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작가의 의도를 읽어보자 - 아트인문학: 틀 밖에서 생각하는 법 [도서]

수행평가로 현대미술 작품을 만들 당시, 나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글 입력 2021.09.28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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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다녔던 중학교의 미술 과목은 유독 수행평가가 재미있었다. 판화의 네 종류인 볼록판화, 오목판화, 평판화, 공판화는 물론이요, 서예, 도장 새기기, 수채와 유채, 조각, 소조 등 다양한 미술을 체험하게끔 짜여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아직도 기억에 남는 수행평가는 ‘현대미술’이다. 대지 미술, 설치 미술, 해프닝, 액션 페인팅, 비디오 아트, 퍼포먼스, 키네틱 아트, 초현실주의 중 하나를 골라 자유 주제로 작품을 만들고 발표하는 것이었다.


나는 반에서 유일하게 설치 미술을 골랐다. 작품을 구상하는 데에는 얼마 간의 시간이 소요되었지만, 설치하는 데는 10분밖에 걸리지 않았다(후술하겠지만 장소의 특성상 미리 설치하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쉬는 시간 종이 울리자마자 화장실로 뛰어갔다. 손에는 신문지 뭉치, 테이프, 바가지, 장난감, 칼이 들려 있었다. 바닥이 젖었는지 젖지 않았는지 확인할 여유도 없었다. 바로 화장실 바닥 전체를 신문지로 도배했다. 양변기가 있는 칸막이 안쪽도, 아예 화장실 타일이 보이지 않도록 신문지를 두툼하게 깔았다.


그리고 신문지에 바가지를 대고 사인펜으로 원을 대강 그린 다음, 칼로 원을 따라 잘랐다. 구멍이 난 곳에는 햄버거 세트를 사면 사은품으로 주는 태엽 장난감을 배치했다. 쉬는 시간에 여느 때와 같이 생리 현상을 해결하기 위해 화장실로 들어왔을 친구들은 질겁했다. “이거 밟아도 돼?” 과연 이 작품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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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10년도 넘은 일이다. 하필 고등학교를 성적 순으로 들어가는 비평준화 시스템 속의 중3이었던 나는, 어린 나이부터 입시 교육에 찌들어 뛰어놀 공간과 여유를 잃어야 하는 현실을 개탄했던 것 같다. 그래서 화장실을 놀이 공간으로 꾸몄다.


태엽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나이의 아이들은, 그 공간이 화장실인지도 인지하지 못한 채 화장실을 가득 메운 장난감 더미에 파묻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 것이다. 심지어 바닥에 깔린 신문지를 뜯어서 천장을 향해 던지며 휘날리기도 하리라. 하지만 손을 뻗어 바라본 위에는 햇빛이 아닌 천장이 있다. 햇빛은 까치발을 들어도 손이 닿지 않을 까마득한 높이에 달린 작은 창문을 통해서만 들어올 뿐이다. 쉴 새 없이 돌아가며 공간을 채우는 환풍기 소리는 덤이다.


누가 봐도 화장실인 이곳에서 온 정신을 장난감에 집중하며 신나게 노는 아이들을 보는 어른들의 마음은 어떨까? 이제 바깥에는 아이들의 공간이 없다. 결국 아이들은 오감(五感)이 모두 ‘잠시 머물기에만 적합한’ 화장실로 모인다. 어두침침한 조명, 귀와 코를 찌르는 소리와 냄새, 먹을 물도 없고, 비위생적인 곳으로, 어른들이 아이들을 내몰았다.


어떤가? 보는 사람이 씁쓸함을 느낄 만한 기막힌 발상 아닌가? 이 명작을 사진으로 남기지 못한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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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술한 나의 중학교 시절 미술 수행평가 일화처럼, 현대미술은 창작의 결과보다 과정을 더 중요시한다. 그러나 사람은 눈에 들어오는 것에 크게 의존하여 판단을 내려버리기에, ‘TV를 쌓아놓는 게 무슨 예술인가?’, ‘널찍한 캔버스에 선 한 줄 그은 것이 어떻게 몇억 원 가치의 작품인가?’와 같은 반응은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이미 만들어진 공산품을 가져다 놓고 자신의 이름을 사인한 마르셀 뒤샹의 ‘샘’. 사람들은 이 작품에서 무엇을 봤기에 신선한 충격을 느낌과 동시에 열렬한 환호를 보냈을까? 우리가 국어 수업을 통해 문학 작품을 감상하는 방법을 깨우치듯, ‘현대미술 사용설명서’가 절실하다.


‘아트인문학; 틀 밖에서 생각하는 법’은 현대 미술가들이 기성 미술의 권위와 고정 관념을 깨기 위해 어떠한 노력을 했는지를 흡인력 있는 스토리텔링을 통해 보여준다. 미술은 얼핏 관객이 보기에 이해가 가지 않는 방향으로 발전할 수밖에 없었다. 사진기가 발명되어 사물을 정확히 묘사하는 임무를 빼앗겨버린 화가들이 대안으로 인상주의를 창안했던 것처럼.

 

 

아무리 봐도 위험해 보이는 홈에 뛰어드는 이들도 있다. 포화 상태인 골목상권에 노후자금을 갈아 넣는 이들이 하나의 사례일 것이다. SKY 입학, 공시 합격, 자영업 성공. 이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바로 성공 확률이 5퍼센트 미만이라는 점이다. 축하의 레드카펫은 늘 95퍼센트의 좌절 위에서 펼쳐진다는 것. 이것이 우리 시대에 벌어지는 가장 가슴 아픈 비극 중 하나다.

 

 

어쨌든 그들도 미술로 ‘먹고 살아야’ 했기에, 현재의 유행을 읽고 거기에서 새로운 아이디어를 떠올려내야 했다. 남들과 같은 길을 가면 도태된다. 특히 현대로 오면 수천 년 동안 유지되었을 미술의 기본 개념마저도 해체된다.


20세기 초반에는 원근법이 만들어낸 ‘사실적인’ 입체성을 붕괴하고 작품을 다시 평면으로 돌려놓는 시도가 등장한다(입체주의, 절대주의). 또한 눈에 보이는 무언가를 그려야 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 무의식의 세계와 비합리적이고 감각을 초월한 세계를 구현하려고도 한다(표현주의, 추상, 초현실주의).


더불어 ‘미술가의 착상을 바탕으로 직접 작품을 제작하고 결과물을 관객에게 선보이는’ 미술의 근본적인 개념이 변한다. 관객에게 결과물을 보여줄 필요가 있는가? 미술가가 직접 작품을 제작할 필요가 있는가? 미술가의 착상, 그 자체가 상품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뒤샹의 ‘샘’은 미술가는 아이디어만 제공하고, 제작은 변기를 만드는 장인의 손에 맡겨버린 파격적인 작품이다. 뒤샹이 물꼬를 틀자, 세계 곳곳에서 다양한 형식 파괴가 등장한다. 아예 캔버스와 조소에서 탈출해 퍼포먼스로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했던 플럭서스 그룹, 작품의 제작이 아닌 실행만이 존재해야 한다는 해프닝 등 일시성을 지닌 행위가 예술의 범주로 편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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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과 관련해 21세기 미술이 어떻게 전개될지 정확히 예측하는 것은 어렵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정보화 시대에 맞춰 대단히 역동적으로 변화해가리라는 사실이다. 그 변화의 단초들은 이미 들어나 있다. 먼저 이미 우리에게 익숙한 인공지능의 영향을 생각해볼 수 있다. 인공지능이 작품 제작을 할 수 있는지 여부의 논란은 이미 의미가 없어졌다. 인공지능이 회화나 조형물을 만들어내는 것이 당연한 일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듯, 무작위한 조형 요소의 나열처럼 보이는 현대미술은 알고 보면 미술가의 장고(長考) 끝에 탄생한 것이다. 글 앞부분에서 내가 중학교 시절 만들었던 현대미술 작품을 설명했다. 물론 나는 미술을 전공하지도 않았고 당시에 오래 고민하지 않고 작품을 만들었기 때문에, 어투는 비행기 태우듯 했을지라도 그것이 작품으로서의 가치가 높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만큼 현대미술에서 ‘생각’의 차지하는 비중이 높아졌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현대미술의 경향을 빠짐없이 분석한 이 책에서 한 가지 추가해야 할 내용이 있다. 시간이 갈수록 사람들이 ‘개개인의 삶’을 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렇잖아도 수요자 중심의 미술 시장은 점점 더 개인의 요구에 발맞춰야 한다는 압박을 받고 있다. 작품을 보는 사람은 관객이다. 관객에게는 미술가의 의도보다 ‘내가 어떻게 받아들이는지’가 더 중요할 것이다.


그렇다면 인공지능이 그린 ‘의도가 없는’ 그림도 관객이 잘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훌륭한 작품으로 인정받을 수 있을까? 메시지를 발신하는 사람과 수신하는 사람 사이의, 줄다리기 같은 미묘한 의사소통. 과연 어떻게 이루어져야 가치가 있을까? 기술의 발전과 더불어 급격하게 변모하는 미술계에서 풀어야 할, 풀리지 않는 숙제가 앞에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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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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