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미술책의 탈을 쓴 유쾌한 철학책 - 다정한 철학자의 미술관 이용법

이 책을 읽은 당신은 철학자가 되어있을 겁니다.
글 입력 2021.10.09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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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한철학자의미술관이용법_표지_평면.jpg

 

여러분들이 미술관에 가는 이유는 무엇인가? 필자는 그림과 이야기하러 미술관에 간다. 작가마다 작품마다 그림들은 제작기 다른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미술관에 가면 그림 앞에서 나만의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다. 그림을 보고 떠오르는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가는 과정이 즐거워서 미술관을 계속 찾아간다.

 

그런데 그림에서 다양한 생각들이 뻗어져 나가 철학까지 끌고 온 사람이 있다. 『다정한 철학자의 미술관 이용법』의 이지민 작가는 천지창조에서 니체의 현대철학 이념을 살포시 얹고, 메이슨 자 유리병에서 공자의 군자불기를 꺼내어 이야기를 이어간다.

 

모호하게 느껴지는 개념들로 성을 쌓아놓은 회색의 철학은 온갖 색이 반짝이는 미술과 겹쳐져 쉽고 재미있게 다가오기 시작한다.

 


 

천지창조를 발칙하게 바라보는 시선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 중 ‘아담과 창조’는 아담과 신의 손가락이 만나는 유명한 그림이다. 전지전능한 신과 유한한 인간의 만남은 철학적으로 굉장히 중요한 사건이다. 신과 인간의 관계에 따라 서양 문화권에서는 시대가 나뉘었기 때문이다. 고대, 중세, 르네상스, 근대와 그 이후. 그 구분은 서양철학에도 영향을 주었다.

 

 

아담의 창조1.jpg

 

 

‘아담의 창조’에서 손의 모습만을 보면 왼쪽 손은 힘을 빼고 가볍게 들어 올린 모습, 오른쪽 손은 상대의 손끝에 닿기 위해 애쓰는 힘이 들어간 모습이다. 이 모습만 보면 부드럽게 받아들이는 쪽이 신, 절대자에게 닿으려는 열망이 담긴 손이 인간의 모습으로 느껴진다.

 

그러나 전체적인 그림에서는 반대의 모습을 보여준다. 아담은 유유자적 앉아있고 신은 의지와 열망을 갖고 날아오고 있다.

 

 

천지창조_아담의창조.jpg

 

 

천지창조를 바라보는 데에는 두 가지 관점이 있다.

 

첫 번째, 인간은 그저 유순하고 동물 같은 존재이고 신은 애써 날아가 이성과 지성, 도덕 감정 같은 고귀한 것들을 부여하려고 한다. 인간을 동물보다 한 차원 높은 존재로 만들어주고자 신이 열의를 가지고 인간에게 닿으려고 하는 것이다. 아담은 힘이 없이 축 늘어져서 기대고 있는 모습으로 보인다. 신 뒤에 위치한 커튼은 뇌의 모습 같고 아래쪽으로 흩날리는 천은 동맥과 정맥이 연결된 심장의 형상이 보인다. 거기다가 신의 왼팔에는 이브가 안겨있다. 차가운 이성의 머리와 따뜻한 피가 뛰는 가슴 그리고 짝꿍을 주려는 자애로운 신인 것이다. 이런 관점으로 본다면 천지창조를 보고는 신의 사랑과 희생에 경탄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

 

천지창조를 바라보는 두 번째 관점은 좀 더 발칙한 시선으로 ‘인간 세상에서 신의 존재란 어디까지나 인간들이 만들고 인정함으로써 가능한 것’으로 지극히 인간 중심적인 사고가 된다. 이런 관점으로는 신은 인간의 상상과 염원이 만들어낸 발명품이 되는 것이다. 인간은 오래전부터 돌, 나무, 커다란 곰 등 힘센 것들을 경외하며 그들에게 주술적인 힘이 있다고 믿었다. 그런 믿음은 시대가 지나면서 고대 신화가 되었고 현재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절대자로서의 유일신이 되었다는 사고다. 그래서 아담의 창조의 모습은 지성의 산물로서의 신이 나의 존재를 인정해달라면서 애써 인간을 찾아와 힘을 주어 손을 뻗는 모습인 것이다.

 

철학자들 중에 종교라는 시스템을 흔든 자가 많았다. 그중에서도 신에게 도전하기 만렙의 철학자가 있었는데 바로 “신은 죽었다”라는 선언으로 잘 알려진 니체이다. 니체는 사람을 후려패는 듯한 글을 많이 적곤 하는데 특히 열과 성을 다해 두들겨 팬 것이 기독교와 크리스천이다.

 

 

 

니체는 왜 신이 죽었다고 선언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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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는 <도덕의 계보>에서 이천 년간의 서양철학을 단번에 깔아뭉갠다. 여기서 주목할 개념은 '주인 도덕과 노예 도덕' 그리고 '가치 전복'이다. 주인과 노예는 실제의 계급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정신의 소유자들을 말하는 것이다.

 

즉 주인은 '내 삶의 주인', 노예는 찌질하고 낮은 정신의 소유자 정도로 생각하면 된다.

 

주인들의 도덕은 좋음과 나쁨이라는 두 가지 요소로 구성된다. 그들의 도덕은 단순히 '좋은 것'에서 시작한다. 왜 좋은지 굳이 머리를 싸매고 생각하지 않아도 그냥 좋은 게 드러나는 그 차제가 니체가 말하는 좋음이다. 건강하고, 긍정적으로 흘러넘치는 가치다. '나쁜 것'의 정의는 그저 단순하게 좋은 것의 반대다. '싫은 것'에 가깝다고 생각되는 개념이다. 

 

반면 노예들의 도덕은 좋음과 나쁨이 아니라 선과 악으로 구성된다. 노예들은 주인 도덕의 '좋음과 나쁨'의 가치를 전복시켰다. 가치를 전복시켰다는 의미는 주인 도덕의 좋은 것을 '악'으로 바꾸고, 나쁜 것은 '선'으로 바꾸어버렸다는 의미다. 뛰어난 게 별로 없는 노예들은 힘겹고 고달픈 삶 속에서 위안을 찾으려 했다.

 

그 방법이 바로 가치의 전복이다. 나의 약함은 못난 것이 아니라, 성스럽고 귀한 것이다. 참고 순종하고 견디는 것은 억압이 아니라 진정한 자유라는 생각이다. 주인들의 자신감이나 찬란한 자기 긍정에는 '악'의 굴레를 씌운다. 쉽게 얘기하면 가치 전복은 소위 '정신 승리'에 가깝다. 포도나무에서 포도를 따먹지 못하자 '저 포도는 시어서 안 먹는다'라고 생각하는 여우처럼 말이다.

 

주인은 좋음이라는 것이 먼저 존재하고 거기서 나쁨이 정의된다. 그러나 노예들은 상대에 대한 부정을 통해 자신들의 가치를 만들어낸다. 나의 정의가 나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남에서부터 오는 것이다. 자율적이지 못하고 외부로부터 파생되어 왔다는 점에서 노예인 것이다.

 

그런데 주인 도덕과 노예 도덕이 서로 겨루는 동안 왜 신이 사망했냐고? 바로 '노예 도덕의 가치 전복'에 대한 핵심적 사례가 바로 기독교이기 때문이다. 니체에 따르면 기독교는 집단 최면을 통해 빛나는 내세를 만들어둔 대신에 우리가 사는 현실을 시궁창으로 바꿔두었다. 그 안에서 원죄의식이라든지 금욕주의같이 자기 자신을 끝없이 학대하면서 사는 것이 바로 선이며 자유라는 착각 속에 빠져 있다는 것이다. 니체는 인간 이성이 쌓아온 자유의지라는 것은 사실 내가 스스로 선택했다는 착각이며 그것은 자학에 불과하다고 일갈한다.

 

니체는 <차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영원회귀'를 말한다. 우리는 인생이 잘 짜인 인과관계이고, 잘 참고 견디면 내세에는 어떤 보상이 있을 거라 생각한다. 그러나 영원회귀는 현실을 다르게 본다. 현실 세계는 같은 것이 랜덤하게 되풀이되는 카오스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니체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의 삶을 사랑하라"라는 아모르파티(amour fati)를 선언한다. "우리의 삶이 영원히 반복되는 것이라면, 영원히 반복되어도 만족스러울 만한 아름다운 삶으로 한 차원 고양시키면 된다는 것"이다.

 

 

영원회귀를 사랑하라. 심연의 가장자리에 가서 눈을 깜빡이지도 말고 가만히 직시하고, 뒤돌아서 계속 가라.

 

- 27p

 

 

니체는 허무주의로 알려져 있지만 인간 삶의 허무를 가차 없이 폭로한 데서 이름을 얻은 것일 뿐이다. 니체는 그 허무를 껴안고 계속 전진할 것을 주문한다. 그러므로 그는 허무주의를 뛰어넘어 허무주의를 극복하자는 인물이다. 염세의 철학이 아닌 긍정의 철학인 것이다.

 

니체는 신으로 상징되는 권위와 도덕을 뒤집어버렸다. "신은 죽었다"라는 니체의 말은 가벼운 무신 선언이 아닌, 수천 년간 쌓아온 인간 이성과 도덕률에 대한 묵직한 도전이었던 것이다.

 

사실 니체는 기독교 앞에서는 망치를 들었지만 예수의 앞에는 꽃을 놓았던 사람이다. 예수는 경탄할 만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니체에게 예수의 고통은 긍정적 에너지였고 존경의 대상이었다. 인류 역사상 크리스천은 단 한 사람, 예수였다고 말한다. 그로 인해 만들어진 천국의 이야기를 사람들이 믿고 지옥에 떨어지지 않을까 불안하게 살아가는 대다수 인간들의 삶이 나약하고 우매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니체는 말한다. '신은 죽었으므로 신의 위치를 향하여 스스로를 드높이는 삶을 살아라.' 영원회귀의 깨달음 속에서도 싱그러운 생명력으로 춤추는 삶을 사는 것이 인간의 사명이다.

 

 

 

미술책의 탈을 쓴 유쾌한 철학책



이진민 작가는 철학을 일상의 말랑말랑한 언어로 풀어내는 일을 하고 있다. 『다정한 철학자의 미술관 이용법』은 자유롭고 소통이 유연한 플랫폼 브런치에서 시작되었다. 미술에 담백하게 얹어진 철학과 유쾌하고 솔직한 문체는 시간이 지나는 줄 모를 정도로 몰입하게 만들었다.

 

어려운 첫 만남을 유쾌하게 만들어주는 책 같다. 모든 것은 처음 시작하는 것이 어렵다. 일단 한 번 맛을 보고 나면 그다음의 것은 비교적 수월하게 흘러간다. 추상적인 개념에 논리를 쌓아올리는 철학은 선뜻 다가가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어려운 철학과 대비되게 미술은 누구나 볼 수 있고 어떤 것이라도 느낄 수 있다. 미술에서는 모두가 정답이 된다.

 

이 책은 미술작품에 대한 생각과 감상을 이야기하고 이야기가 이어지다 보면 철학으로 흘러간다. 그러고는 자연스럽게 철학의 개념을 꺼내고 철학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작가의 말을 따라 미술작품을 감상하다가 정신을 차리고 보면 철학의 매력에 빠져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철학의 소통 방식을 살짝 틀어주니 철학은 생각보다 즐겁고 이해하기 어렵지 않은 친구였다.

 

정답을 찾는 대한민국 사회에서 어떤 답이라도 정답이 되는 미술과, 삶과 세상에 질문을 던지는 철학은 꼭 필요하다 생각된다. 인생을 잘 사는데 꼭 필요한 가치인 미술과 철학을 일타쌍피로 얻어 가는 것이다.

 

질문을 던지는 우리들은 모두 철학자다. 이 책을 통해 어디서든 철학을 꺼내어보고, 좋은 질문을 던지는 철학자가 많아졌으면 좋겠다.

 

 

 

[아트인사이트] 이소희 컬쳐리스트.jpg

 

 

[이소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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