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악역을 연기하다 [문화 전반]

글 입력 2021.09.27 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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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에 공개된 웹드라마가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삶의 벼랑 끝에 놓인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극한의 게임에 도전하는 이야기라는데, 티저 영상만 봐도 많은 배우가 출연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게임에 참가한 초록색 트레이닝복을 입은 사람들은 개별 게임에서 승리하기 위해 서로 협력하고 때론 배신한다. 게임의 진행자들은 얼굴이 보이지 않는 가면을 쓰고 있다. 해당 역을 맡은 배우의 얼굴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이들은 선악을 스스로 구별하지 않고 게임 규칙에 따라 움직인다. 참가자가 규칙에서 어긋나는 행동을 한다면 윤리와 상관없이 정해진 일을 수행한다.


나는 지금 해당 드라마를 홍보하려는 것이 아니다. 보지 않은 드라마의 내용 스포를 하려는 것도 아니다. 단지 하나의 예를 통해 오늘의 이야기를 시작하려는 것이다. 작품에는 선한 역과 악한 역이 있다. 대체로 주인공들은 선한 역이다. 정의롭고 인간적이며 악에 맞서는 선택을 할 만큼 용감하다.

 

물론 악역이 주인공인 경우도 물론 있다. 영화 <조커>처럼 주인공이 악행을 저지르고 그를 따라 이야기가 흘러가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경우가 아니라면 직접 극악한 행동을 하는 악역은 대체로 주인공이 아니며, 아직 얼굴이 알려지지 않은 배우가 역할을 맡는 경우가 많다. 앞서 말한 <오징어 게임>도 마찬가지다.

 

같은 인물이라도 상황에 따라 다른 선택을 내리기도 하지만, 게임 참가자 중 상대적으로 인지도가 낮은 배우가 연기하는 역할이 주로 나쁜 행동을 맡아 하며 공동체에 혼란을 준다. 진행자는 참가자와 같은 '사람'임에도 그들이 규칙을 따르지 않으면 무도한 행동을 서슴없이 자행한다. 진행자들은 얼굴을 가리고 있기 때문에 해당 역할을 수행한 배우가 누구인지 시청자는 알 수 없다. 얼굴 없는 악역을 연기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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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드라마 <오징어 게임>

 

 

 

커리어의 시작이 되는 악역



드라마 <청춘기록>에서 박보검은 배우를 꿈꾸는 인물 '사혜준'을 연기한다. 오랜 무명 배우였던 '사혜준'은 영화에서 가난한 주인공을 괴롭히는 재벌 3세 악역을 맡아 연기하며 관객의 눈에 띄고, 탄탄히 다져진 연기력으로 성공적인 배우의 인생을 시작하게 된다. 드라마에만 있는 내용이 아니다. 실제로 현재 한국의 유명 배우 중에도 과거 악역 연기를 통해 대중들에게 각인되어 지금의 자리에 오른 사람이 많다. 해당하는 배우의 이름을 나열할 수는 없지만 아마 글을 읽으며 각자 떠오르는 이름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대표적으로 나에게 악역으로 깊은 인상을 남긴 배우는 바로 영화 <써니>에서 숨겨진 악역 '상미'를 연기한 배우 천우희다. 나는 그를 <써니>에서 처음 보았는데 잊힐 수 없이 강렬한 연기에 놀랐다. 영화를 보며 이것이 연기라는 것을 잠시 까먹을 만큼 현실적 공포를 관객들에게 주었다. 그는 포스터에도 등장하지 않는 악역을 연기했지만 나를 포함한 다수 관객의 눈에 뚜렷이 남았고, 이후 여러 작품에 출연하며 배우로서의 활동 영역을 넓혀 현재는 '악역'으로 한정 지을 수 없는 배우가 되었다.


강렬한 악역 연기를 통해 뚜렷한 인상을 남기는 것이 커리어의 좋은 시작이 되기도 하지만, 언제 그 이미지에서 벗어나는지는 배우마다 다르다. 가끔은 작품 속 훌륭한 연기로 다음 작품에서 더 비중 있는 악역을 맡기도 한다. 악한 역할이 모두 나쁜 역할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분명 '악역=나쁜 역'이라고 단순히 생각하기에는 각 캐릭터의 성격은 모두 상이하다) 한 배우에게 상대방을 괴롭히는 모습이 반복되어 나타나는 게 배우에게도 팬에게도 달가운 일은 아니다.

 

실제로 한 배우는 연달아 악역을 연기하고 또 자극적인 악역 제안이 왔을 때 '또 해야 하나' 고민했고, 악역 연기로 칭찬을 받으면 '내가 뭘 잘한 걸까' 회의가 든다고 인터뷰에서 밝힌 바 있다. 작품의 완성도를 위해 다양한 역할이 필요한 건 이해할 수 있는 사실이지만, 하나의 고정된 이미지는 일상 속에서도 피하고 싶은 일이다. 지속된 악역은 대중들이 역할과 배우를 분리해서 받아들이기 어렵게 만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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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강철중: 공공의 적 1-1>

 


그렇다면 왜 악역이 배우 경력의 시작이 되는 경우가 많을까 생각해 보았을 때 먼저 다수의 악역이 등장하는 영화들이 있기 때문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주인공이 험난한 과정을 통해 어떤 목표를 이루는 내용은 적어도 한국 영화/드라마에서 중요한 하나의 틀이라고 생각한다. 그 과정에는 주인공의 진로를 방해하는 세력들이 등장하는데 그들은 다수인 경우가 많다. 특히 폭력적인 성향이 강한 누아르 장르의 영화에서는 주인공과 액션신을 펼치는 많은 조연/단역이 등장한다.


물론 이미 두터운 인지도를 지닌 배우가 악역을 맡아 작품의 무게감을 주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악의 조직 우두머리처럼 비중이 큰 역할이 아니라면 인지도 있는 배우들이 악역을 맡는 경우는 자주 보이지 않는다. 앞서 말한 것처럼 악역이 곧 나쁜 역을 의미하지는 않지만, 작품 속 역할과 배우 본인이 하나가 되어 연기하는 배우들에게 악역은 촬영 후에 후유증을 안길 수 있는 어려운 선택이기 때문이다.

 

 


빌런(Villain) 없는 작품이 많아지길



사람마다 영화를 보는 스타일이 모두 다를 것이다. 나의 경우는 배우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특히 좋아하는 배우가 생기면 그가 꾸준히 활동하며 남긴 작품을 따라 최대한 모든 연기를 직접 보는 것을 선호한다. 이번 글을 처음 쓰게 된 계기는 좋아하는 배우의 필모그래피 속 악역이었다. 드물게 출연하는 예능이 아니면 그의 인간적인 성격을 알 수 없지만, 배우 본연이 지닌 말간 웃음으로 나에게 구축된 좋은 이미지와 상반되는 악한 연기를 보는 것이 마음을 어렵게 하고 더 나아가 속상한 감정을 느꼈기 때문이다.


특히 배우를 널리 알리게 된 대표 작품에서 그가 맡은 역할이 비겁했기 때문에, 다른 필모그래피를 찾아보는 수고를 하지 않는다면 그를 악역의 이미지로만 기억이 할 수도 있는 현실이 안타까웠다. 실제로 내 주변인들에게 물어봐도 그의 이름보다 배역 명을 알고 있는 경우가 많았고, 대다수 그를 무서운 사람 혹은 화나게 하는 역을 연기한 배우로 기억하고 있었다. 배우라는 직업이 '역할'로 대중을 만나기 때문에 실제 '배우'의 성격보다 어떤 역할을 맡았는지가 그 사람의 이미지를 만든다는 사실을 깨닫는 경험이었다.

 

 

멜로2.jpg
드라마 <멜로가 체질>

 

 

나의 바람은 강렬한 악역이 없는 작품들이 더 많아지는 것이다. 사실 법적으로 문제 있는 행동을 하지 않는 악역이라면 누구의 관점인가에 따라 나쁜 사람인지 아닌지 평가가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법적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더라도 주인공에게 곤란한 상황을 만든다면 누군가는 충분히 그를 악역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는지에 따라 다르게 볼 수 있는 선악의 경계가 모호한 역할은 우리의 일상에서도 자주 마주한다. 이들은 상황에 따라 미워 보이기는 해도 공포심이나 분노를 일으키지 않는다.


작품을 보다가 내가 붙잡고 '이러지 마!'라고 말할 수 있는 악역, 법이라는 굵은 선을 넘지 않는 그 정도의 악역만 나오는 작품이 많아졌으면 한다. 그곳에서는 더 많은 신예 배우들이 살벌한 후유증에 대한 걱정 없이 배역을 맡아 연기하며 자신을 알릴 수 있는 기회가 생길 수 있을 것이다.

 

극악무도한 악역의 부재가 작품의 완성도에 부족함을 만들지 않는다. 대표적인 예로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에게 회자되는 드라마 <'응답하라' 시리즈>와 <멜로가 체질>이 있다. 상황에 따라 '으이구' 소리가 나오며 미운 역할이 등장하기도 하지만 모두 '인간'의 범위에서 저지르는 악행들이다.


*


과거 내 블로그 이름을 'Play the Villain'으로 설정한 적이 있다. 사춘기 시절 누군가 악역을 맡아야 한다면 내가 맡겠다는 생각이 있었던 것 같다. 재차 말하지만 모든 악역이 무조건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영화 <말레피센트> 뮤지컬 <위키드>의 주인공이 원작에서는 악역이었지만 중심인물이 바뀌면서 캐릭터의 다른 이야기를 들을 수 있듯,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선악이 바뀌는 경우가 있다고 생각한다.

 

단, 법의 테두리 안에서 행동했을 때이다. 기본적으로 생명은 소중히 여겨야 하고, 갈등 상황에서 발생하는 힘의 대결로 누군가 악역이 되게 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어쩌면 아직 내가 원작의 내용을 잊어버렸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세 악역이 원작에서 어떤 일을 저질렀었는지 다시 공부해야 할 필요가 생겼다.)


서로가 서로를 물리적, 정신적으로 해하는 옳지 않은 일이 현실 속에서 발생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우리는 개인의 분노를 여과 없이 표출하고 나아가 다른 이에게 악영향을 주는 게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지만, 어쩌면 익숙해져 가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런 현실이 반영되어 미디어 콘텐츠가 만들어지고 그곳에서 악당의 역할을 맡는 배우가 생긴다는 건 통탄할 일이다.

 

이렇게 현실이 미디어에 영향을 주듯 사람들에게 공유되는 내용이 사회에 주는 영향력도 무시할 수 없다. 코로나 상황으로 인해 거리 두기를 하고 개인의 행동과 선택에 더 집중하며 사회가 삭막해지더라도, '함께'하는 것의 소중함을 잊지 않는 세상이 되는 데에 악역 없는 영상물이 효과가 있으리라 생각한다. 지난여름 TV 앞에서 올림픽 중계를 함께 보며 '우리'를 생각했던 것처럼, 작품 속 인물들이 폭력 없이 같이 어울려 시간을 보내는 것을 보며 사람에 대한 사랑을 키울 수 있는 상황이 만들어지길 바란다.

 

배우는 악역이 아니어도 충분히 매력적이고, 좋은 작품은 악역이 없어도 탄생할 수 있다.

 

 

[정서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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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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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혜준
    • 사해준이 아니고 사'혜'준 입니다! 헷갈려하시는 분들이 많더라고요. 좋은 기사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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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트인사이트
    • 사혜준세심히 살펴 주심에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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