ‘그와다’를 찾아가 이사에게 사과할 것을 권한다. 하지만 그와다는 그랬다간 이곳에서 경찰 일을 하지 못하게 될 것이라며 거부한다. 실제로 영화 속에서 그들이 일하는 몽르메유 지역은 가난과 범죄가 되물림되는 절망적인 세계다. 다른 지역에서 근무하다가 처음 이 지역으로 전입을 온 스테판 역시 순찰 첫날에 드세게 나오는 시민들로 인해 이런저런 곤욕을 치러야만 했다. 그런 의미에서 그와다의 심정도 충분히 이해가 간다. 조금이라도 약한 모습을 보였다간 잡아먹힐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너무하다는 소리를 들을 지언정 강력하고 권위적인 경찰이 되어야만 했다.

 

하지만 이는 몽페르메유의 시민들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강력반 반원들에게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동시에 강한 반감을 품고 있다. 실제로 뵈즈가 찍은 영상으로 인해 강력반 반원들이 곤경에 처하자 몽페르메유의 어른들은 그걸 계기로 강력반 반원들을 휘어잡기 위해 살라를 찾아가 흥정을 벌인다. 그리고 이러한 반감은 영화의 클라이맥스에 이사를 필두로 거대한 불길이 되어 도시를 뒤흔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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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영화 <레 미제라블>)

 

 

흔히들 미움이라는 감정은 손잡이가 없는 칼날을 쥐고 있는 거라고 한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위험하다. 마구잡이로 휘둘렀다간 자신도 다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러 사람의 미움이 모이기 시작한다면 어떨까. 그땐 그 칼날에 손잡이가 달리는 것이다. 마음 놓고 휘둘러도 자신은 다치지 않는 것. 혐오란 바로 그런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 속 몽페르메유의 시민과 경찰들은 나름대로 서로에 대해 두려움을 안고 있다. 그리고 이런저런 일로 인해 그 두려움은 쌓여 분노가 되고 더 이상 숨기거나 피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게 된다. 앞선 말마따나 서로를 향해 마음 놓고 칼날을 휘둘러도 자기 자신은 다치지 않는 경지까지 온 것이다.

 

그리고 그때부턴 서로가 서로를 미워하게 되는 이유가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된다. 왜냐하면 분노가 그 위를 덧칠해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거의 모든 인간은 자기혐오의 뿌리를 보지 못한다. 아니, 볼 필요가 없다. 이슬람 지역에서 왜 그렇게 테러가 많이 발생했는지, 흑인들의 범죄율은 왜 그렇게 높은지 등은 더 이상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그냥 그들은 애초부터 그런 종족이었다고 생각하면 된다. 지금 더 중요한 건 이들을 미워하는 것이다.

  

 

증오는 두려움의 자식이다.

 

- 테르툴리아누스

 

 

앞서 나는 편견이 혐오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하다고 했다. 오늘 우리는 그중 한 가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바로 ‘두려움이 낳은 분노’다. 두려움과 분노는 누군가를 미워할 수 있는 당위성을 부여하고, 우리로 하여금 그 이유에 대해 더 이상 생각하지 않게 만든다. 이러한 점 때문에 우리가 혐오를 극복하기 어려운 것이다.

 

허나 방법이 어려울 뿐이지, 극복이 불가능하진 않다. 그리고 그 출발점은 혐오의 뿌리를 가린 분노를 걷어내는 것이다. 분노를 만드는 두려움을 발견하는 것이다. 우리 안의 두려움과 분노를 똑바로 직시하는 것. 바로 이것이 혐오의 메커니즘에 맞서는 이해의 메커니즘이다.

 

 

※참고문헌

1. 닥터 프로스트 (이종범 作)

2. 왜 나는 너를 미워하는가 (러시 W. 도지어 주니어 作)

3. 난민은 세금 축내는 범죄자? 예멘 난민 3년, 제주는 평온하다 (중앙일보)

4. 美 증오범죄 12년 만에 최다...코로나 영향으로 작년 아시아계 공격 73.4% (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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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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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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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푸른하늘
    • 통찰력 있는 글 잘 봤습니다!
      <타인에 대한 연민>의 저자, 마사 누스바움 또한 혐5의 근원에는 두려움이 있다, 라고 얘기를 했죠. 잘 알지 못한다는 데서 오는 두려움, 저들이 내 지위를 무너뜨릴지도 모를 것이라는 두려움이 모든 혐5의 기원인 듯 합니다.
      두번째 원인으로 무엇을 지목하실지 기대가 됩니다. 다음편도 꼭 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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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모씨
    • 기레기 아니고 기자 맞죠? 가짜 난민들 그럼 사비로 먹여 살리세요 대구 이슬람사원도 그쪽 집 앞에다가 짓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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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댓글 닫기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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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모씨2
    • 2021.10.16 15:4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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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고
    • 김모씨좀더 그럴 듯한 이유를 들고 반대하라는 거죠. 한국이 무슬림화 된다느니, 범죄율이 증가한다느니 통계적 근거도 없는 헛소문이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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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겨울
    • 기사 잘 읽었습니다. 혐1오에 무감한 사회에 경각심을 주는 좋은 기사네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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