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시 좋아하세요? - 우리가 별과 별 사이를 여행할 때 [도서]

추석 연휴, 가족 앞에서 말술을 마시고 펑펑 운 이유
글 입력 2021.09.28 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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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향기를 길게 호흡하며 선생이 물었다. “생을 밀고 가는 힘은 무엇인가.”

스무 살, 혹은 그 언저리인 학생들은 잠시 고개를 숙여 생각했다.

 

... (중략) ...

 

그날 오후 내내 선생은 술을 마셨다.

스무 살, 빛나는 청춘들이 이구동성으로 답변한 답을 혹 아시겠는지. 지혜도 사랑도 명예도 정의도 시도 아닌, 학생들의 대답은... 돈...이었다.

 

- 곽재구 시인이 어느 한 시에 달아놓은 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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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히 학생들의 ‘생각’을 물어봤지만, 답이 없는 문제였지만, 세 학생의 일관된 대답에, 선생은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돈이 조금이라도 부족하면 생을 밀고 가는 데에 위기를 느끼는 세태에서, 지혜와 사랑과 명예와 정의와 시는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가고, 영악과 배신과 권력과 편법 그리고 자극이 밀고 들어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시인이기도 한 어떤 국문과 교수님의 말을 빌리자면, “요즘 누가 시집을 삽니까?” 책 읽기에도 한 권이라도, 한 글자라도 더 읽어야 한다는 다소 이상한 경쟁심이 붙어버린 세태에서, 한 어절 한 어절 끊어 읽고 때로는 앞으로 돌아가서 다시 읽어내려야 하는 ‘느림의 미학’이 담긴 시집이 독자의 구미를 더는 당기지 못한다는 사실은 지당할지도 모른다.


그러면 시가 왜 필요할까? 이제 시는 한때 인류가 즐겼던 예술 양식의 하나로 남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야 할까? 시가 필요한 사람은 있는 걸까?


나도 시의 쓸모에 대해 이런 질문들을 던져본 적이 없다. 시에 문외한이었고, 관심 영역도 아니었으니까. 그러던 내게 시의 존재 이유를 체감하게 한 사건이 벌어졌다. 본가에서 보내는 추석 연휴 첫날, 술을 진탕 마시고 울어버린 것이다.

 

 

추억

김규동

 

아내의 결혼반지를 팔아

첫 시집을 낸 지

쉰 해 가깝도록

그 빛을 갚지 못했다

시집이 팔리는 대로

수금을 해서는

박인환이랑 수영이랑 함께 술을 마셔버렸다

거짓말쟁이에게도

때로 눈물은 있다

 

 

오랜만에 보는 가족과 정갈한 추석 음식, 값비싼 술이 주는 정겨운 분위기에 올라탄 탓인지, (거짓말 조금 보태서) 친구들하고 마실 때도 안 부리던 주정을 부렸다. 그것도 부모님 앞에서. 그 시작은 역시나 ‘빨리 자리를 잡지 못했다는 두려움’이었다.


그 뒤로 속사포처럼 일방적으로 입 밖으로 나온 이야기는 다음 날 목격자들이 기억을 되살려준 덕택에 드문드문 떠올랐다. 친구에게 무시당해서 서글펐던 일, 삶과 죽음은 습자지 한 장 차이일지도 모른다는 나름의 철학적 고찰, 가족과 얘기를 더 많이 했으면 좋겠다는 바람, 속 썩이는 과외생 등...


극심한 두통과 뒤집어진 위장, 바닥에서 손이 솟아나 걸음을 헝클어뜨리는 듯한 어지러움까지 더해 추석 음식을 도와드리지 못하고 누워있는 동안, 문득 얼마 전에 읽었던 책 ‘인간실격’이 떠올랐다.


읽을 때만 해도 그것이 남의 얘기인 양 아무 느낌이 없었는데, 내 모든 상황을 종합해보았을 때 나도 사회적으로 일찌감치 실격당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상실감이 밀려왔다. 그래도 수년 전에는 다른 사람보다 앞서는 게 없진 않았는데. 불과 몇 년 사이에 추월당한 기분이었다.


사람도 하나둘 떠나고, 그나마 만나는 사람도 하나같이 뭔가를 이루거나, 뭔가를 이루기 위한 추진력이 가득했다. 참... 요즘 입맛이 떨어지더라니. 생의 의욕이 없었던 모양이다. 민족 대명절을 기해 쌓아뒀던 감정이 대폭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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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연휴를 어영부영 보내고, 서울에 올라오는 동안 심심할까 봐 집 책꽂이에 오래 잠자고 있던 가장 얇은 책을 들고나왔다. ‘우리가 별과 별 사이를 여행할 때’라는, 시 ‘사평역에서’로 유명한 곽재구 시인이 엄선한 시 모음집이다. 그러고 보니 마지막으로 시를 읽은 게 언제였는지 까마득했다.


급행이지만 족히 두 시간은 걸리는, 시끄럽고 덜커덩거리는 전철 안에서 시집을 펼쳤다. 책머리의 곽재구 시인의 말마따나, ‘만 건너편 마을의 불빛만큼 따스하고 마을 주위에 머문 어둠만큼 푸르스름’한 시 몇 편이 특히 내 눈길을 잡아끌었다.

 

 

거룩한 식사

황지우

 

나이든 남자가 혼자 밥 먹을 때

울컥, 하고 올라오는 것이 있다

큰 덩치로 분식집 메뉴표를 가리고서

등 돌리고 라면발을 건져 올리고 있는 그에게,

양푼의 식은 밥을 놓고 동생과 눈흘기며 숟갈 싸움하던

그 어린 것이 올라와, 갑자기 목메게 한 것이다


몸에 한세상 떠넣어주는

먹는 일의 거룩함이여

이 세상 모든 찬밥에 붙은 더운 목숨이여

이 세상에서 혼자 밥 먹는 자들

풀어진 뒷머리를 보라

파고다 공원 뒤편 순댓집에서

국밥을 숟가락 가득 떠넣으시는 노인의, 쩍 벌린 입이

나는 어찌 이리 눈물겨운가.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축 늘어진 몸을 이끌고 집에 들어오게 되는 날이 있다. 무언가를 만드는 데 이바지하지 못했으니, 무언가를 먹는 것조차 죄스러워지는. 살아있는 사람이 산답시고 음식을 입으로 밀어 넣는 행위가 무의미하게 느껴지는.


그런 애상을 깊게 느끼고 있던 나는 이 시를 읽고 청승맞게 전철 한복판에서 눈물이 날 뻔했다. 혼자 먹는 밥이 ‘한세상 떠넣어주는’ 일이기에 ‘거룩하다’니...

 

 

책꽂이를 치우며

도종환

 

창 반쯤 가린 책꽂이를 치우니 방안이 환하다

눈앞을 막고 서 있는 지식들을 치우고 나니 마음이 환하다

어둔 길 헤쳐간다고 천만근 등불을 지고 가는 어리석음이여

창 하나 제대로 열어놓아도 하늘 전부 쏟아져 오는 것을

 

 

 

조급해서, 하루라도 빨리 자리를 잡고 싶어서 억지로 욱여넣었던 온갖 ‘경험’들. 하지만 발전을 위해서 ‘더할’ 생각만 했지, ‘빼려고’ 하지 않았다. 더하는 만큼 시간, 여유, 건강이 빠지는 제로섬으로 귀결되어 갔는데도 짐짓 모른 체했다. 방에 있는 모든 가구를 다 치우고, ‘창 하나 제대로 열어놓는’ 삶을 살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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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시화

 

내 앞에 빵이 하나 있다

잘 구워진 빵

적당한 불길을 받아

앞뒤로 골고루 익혀진 빵

그것이 어린 밀이었을 때부터

태양의 열기에 머리가 단단해지고

덜 여문 감정은

바람이 불어와 뒤채이게 만들었다

그리고 또 제분기가 그것의

아집을 낱낱이 깨뜨려 놓았다

나는 너무 한쪽에만 치우쳐 살았다

저 자신만 생각하느라고

제대로 익을 겨를이 없었다


내 앞에 빵이 하나 있다

속까지

잘 구워진 빵

 

 

내가 무엇을 위해 달려 나가고 있는가를 다시금 돌아보게 되었다. 빵 같은 사람이 되는 것이 인생의 목표다. 머리는 단단할지라도 속은 부드러운. 어디 하나 설익은 곳 없이 반죽이 고르게 부풀어 오른.


**


백 마디 위로와 조언의 말보다 한 줄의 시구가 마음에 더 큰 파란을 일으켰다. 시는 물론 책과도 점점 거리가 멀어지고 있는 우리에게, 누구보다도 시를 많이 읽었을 시인이 마련한 작품은 행간을 뛰어다니며 놀기에 충분한 놀이터였다. 시집 한 권이 차지하는 공간은 작지만, 활자에 담긴 따스함은 우주보다도 큰 것 같다. 시쳇말로 ‘가성비’. 이것이 시가 존재하는 이유가 아닐까, 스스로 결론을 내렸다.


군 시절 도시와는 다소 떨어진 부대에서 흐드러지듯 쏟아지는 별빛을 보며, 김용택 시인이 골라준 시를 매일 일기장에 옮겨 적었지. 그러면서 좀처럼 가속할 기미가 없던 더딘 시간의 흐름을 잊곤 했다. 시집을 덮었을 때는 처음 펼칠 때보다 한층 더 성숙했기를. 더 반짝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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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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