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친구와 연인의 경계에서 - 기적의 시대 [도서/문학]

글 입력 2021.09.30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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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많은 사람과 관계의 끝을 경험해봤지만, 그 끝이 늘 선명하진 않다. 오히려 절단면을 확인할 수 있는 이별은 거의 떠오르지 않는다. 연희와도 한순간 이별을 맞이한 것이 아니라 조금씩 천천히 멀어졌다. 정확한 시점이 기억나진 않지만 그녀와 마지막으로 얼굴을 봤거나, 마지막으로 연락을 주고받은 이후에도 나나 그녀가 다시 연락을 한다면 특별한 놀라움이나 특별한 반가움 없이도 그것에 응답할 시간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시기가 지나자 이제는 더 이상 그러지 못할 것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 『내일의 연인들』 p.145

 

 

오늘 소개할 단편소설은 정영수 작가의 「기적의 시대」이다. 정영수 작가는 2014년 단편소설 「레바논의 밤」으로 창비신인소설상을 수상하며 등단하였으며, 제 9회와 제 10회 젊은작가상을 연달아 수상하며 문단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정영수 작가의 소설들에서 엿볼 수 있는 가장 특이한 점은, 신진작가답지 않게 사랑이라는 주제 하나로 우직하게 자신의 소설가 커리어를 완성해 나가고 있다는 것이다. 연인 한 쌍의 이야기, 혹은 여러 쌍의 연인들을 관통하는 오묘한 분위기에 대해 섬세하고 통찰력 있는 접근을 독자들에게 제공한다. 작년에 정영수 작가의 단편작 「내일의 연인들」을 다룬 바 있는데, 정영수 작가에 대해 더 자세히 알아보고 싶은 독자들은 해당 글을 참고해보아도 좋을 것 같다.

 

[Opinion] 답습되는 사랑, 극복되는 사랑- 내일의 연인들 [도서/문학]

 

우리는 살면서 만남과 헤어짐을 수없이 반복하게 된다. 우리가 경험하는 관계들 중에서 어떤 관계는 명확하게 정의되지만, 썩 깔끔하게 설명되지 않는 관계 역시 존재한다. 모호한 경계에 위치했던, 혹은 현재 위치하고 있는 그런 인간관계는 이따금씩 우리의 머릿속에 떠오르기도 하고, 더 나아가 명확하게 구분지어진 관계들보다 더욱 큰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연애와 사랑의 측면에서 설명하는 것이 가장 쉬운 예시가 될 것 같다. 근 10년 동안 연애로 진입하지 않는 남녀의 관계를 “썸”이라는 단어로 포착하는 것이 제법 흔한 것 같다. 그중에는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기억에 남는 썸도 있을 것이고, 어쩌면 연애보다 더 강렬한 기억을 선사했던 썸도 있을 것이다. 언어는 필연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고, 썸이라는 말로 포착하는 순간 그 내막은 섬세하게 다뤄지지 못하는 면이 있다. (아마 그 한계를 넘어서게 해주는 것이 서사 장르의 매력이 아닐까.)

 

「기적의 시대」는 《현대문학》 2019년 2월 호를 통해 발표되었고, 소설집 『내일의 연인들』에서 만날 수 있다. 「기적의 시대」 역시 사람과 사람의 관계, 그리고 그것을 기억하는 방식에 있어서 의미 있는 지점을 다루고 있다. 결혼의 시스템 속에서 안정적인 사랑을 구축하고 있는 현재 주인공의 모습 이면에는, 말 못할 과거의 사랑이야기가 머물고 있다. 결혼이라는 제도의 보호 속에서도 과거의 사랑에 대해 미처 말하지 못하는 마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현재와 과거의 사랑이 나란히 얽혀 있는 단순하지 않은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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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인 ‘나’와 은주는 결혼한 뒤로 서로의 과거 연애 경험에 대해 거리낌 없이 말하게 된다. 그래서 여태까지 각자 만나온 애인을 거의 모두 알게 된다. 어느 날 고등학교 때부터 친했던 ‘나’의 친구인 성준네 부부와 넷이서 부부 동반 여행을 떠나게 되는데, 상준의 말을 통해서 은주는 ‘나’가 밝히지 않았던 옛 기억 속 연희의 존재를 알게 된다.

 

고등학교 2학년 동갑내기인 주인공 ‘나’, 성준, 연선은 PC 통신 독서 동호회를 하며 친해진다. 독서 이외에도 서로의 일상을 공유하며 가장 친하게 지낸다. 어느 날 ‘나’가 연선의 집에 전화를 걸었을 때, 연선의 한 살 터울 언니인 연희가 전화를 받게 된다. ‘나’와 연선의 관계를 잘 알고 있던 연희는 ‘나’와 급속도로 친해지게 되고, 성준과 연선 사이의 미묘한 관계를 눈치 챈 연희와 ‘나’는 매일 전화를 주고받으며 그들의 큐피드가 되어준다. 연희가 남자친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연희와 ‘나’는 가끔 산책을 다니며 이야기를 나누곤 한다. ‘나’는 그녀가 남자친구가 있다는 점을 배려해 친구의 역할에 머물며 더러는 그녀의 남자친구 이야기를 들어주기도 한다.

 

시간이 지난 어느 날 함께 산책을 하던 차에 연희는 “엉망이야”, “망한 것 같아”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하고, 그 뒤로 그들의 관계는 차차 멀어져간다. 그 뒤에도 ‘나’는 연희의 소식을 종종 전해 듣지만, 의미심장한 말의 의미에 대해서는 끝내 물어보지 못한다.


*

 

「기적의 시대」을 감상하면서 꼭 짚고 넘어가고 싶은 부분이 두 군데 있다.

 

하나는 전체적인 서사의 구조에 관한 것이다. 소설은 현재 은주와 결혼한 나의 이야기로 시작하지만, 이내 고등학생 시절 연희와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로 전환된다. 이때 소설의 마지막 장면은 ‘나’가 연희를 찾아가지만 결국 만나지 못하는, 대학생이 된 ‘나’의 모습이며, 소설은 현재 진행되고 있는 은주와의 생활로 돌아오지 않는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시간상으로 역전된 서사 구조를 취하고 있는 한편, 현재의 이야기로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만약 현재의 이야기로 다시 돌아오면서 소설이 마무리되었다면, 이 소설은 현재의 화자를 통해 구성되는 액자식 소설이 되었을 것이고, 그렇다면 이야기의 주도권은 현재의 인물들에게 주어진다. 액자식 형식을 통해서는 현재의 화자가 과거의 이야기를 취사선택할 수 있게 되고 소설에서 현재의 이야기가 과거의 이야기보다 위계상 상위에 놓이게 된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는 서사의 주도권을 전적으로 과거의 화자가 잡고 있는 모습이다. 현재의 ‘나’는 과거의 기억을 보여주기 위해 존재할 뿐이며, 과거 연희에 대한 기억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소설의 역전적인 시간 구성은 과거의 ‘나’를 부각시키며, 과거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나’의 모습을 보여준다. 사실 이러한 종속성은 주인공 뿐 아니라 다른 인물들의 현실까지 암시한다. 현재 ‘나’와 은주, 성준네 부부 네 사람이 함께 시간을 보내는 모습은, 과거에 ‘나’, 성준, 연선, 연희 네 사람이 같이 어울리던 시절과 묘하게 닮아 있다. 고등학교 학창 시절, PC 통신 시절이라는 낭만적인 시대는 몇 년 채 지나지 않아 막을 내리고, ‘나’와 연희, 성준과 연선의 관계는 모두 끝을 맞이한다. 소위 ‘기적의 시대’라고 부를 수 있는 그 시절은 아련한 추억으로 각자의 마음에 남아있다. 그렇다면 현재 그들의 모습은 그 시절과 얼마나 다른가. 아이가 생기기 전 떠나온 부부 동반 여행의 즐거운 장면들 역시 얼마 지나지 않아 과거의 낭만적인 추억으로 남을 것이며, 업무와 육아, 부부 갈등 등 새로운 현실을 마주하게 될지도 모른다. 과거와 현재의 평행적인 4인 구도는, 어쩌면 현재 역시 낭만적이었던 과거의 연장선이며 미래의 위기를 앞두고 있는 풍전등화의 모습을 표현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짚고 넘어가고 싶은 나머지 하나는 소설에서 그려지고 있는 관계가 일상적으로 정의하기 힘든 모호한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는 점이다. 당시 연희에게는 남자친구가 있었고, 그렇게 때문에 그 시절 ‘나’와 연희는 표면적으로 친구의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래서 연인들이 할 만한 것으로 인식되는 데이트는 하지 않았고, 오직 산책이라는 방법만으로 함께 시간을 보냈다. 그렇지만 별 볼 일 없는 산책의 형식 속에서 그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많은 감정을 공유할 수 있었다. 현재의 ‘나’는 그간 모든 연애 경험을 은주에게 솔직히 털어놓았지만, 연희와의 추억은 솔직히 털어놓지 못한다. 그 점에서 ‘나’에게 있어 연희와의 관계는 그동안 맺었던 어느 애인관계보다도 더 각별한 기억으로 남아있다고 할 수 있다. 동일한 사건이, 과거의 나에게 있어서는 연인 이하의 관계로 남겨두어야 하는 것이었지만, 현재의 나에게는 어느 연인 관계보다도 각별한 것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현대인은 인간 혹은 사물 사이의 모든 관계를 명확하게 분류하고 정의하는 데 익숙하다. 학교와 직장의 각종 가이드라인들은 위계관계에 따라 지켜야 할 선을 명시하고 있다. 최근의 MBTI 열풍은 모든 인간을 열여섯 가지 유형 중 하나로 한정시키고 각 성격의 케미를 유쾌하게 풀어서 설명해준다. 이렇듯 명확하게 선언하며 분류해주면 불분명한 인식들을 해결해주며 정체모를 불안으로부터 우리를 구해준다. 이렇듯 한 가지 방식으로 모호한 관계를 명확하게 정의했을 때, 그 현상을 더욱 쉽게 이해할 수 있고 모호함에서 오는 불안은 사라져 버린다.

 

그러나 세상의 서로 다른 관계들 중에서 동일한 것은 없다. 각각의 관계에는 고유한 가치와 의미가 있다. 단정적인 기준들은 “같은 것은 같게, 다른 것은 다르게” 분류한다고 하지만, 실상은 그 내막의 사소한 차이를 무시하며 같은 것으로 치부해버리는 면이 있다. 언어는 세상에 존재하는 연속적인 사상의 스펙트럼을 임의로 절단시키고 구분짓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의 용어로 정의를 내리는 행위는 필연적으로 폭력적일 수밖에 없다.

 

소설 속 고등학생 ‘나’는 연희를 연인으로 대해선 안됐고, 친구 사이를 유지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연희를 배려하고 생각해주는 방식에 있어서는, 이미 친구 혹은 연인이라고 말할 수 없는 특별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던 것이다. 주인공에게 있어서 하나의 의미로 자리잡은 이상, 연인인지 친구인지는 전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소설을 읽은 후 남겨진 독자들은 자신을 스쳐갔던 수많은 관계들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반드시 남녀간의 사랑이 아니더라도, 사회가 제시한 인간관계의 유형들 중 본인이 경험한 독특한 지점들이 있을 것이다. 이미 특정한 방식으로 구조화된 지난 기억들을 되돌아 볼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정영수 작가 특유의 사랑 이야기는 사랑 이상의 진리를 말하고 있다고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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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승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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