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콩트2' - 밤이 굴러간다 [문화 전반]

데굴데굴
글 입력 2021.10.06 2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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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나자마자 그는 냄비에 남아있는 뱅쇼에 물을 한 컵 따라 넣고 불을 올렸다. 뱅쇼 재탕이 끓어오르기를 기다리는 동안 TV를 틀었다. 가만, 뱅쇼 재재탕이던가? 어제의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중요하지 않았다. 속을 데워줄 뜨거운 무언가가 필요했다. TV에는 자연 관련 다큐멘터리가 나오고 있었다. 인도양 마다가스카르 근처 섬들에 대한 내용이었다. 마다가스카르 하면 그에게 떠오르는 유일한 생각은 하마, 얼룩말, 사자와 기린이 합심해서 동물원을 탈출하는 모습이었다. 아주 오래전 아들과 극장에서 본 대충 그런 내용의 애니메이션 제목이 ‘마다가스카르’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마가 아니라 코뿔소였던가? 펭귄도 나왔던 것 같은데 어떻게 사바나 평원의 초식동물과 남반구 극지방의 날지 못하는 조류가 함께 나왔을까 생각하다가 동물원이 배경임을 다시 기억해냈다.

 

이런 저런 생각들을 나열하던 와중에 냄비가 끓어 넘쳤다. 그는 뚜껑을 열어서 레인지 옆 조리대에 올려놓았다. 맨손이라 뜨거웠다. 그러나 뜨거움을 느끼는 일보다도 그는 냄비가 끓어 넘치는 것도 모른 채 잡생각에 빠져 어디를 멍하니 보고 있었는지를 생각해보려고 애썼다. 누런 조리대 모서리와 하얀 벽이 이어지는 구석의 실금을 보고 있었는지, 설거지를 하지 않고 겹겹이 쌓아 둔 싱크대 안의 접시들을 보고 있었는지.

 

그는 몽상가였다. 오래전 그는 글을 썼으니 직업과 꽤 어울리는 체질이다. 전에는 때때로 그를 꿈에서 깨게 해주는 사람이 필요했다. 그리고 실제로 그 역할을 해주는 사람도 있었다. 그가 어딘가를 바라보며 새로 떠오른 잡생각에 몰두하면 그의 아내는 ‘뭐 봐?’라며 말을 걸어주곤 했다. ‘뭐 봐?’라는 ‘무슨 생각해?’의 다른 말이었다. 그는 이제 무엇을 보지 않는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중요하지 않다. 꿈에서 깨게 도와줄 사람도 필요하지 않고 실제로 그래줄 사람도 이제 없다. 글쓰기를 그만둔 것도 한참 전 일이다. 몽상가라는 성정은 그도 모르게 어느 모퉁이 두고 온 채 몽상이라는 습관만 남은 것 같았다.

 

싱크대에 있던 컵을 대충 물로 헹군 뒤 그는 지금 막 끓인 뱅쇼를 컵에 따랐다. 온라인 서점에서 책을 몇 권 샀을 때 사은품으로 받은 하얀색 머그잔이었다. 책이 가득 찬 책장 일러스트가 컵의 둥근 벽면을 두르고 있었다. 그때 샀던 책들은 이곳으로 거처를 옮기며 모두 버렸고(그가 버린 것은 아니었다.) 하얀 머그는 때가 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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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한 목소리로 마다가스카르의 기후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한 TV를 틀어 둔 채로 그는 부엌에 난 바깥으로 향하는 쪽문에 달린 방충망을 걷고 바깥 테라스로 나갔다. 해가 지고 있었지만 저물어 가는 해가 주는 하루가 마무리되는 듯한 감각은 없었다. 그의 하루는 조금 전에 시작했기 때문이다. 처음 이 뱅쇼 맛을 봤던 때가 기억난다. 이곳은 산이지만 그곳은 바닷가였다. 그때도 해가 지고 있었으며 아내와 연한 알코올 향을 풍기는 보라색 음료가 담긴 유리잔을 일몰의 빛이 통과하는 바람에 만들어낸 절묘한 빛깔에 대해 감탄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의 그 뱅쇼도 지금의 이 뱅쇼도 모두 아내가 만들어 준 것이다. 다만 냄비 앞에 서 있던 그녀의 뒷모습은 그때와 어제를 비교하면 전혀 달랐다.

 

알코올은 거의 다 날아갔다. 그저 뜨끈한 액체였다. 아내의 뒷모습으로부터 어제의 기억들이 조금씩 돌아왔다. 그는 그녀를 붙잡았지만 그녀는 차 키를 꺼냈다. 밥이라도 먹고 가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으나 난장판인 부엌과 텅 빈 냉장고를 떠올리니 밥이라고 때울 만한 음식도 없음을 깨닫고 그저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에게 아무것도 줄 수 없음을, 그녀가 여기서 자신과 이러고 있을 이유가 하나도 없음을 그는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아무것도 줄 수가 없으니 반대로 요구하고 싶어졌다. 마지막으로 당신이 끓인 뱅쇼라도 한번 먹어보고 싶다.

 

그는 염치없게도 마지막까지 전 부인이 전남편에게 가지는 마지막 남은 정이라기보다 마음씨 좋은 선량한 이가 불쌍한 넝마주이에게 어쩔 수 없이 가지는 동정심에 가까운 마음이라도 이용해 먹기로 한 것이다. 그녀는 잠시 생각한 뒤 레몬과 시나몬 등의 재료 위치를 물었다. 와인의 위치는 그녀가 이미 알았다.

 

그는 따뜻한 뱅쇼를 홀짝홀짝 들이키며 아내에게 이것이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마지막 알코올이 들어간 음료가 될 것이라고, 다시는 술을 먹지 않을 것이라고 근엄한 표정으로 선언했다. 그러니까 자기를 좀 도와달라고. 당신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나를 도울 수 있는 사람은 당신밖에 없다고. 그러면서 그는 그가 술을 끊은 후 펼쳐질 가족 단위의 미래에 대해 얘기하기 시작했다. 언제나처럼 현실감각이라고는 하나도 찾아볼 수 없었던 엷은 미소와 함께 알코올이라는 공통의 적과 함께 열심히 싸워 승리를 거둔 후 우리가 함께 맞이할 행복한 미래에 대해 말했다.

 

아내는 식탁에 앉아 그 말을 가만히 듣고 있었다. 그가 이야기를 끝내도록 그냥 내버려 두었다. 엷은 미소가 무표정으로 바뀌고 나서야 그녀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설거지는 오늘 자기 전에 하도록 해.’ 그녀는 가방에서 차 키를 꺼냈고 현관으로 향했다. 그녀는 그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녀는 문을 열고 나갔다. 남자는 따라 나가지 않고 식탁에 앉아 밖에서 차에 시동이 걸리는 소리를 들었다. 바퀴가 흙길 위를 회전하면서 흙이 튀는 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마침내 고요해지자 그는 일어나 뱅쇼를 다시 냄비 안에다 쏟았다. 그는 냉장고를 열어 소주를 꺼냈다. 그는 술을 마시고 또 마셨다. 몇 병을 마셨는지 알 수 없었다. 애초에 그는 숫자를 세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다가 자신이 잠드는지도 모른 채 잠에 들었다. 다음 날 그는 숙취에 대한 숙취를 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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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라스의 울타리에 기대어 해가 다 지고 완전히 어두워진 산의 속살을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서 빽빽하게 모여 있는 나무들은 깊게 패인 주름으로 변하고 있었다. 멀리서 다람쥐가 다가왔다. 테라스의 야외조명을 꺼둔 탓에 다람쥐는 그를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다람쥐는 테라스 울타리까지 올라왔다. 다람쥐의 작은 두 손에는 밤이 들려 있었다. 그가 나무인 줄 아는 것은 아닐까 하고 그는 생각했다. 다람쥐에게 무언가를 주고 싶었다. 간식으로 줄 만한 견과류가 없을까 하며 그는 집안으로 돌아갔다.

 

TV에서는 마다가스카르 근처 모리셔스 섬에 서식하던 지금은 멸종된 도도새들에 관한 역사적 자료들이 나오고 있었다. 도도새들은 처음에 모리셔스 섬에서 아주 평화롭게 살았다. 천적이나 큰 위협이 없었기 때문에 날개는 작아지고 비행 능력을 잃어버렸다. 그 섬에 조류를 제외하면 포유류는 거의 없었다고 한다. 새들을 위한 낙원인 셈이다.

 

그러나 1505년 포르투갈인들이 어선들의 중간 경유지로 모리셔스 섬을 이용하고, 네덜란드인들이 들어오면서 도도새는 무차별적으로 포획되었다. 그 과정에서 유입된 외래종들도 큰 문제였다. 쥐, 돼지, 원숭이 등의 바깥세상의 동물들이 도도새의 서식지들을 짓밟았다. 결국 도도새들의 개체 수는 빠른 속도로 줄었으며 머지않아 그들은 멸종했다. 기록에 따르면 1681년에 마지막 도도새가 죽었다고 한다.

 

그는 TV를 보며 어쩐지 도도새와 자신을 동일시하게 되었다. 그런 동일시가 굉장히 부적절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역겨운 것이 될 수도 있었지만 그에게 그런 것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아니 생각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지금 그에게는 적절함이나 상황에 대한 객관적 인식 같은 귀찮은 것들보다 자신을 연민하는 것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어차피 이곳은 산속이다. 누가 뭐라고 하겠는가?

 

모리셔스 섬과 그곳의 지리적특성에 관한 영상자료들을 보면서 그는 뱅쇼를 한 모금 마셨다. 차갑게 식고 알코올은 흔적도 없이 날아가 뱅쇼 더 이상 뱅쇼가 아니게 되었다. 그는 머그잔을 조리대에 내려놓고 잠시 고민을 한 뒤 컵에 남은 음료를 냄비에 다시 부었다. 냄비 바닥에 말라붙어 있던 레몬 껍데기와 시나몬 스틱들이 살짝 떠올랐다. 냉장고를 열었다. 소주 한 병을 꺼내어 냄비 속으로 콸콸콸 쏟아부었다. 이로써 뱅쇼는 이제 확실히 뱅쇼가 아니게 되었다. 색은 이제 짙은 보라색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투명한 분홍색을 띠었다. 불을 올린 후 그는 다람쥐에게 줄만 한 것이 없을까 하고 찬장을 열어보았지만, 집안에 유일한 견과류라고는 1.6L들이 페트병에 담긴 맥주를 샀을 때 사은품으로 딸려 온 짭조름한 볶은 땅콩밖에 없었다. 그 마저도 먹다 남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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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주 안주로 딸려온 소금으로 간한 땅콩 봉지를 들고 밖으로 나가니 다람쥐는 보이지 않았다. 다람쥐가 있던 테라스 울타리 위의 자리에는 밤껍질과 다람쥐가 파먹던 밤 한 톨이 부스러진 채로 남아있었을 뿐이다. 그는 그 흔적들을 냄비 밑바닥에 있던 뱅쇼 찌꺼기들을 연상하며 내려다보았다. 그는 혹시 몰라 돌아올 다람쥐를 위해 봉지 안의 땅콩들을 울타리 난간 위에 쏟아 놓았다. 다람쥐가 돌아오더라도 먹던 밤이 아니라 그가 놓아준 먹이를 먹었으면 했다. 그는 손가락으로 밤껍질을 튕겼다. 부스러기들을 손가락으로 쓸어 바깥으로 털었다. 그리고 부서진 밤톨을 주워 숲속으로 멀리 던졌다. 흙 비탈길을 밤톨이 구르는 소리가 났다. 제대로 된 길을 찾았는지 소리는 끊이지 않고 멀어졌다. 계속 아래로 아래로 굴러떨어지는 것 같았다.

 

안으로 들어오니 자연 다큐멘터리는 끝이나 있었다. 광고 시간이었다. 화면 속에서는 여자가 교통 체증으로 꽉 막힌 고속도로 한가운데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역시나 요즘 광고답게 뭘 광고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불에 올려둔 냄비의 뚜껑이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레인지 앞으로 가 뚜껑을 여니 진한 알코올 향이 훅하고 올라왔다. 기분이 나아졌다. 또는 기분이 나아지는 것 같았다. 국자로 분홍빛의 맑은 액체를 퍼 올려 다시 머그잔에 담았다. 맛을 보니 좋았다. 오늘 밤 그 냄비를 전부 비워버려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그는 그렇게 했다.

 

*


그날 밤 역시 그는 자신이 잠드는지도 모르는 채로 쇼파에서 잠에 들었고, 산비탈길을 끊임없이 굴러떨어지는 밤톨에 대한 꿈을 꾸었다. 누구의 시점일지 모르는 시점으로 끊임없이 회전하는 밤톨을 바라보았다. 그건 다람쥐의 시점 일수도, 나무들의 시점일 수도 있었다. 밤은 끊임없이 굴러갔다. 그는 꿈속에서 생각했다. 왜 멈추지 않지? 왜 바닥에 닿지 않는 걸까? 나는 언제까지 이걸 보고 있어야 하는 거지? 머릿속에 거대한 물음표를 띄워 둔 채 그는 깊은 잠에 들었다. 그날 아침에 앓은 것이 숙취에 대한 숙취라면 이것은 잠에 대한 잠이었다. 그렇게 그날 밤도 굴러갔다.

 

 

[노상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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