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은,기운,지운] 에필로그

에필로그 1/2장
글 입력 2021.10.13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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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2월 17일

 

   

지운. 지은씨의 ‘지’와 기운의 ‘운’에서 따온 이름이다. 지혜 지와 구름 운이 합쳐진 내 이름은 아빠의 독단으로 지어졌다. 웃기게도 지은씨는 아직도 그 사실을 모른다. 모르지만, 내 이름을 부르는 걸 좋아한다. 지은씨의 목소리는 남들의 목소리에 플랫을 붙인 것 같은, 낮고 고요한 느낌이다. 그래서 지은씨가 부르는 내 이름은 세상에서 제일 포근하다.

“지운아, 기운이는? 우리 지운이는 그새 더 얼굴이 좋아졌네.”

“아빠는 장 보러요. 그래도 김치볶음밥만 덜렁 있는 식탁은 조금 그렇지 않냐면서 나갔어요.”

“지운아, 기운이도 참, 사람 말을 곧이곧대로 안 들어. 그치? 난 그거면 충분한데.”

 

지은씨의 낮은 목소리, 아빠의 다소 촐랑대는 목소리, 그리고 내 목소리가 합쳐진 식탁이 그 어느 때보다도 풍성했다.

“지운아, 네가 글 쓴다고 가져간 내 일기장 언제 돌려줄 거야?”

“글? 무슨 글?”

“지운이가 가족에 대한 글을 쓸 거라고 내 일기장도 빌려 갔는걸? 너한테 말 안 했어?”

“우리 지운이는...지은이만 가족인가보다. 네 뒷바라지는 내가 거의 다 했는데.”

 

웃으며 말하는 아빠와 내게 일기장을 돌려달라는 듯 손을 내미는 지은씨. 나는 사실 그 일기장을 읽고 쓰고자 했던 글은 쓰지 않기로 했다. 두 사람의 세상에 그들은 나를 기꺼이 끼워주었다. 결국 우리의 세계는 셋으로 충분했기에, 내가 그들의 세상에 끼어들기 전 그들의 서사를 굳이 다른 세상에 넘기고 싶지 않았다. 사실 자신이 없었다.

 

*

 

이건 내가 어릴 적의 이야기

 

내가 지은씨와 아빠에게 각각 지어준 인디언식 이름은 ‘울렁이는 호수의 빗방울’, ‘눈 부신 햇살의 알갱이’. 우리는 한동안 서로를 홀씨와 빗방울 그리고 햇살이라고 불렀다. 지금도 둘은 나를 가끔 홀씨야~라고 부른다. 다 큰 성인 남성에게 다소 낯간지럽지만, 우리 집 안에서는 이미 세상의 이상한 일이 이상한 일이 된 적이 없었으니 나는 그들이 나를 그렇게 부르는 걸 좋아한다.

 

지은씨의 일기장에서 그 대목을 가장 좋아한다.

 

우리가 오랫동안 함께 살 수 있었던 건 어떤 마음의 힘 덕분이었을까.

 

지은씨가 스며드는 빗방울 같은 사람이어서, 아빠가 포근한 햇살 같은 사람이어서,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가 민들레 홀씨 같은 사람이기 때문이지 않을까요. 저 일기를 쓰던 지은씨의 곁에 다가가 말해주는 꿈을 종종 꾼다.

 

현실에서는 굳이 말해주지 않아도 나보다 그들이 더 잘 알 것이었다. 주인도 아닌 사람이 오래 가지고 있었던 일기장이 드디어 주인을 향해 돌아간다.

 

지은씨가 아빠에게 자신의 집 인테리어와 달라서 구경하는 재미가 있을 거라더니, 이게 뭔 차이냐고 불만 어린 목소리로 투덜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아빠는 다른 게 이상하지, 같은 인테리어 잡지를 얼마나 오래 읽었는데 라며 느긋하게 말한다. 나도 놀랐다고 얼마 전에 네 집에 갔을 때 말이지, 내 집인 줄 알았다니까.

둘의 집을 자주 오간 나는 진즉 알고 있었던 사실. 둘의 반응까지 내가 예상한 그대로라 왠지 웃음이 났다.

 

지은씨가 내 이름의 일부가 본인의 이름에서 왔다는 사실을 모른다 한들 그것이 뭐 중요할까. 우리는 분명 홀씨와 햇살과 빗방울만큼의 서로 다른 사람임이 틀림없지만, 한 풍경 안에 우리가 함께 존재한다는 것. 그 풍경을 떠올리는 우리가 분명 같은 풍경을 상상하고 있을 것이라는 사실이 중요했다.

어린 날, 지은씨가 나에게 생각보다 애정이 없다고 혼자서 슬퍼했던 어린 지운에게도 말해주고 싶다. 내 이름은 지운. 내 세계의 날씨를 좌우하는 두 어른의 이름을 가져온 이름. 이보다 더 좋은 이름을 가진 사람이 또 있을까.

 

   


 

 

유독 겨울치고는 날이 따뜻했고

-12월 11일

   

 

통영보다 추울 것이라 생각하고 껴입은 옷들이 무색하게 기운은 조금 땀이 났다. 그래도 지은이 사는 곳이 생각보다 추운 곳이 아니어서 다행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기운은 누구보다도 자신이 지은의 집으로 가고 있다는 사실이 실감이 잘 나지 않았다. 서로로부터 독립한 지 이제 일 년이 넘었지만, 기운은 자신의 공간에 지은과 지운이의 목소리가 없을 때 종종 울었다. 그들의 부재가 너무나 크게 다가오는 순간들이 있었다.

 

지은의 집은 햇빛이 옅게 들어와서 잠이 불쑥불쑥 왔다. 기운이 시도 때도 없이 누워서 잠드는 동안, 지은은 단 한 번도 그와 함께 잠든 적이 없었는데 기운이 돌아가기로 한 날 자신이 지은의 친구 집에 다녀온 사이 좋아한다던 안락의자 위에 잠들어있었다. 여전히 지은은 말간 얼굴을 가진 어린아이 같았다. 그 안에는 누구보다 강한 어른이 들어있지만. 그 간극을 기운은 좋아했다. 처음 지은을 만난 날 지은과 오래 알고 싶다고 생각했던 건 아마도 그 간극을 느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기운은 지은이 가진 침묵을 좋아했다. 처음 만난 날, 둘이 나란히 누워있을 때 애써 대화하지 않으려는 지은의 태도가 기운의 마음에 오랫동안 남았다. 자신은 분명 사람과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을 좋아했지만 그만큼 예민했고 그들로부터 쉽게 영향을 받았다. 자신이 그런 사람이라는 것을 지은을 만나고서 천천히 알게 되었다. 밖에서 어떤 일이 있었건 지은이 있는 집으로 돌아오면 그 모든 것들은 사라지고 기운 자신만 오롯이 남는다는 걸 느꼈다. 지은과의 시간은 그런 의미에서 자신만을 위한 시간이었다.

 

 

지은이 모아둔 앨범들을 구경하는데 자신의 집에도 있는 것들을 여럿 발견했다. 그들이 지난 시간 동안 중요시했던 건 거리감이었다. 낯섦과 익숙함 사이 중간의 거리감. 서로에게 너무 익숙해져서 그 존재를 당연하게 여기지 말자고 곧게 다짐해오면서 살아왔다. 사람들은 이상하게 서로의 존재가 당연해지면 서로를 더 슬프게 만드니까. 우리는 각자 자신을 지키면서 그다음 서로를 생각하자고 지은과 이야기했던 날이 있었다. 그렇게 사는 게 훨씬 더 재밌을 거라고도 이야기했었다. 그래서 그들이 함께 살 때, 그들의 집에는 자신의 취향과 다른 두 명의 취향이 집 안을 다채롭게 채웠다. 각자 독립한 지금 그들은 이미 뒤섞인 지 오래지만, 그중에서 오롯한 자신의 취향을 찾아 나가고 있다. 그 다름에 대해 지은과 이야기 나누는 것은 기운의 소소한 행복 중 하나이다. 선반의 가장 끝, 새것으로 보이는 앨범은 지운의 흔적이지 싶었다.

지은의 집에 놓인 지운이의 흔적에 기운은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어릴 적 지은이의 사랑에 은근슬쩍 목매던 아이는 결국 당당하게 지은의 우선순위에서 꽤 높은 순위의 사람이 되었다. 자신은 몇 위 정도일까, 설마 지운이보다 아래는 아니겠지, 기운은 생각했다. 그런 생각에 골몰하던 때 지은이 깨어났다.

 

지은에게 이만 가보겠다고 했다. 생각하고 온 시간보다 오래 친구에게 부탁하고 온 자신의 또 다른 친구들이 걱정된다고. 지은의 표정은 잠에서 아직 헤어 나오지 못한 듯 멍했지만 배어 나오는 섭섭함이 잠시 그녀를 스쳐 지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이내 지은은 그럼 조만간 내가 놀러 갈게, 라고 답했다.

 

일주일을 통영보단 춥지만, 생각보다는 따뜻한 양양에서 보냈다. 지은과 이십 대 초반에 같이 살 때처럼 둘이서 많은 영화를 틀어놓고 보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렇게 잠깐만 있다 가야지, 해놓고 꽤 오래 머물렀다. 

지은의 많지 않은 친구들을 만났고, 이웃집 남자와 친구가 되었다. 그리고 마지막 날에 지은의 말을 듣고 드디어 그 순간이 왔구나, 기운은 생각했다. 기운은 이십 년의 이야기를 매듭짓자는 지은에게 좋다고 했다. 지은이 과거에 지운이가 독립하며 넌지시 이야기 꺼냈던 말을 지난 시간 동안 기운은 오래 곱씹어 보았다. 그들이 사회적으로 묶인 관계를 청산하면 지은과 멀어질까 봐 두려워하던 시절이 있었다. 기운은 물론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는다. 

 

*

 

“그럼 잘 있어, 전부인” 기운이 웃으며 지은에게 인사했다.

“잘 가, 전남편”

 

뒤돌아서는 자신을 바라보는 지은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지은의 집 대문을 나서는 기운은 뒤돌아보지 않았다.

겨울 햇살이 여전히 따뜻했다.

 

 

지은,지운,기운 끝.

 

 

[전지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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