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다정한 철학자의 미술관 이용법: 시민권을 가지고 있다 해서 모두가 '시민'인 것은 아니다!

글 입력 2021.10.09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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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와 미술관, 내가 좋아하는 단어들이 한데 모여있다. 게다가 '다정한'이라는 형용사는 자못 따뜻하게 다가온다. 좋아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이 더해진 공간에서 유영을 하게 될 자못 행복한 상상을 하며, 책장을 펼쳐본다.

 

저자는 정치철학을 전공하였다. 그러니 미술관보다는 철학자와 더 가까운 사람인 것이다. 그런 저자가 성인이 되고 친구를 통해 우연히 미술관의 매력에 눈을 뜨게 되었고, 철학을 어렵다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조금 더 편하고 재미있게 설명할 수 있는 시각적 도구로서 그림의 힘을 빌리게 되었다고 한다. 학문을 하는 사람으로서 자신이 공부하는 분야를 대중과 공유하고자 하는 욕구는 누구에게나 조금씩은 내재되어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이를 실천하기 위해 손수 장르의 결합을 추진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이는 진정 저자의 다정한' 마음이 아니었을까, 싶다.

 

여러 세부 주제로 구성이 되어있는 책 <다정한 철학자의 미술관 이용법>, 나에게는 너무나도 좋은 책이었다. 고등학교 <정치>시간에 배웠던 홉스, 로크, 루소의 반가운 이름도 만날 수 있었고 '신은 죽었다'라는 선언으로 유명한 니체의 심도 있는 사상을 맛볼 수 있었다. 찔끔 찔끔, 어디서 들어는 본 것 같은데 잘 정리가 되지 않았던 철학의 조각들을 맞춰가는 재미가 있었고 그것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곁들여진 그림 덕분에 형이상학적인 사상들이 더욱 잘 정리가 되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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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울 클레, <상대의 지위가 더 높다고 믿는 두 사람의 만남>, 1930

 

 

가장 인상적이었던 그림은 파울 클레의 <상대의 지위가 더 높다고 믿는 두 사람의 만남>이었는데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상태에서 즉, 상대의 지위와 권력을 예측할 수 없는 상태에서 서로의 지위가 자신의 지위보다 높다는 생각에 허리를 숙이는 모습을 풍자한 그림이라고 한다. 참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 그림이었다. 지금 사회에도 관통하는 주제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나날이 상징의 힘이 강력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고 있기 때문이다.

 

SNS 속 이미지는 날 것의 이미지가 아니다. 그 속에는 수많은 말들이 담겨 있다.

 

'나는 이만큼 행복해', '나는 이만큼 잘 살고 있어', '나는 이만큼을 누릴 여유가 있어'

 

아무런 생각 없이 피드를 내리다 보면, 나도 뭔가를 해야만 할 것 같은 충동이 인다. 이러고 있으면 결코 '힙한' 사람이 될 수 없을 것 같은 두려움에 같은 시간을 보내면서도, 훨씬 풍부한 삶을 살고 있는 화면 너머의 저 사람을 보며 반성하고 성찰하기를 반복한다. 보이는 것이 점점 중요해지고 있다. 가까이 들여다보면 별 볼일 없다 할지라도 카메라 렌즈 너머에서는 반짝여야 한다. 그 강박 아닌 강박에 집착하게 되면, 나 자신이 그 과정을 즐기고 있다 '착각'하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루소는 '허영심'에 대해 이야기했다. 자연적으로 모든 생명체에는 자연적 차이가 발생한다. 외모, 키, 능력 등 모든 측면에서 동등하게 태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 같은 불평등은 비교를 초래한다는 것이다. 사회가 형성되며 나를 중심에 두었던 사고가 타인으로 뻗어가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남과 비교하였을 때, 내가 남보다 더 나은 존재가 되고 싶다는 '허영심'이 우리를 이기적이고 공격적인 존재로 만든다는 상황이 루소가 말한 '초기 사회'의 모습이다. 따라서 루소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시민'이 되는 것 즉, '일반 의지'를 가진 사람이 되기 위한 노력이다. 불평등을 인정하고 그것을 이용해 개개인이 더 큰 이익을 얻기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인정하며 함께 자유로울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방안을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비단 도덕적 의무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보다 지속 가능한 사회를 위해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다 같이 공동체를 위한 길을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다.

 

참으로 이상적인 말이 아닐 수 없다. 누가 모르나,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는 사회가 중요하다는 것을. 하지만 이를 주장한 루소가 21세기가 아닌 18세기 사람이라는 점에 주목해 보자. 이 당연한 사실을 수 세기가 지나도록 실천해오기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아니, 오히려 우리는 비교를 조장하는 사회로 나아가고 있다. 불평등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 마치 멋인 것처럼 말이다.

 

양극화라는 단어가 너무 자주 들려온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나라도 사회도 나름의 해결책을 강구하고 있다. 하지만 본질은 루소가 말한 '일반 의지'일지도 모른다. 아무리 좋은 정책과 대안이 있음 뭐 하나, 사회 전반에 격차를 조장하는 태도가 깔려 있으면, 쇠귀에 경 읽기와 다름없다 생각한다. 루소가 말한 '시민'이 된다는 것은 공자가 말한 '군자'가 되는 것과 같다 한다. 시민권을 가지고 있다 해서 모두가 '시민'인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책을 읽으며, 그리고 파울 클레의 그림을 보며 나는 시민이 되고 싶어졌다.

 

 

[김규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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