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뱅크시의 비판적 유전자를 찾아서 [미술]

미술계에 대항한 미술가들
글 입력 2021.09.24 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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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8월부터 내년 2월까지 열리는 <아트 오브 뱅크시> 전시는 개막부터 논란에 휩싸였다. 전시작 대부분이 원작이 아닌 복제품이었는데 원작자인 뱅크시의 동의 없이 진행된 전시였기 때문이다.

 

한국 뿐 아니라 현재 세계 곳곳에서 열리고 있는 ‘뱅크시 전시’들은 모두 ‘가짜(FAKE)’라며 자신과 아무 상관 없다고 뱅크시 본인이 직접 밝힌 상황에서도 작가가 익명으로 활동하고 있어 허락을 받을 수 없다는 이유로 그의 이름을 내건 전시들이 줄을 이었다.

 

줄곧 상업 예술에 반대해온 작가의 작품으로, 아니 그 작품의 복제품으로 전시장을 채우고 작가와 관계 없는 전시기획사가 배를 채우는 데에 찝찝함을 느끼게 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Banksy, Girl with Balloon, Forbes.png

뱅크시, ‘풍선과 소녀’라는 제목의 이 작품은 파쇄된 이후 ‘사랑은 쓰레기통에’라는 제목으로 바뀌었다. © 포브스

 

 

뱅크시에 대한 또다른 최근 이슈는 2018년 경매에 나왔던 ‘사랑은 쓰레기통에’ 작품이 다음달 14일에 소더비 경매에 다시 출품된다는 것. ‘풍선과 소녀’로도 알려졌던 이 작품은 경매에서 낙찰과 동시에 파쇄돼 많은 이들이 경악을 금치 못했고 미술사에 길이 남을 에피소드를 탄생시켰다. 다가오는 경매에서 이 작품은 3년전 낙찰가인 15억원의 5배가 넘는 약 64억~96억원에 팔릴 것으로 추정되어 또한번 충격을 안겼다.

 

뱅크시의 파쇄 작업은 사전에 계획된 것이었는데 그는 이 작품이 경매에 나올 것을 대비해 파쇄 장치를 미리 설치해 두었다. 예술 작품을 사고 파는 행위를 비판하고 그런 사람들을 조롱하는 작업이었다. '현대 미술계의 이단아'로 불리고 있는 뱅크시는 그렇게 자본주의와 미술시장을 비판하며 예술계에 폭탄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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뱅크시와 같이 미술계 자체를 비판하는 작업은 이전부터 계속돼왔다. '현대 미술계의 이단아' 하면 떠오르는 인물 마르셀 뒤샹을 시작으로 1960~70년대 유럽과 미국에서 시작된 개념미술이 시초가 되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번 글에서는 뱅크시 이전, 미술계에 대항한 인물들을 소개한다.

 

 

 

미술관의 권위를 무너뜨리다

- 마르셀 브로타에스(Marcel Broodthaers, 1924-1976, 벨기에 태생)


 

마르셀 브로타에스는 가짜 미술관을 만들어 진짜 미술관을 비판했다. 브로타에스는 1968년부터 가짜 미술관 시리즈를 열었는데 그 중 1972년 <현대미술관, 독수리부, 형상 섹션> 전시가 하이라이트였다. 이 전시에서 그는 스스로 미술관 관장이 되어 가짜 전시를 기획했고 전시 제목이 말해주듯 ‘독수리’라는 주제 하에 작품들을 모아 전시했다.


여기서 브로타에스는 게르하르트 리히터나 르네 마그리트처럼 ‘아티스트’의 작품 뿐 아니라 독수리 형상이 들어간 장식이나 일상 사물 등 온갖 것들을 가지고 와서, 예술작품이라 불리는 것들과 별 볼일 없는 물건들을 뒤섞어 전시했다. 또한 작품들은 시대나 지역과 같은 기준에 의해 분류된 것이 아니라 단순히 한정된 공간에 모든 것들을 다 보여주기 위해 배치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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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셀 브로타에스의 1972년 <현대미술관, 독수리부, 형상 섹션>에 전시된 와인병과 코르크 마개. 그리고 “이것은 미술이 아니다”라고 쓰인 표지.


 

브로타에스는 이 ‘가짜 미술관’ 작업을 통해 현대미술관이 ‘있어보이는’ 방식으로 작품을 모으고 분류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독수리와 현대미술관의 관계, 수집한 물건들 사이의 관계처럼 별 의미가 없음을 꼬집는다.


전시된 작품 앞에는 ‘이건 작품이 아니다’라는 문장이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로 적혀있는 캡션이 놓였다. 이는 미술관에 전시된 것들은 모두 예술 작품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의 관념을 깨는 시도였다. 마치 마르셀 뒤샹이 “모든 것은 예술 작품이다”라고 선언하였듯 브로타에스는 “이건 예술작품이 아니다”라고 선언했다. 정반대의 말처럼 들리지만 결국 “무엇이 예술인가?” 혹은 "무엇이 예술을 만드는가?"라는 동일한 질문을 던졌던 것이다.


 

 

미술관도 평범한 공간일 뿐

- 한스 하케(Hans Haacke, 1936년생, 독일 태생)


 

Hans Haacke, Condensation cube.png

한스 하케, 응결 큐브(Condensation Cube), 1963-65

 

 

어느 날 미술관에 물이 채워진 투명한 유리 박스가 전시됐다. 미술관과 박스 내부의 온도차로 인해 물은 증발하고 다시 응결되어 투명한 박스의 벽을 타고 물방울이 흘러내렸다. 작품인듯 작품같지 않은 이 박스는 바로 한스 하케의 ‘응결 큐브(Condensation Cube)’다.


한스 하케는 미술관이 마치 성전처럼 신성한 공간, 현실과 동떨어진 공간으로 여겨지는 현상을 보고 관객들에게 미술관도 현실의 공간임을 알려주는 미니멀한 작품을 내놓는다. 이 투명하고 깔끔한 투명 박스는 '화이트 큐브'라 불리는 무색무취의 현대미술관 자체를 상징하는 것 같다.

 

미술관에 관객이 오고감에 따라 미술관 온도와 습도가 달라지고 그로 인해 물방울이 맺히는 이 작품을 통해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비현실적인 장소로 보이는 미술관도 온도와 습도에 예민한 현실 공간임을 보여주었다. 투명한 박스 하나로 미술관의 물리적 실체를 드러낸 셈이다.

 

 

 

작지만 큰 미술관의 안과 밖의 차이

- 다니엘 뷔랑(Daniel Buren, 1938년생, 프랑스 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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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 뷔랑, Within and Beyond the Frame, 1973


 

다니엘 뷔랑은 1973년 ‘Within and Beyond the Frame’이라는 제목의 작품을 선보였다.

 

그는 본인의 트레이드마크인 줄무늬 패턴이 양쪽으로 프린트된 깃발들을 뉴욕 존 웨버 갤러리(John Weber Gallery)와 뉴욕 웨스트 브로드웨이 스트리트에 죽 걸었다. 9개의 깃발은 갤러리 안에, 9개의 깃발은 갤러리 밖 뉴욕 거리에 걸렸고, 한 개의 깃발은 갤러리 안과 밖의 정 중앙에 걸쳐졌다.


뷔랑은 크기와 모양 모두 같지만 한 쪽은 미술관, 한 쪽은 뉴욕 시내라는 두가지 맥락에서 작품이 어떻게 다르게 읽히는지 실험했다. 뷔랑의 이러한 작업은 미술에 대한 여러 질문을 던진다: 갤러리 안에 전시된 것들은 모두 예술인가? 예술작품이 전시장 밖에 전시되면 예술이 아닌가? 미술을 만들어내는 건 결국 미술관인가? 답은 관객의 몫으로 돌리며 미술과 미술관의 관계에 대해 숙고하게 한다.


 

 

살 수 없고 팔 수 없는 개념미술

- 조셉 코수스(Joseph Kosuth, 1945년생, 미국 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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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셉 코수스, 하나이면서 셋인 의자, 1965


 

조셉 코수스는 개념미술의 선구자로 그의 작품 <하나이면서 셋인 의자>로 잘 알려져 있다. 이 작품은 실제 의자, 의자를 찍은 사진, 의자의 사전적 정의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는 ‘의자’라는 개념을 담고 있는 세 가지 다른 방식을 보여줌으로써 형태보다 개념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 작품을 포함해 1960~70년대 개념미술이 이전 미술과 다른 점은 작품의 판매와 구매가 불가능하다는 것. 상품화되어가는 예술 작품을 거부하고 '개념'을 내세움으로써 아예 사고 팔 수 없는 작품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러나 이후 컬렉터와 미술관이 개념미술도 사들이기 시작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개념’을 진품으로 보증해주는 보증서가 작품 값에 팔리게 된다.

 

하지만 초기 개념미술가들이 상업적으로 변모하는 미술계에 반기를 들고 완전히 새로운 미술을 가지고 나왔다는 것은 지금 생각해도 대단하다. 우리에게는 특별하게 느껴지지 않을지 모르지만 뱅크시의 예술 활동이 공격적이라 느껴지는 것처럼 과거의 개념미술도 미술의 판도를 바꿀만큼 획기적인 시도로 여겨졌으리라.

 

 

 

과연 의미있는 작업인가?


 

1960~70년대 미국과 유럽 작가들의 작업을 꺼내본 이유는 지금의 서양미술은 물론 한국 미술도 비슷한 흐름을 이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언급된 작업들은 어떤 면에서 실패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들의 숱한 시도에도 불구하고 미술작품은 여전히 터무니 없는 가격에 팔려나가고 어떤 형태로 존재하든 돈으로 환산 가능한 세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의 시도가 있었기에 지금의 미술이 존재할 수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들의 이야기는 현재와 크게 다르지 않다. 또한 미술이 이보다 더 가치있게(금전적 가치) 여겨진 적이 없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이보다 더 투자의 대상으로 전락한 적도 없었다.

 

자본주의에 편입되지 않기 위한 뱅크시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은 곧 60억원이 넘는 가격에 팔려나갈 것이고 또다시 많은 논란을 일으킬 것이다. 그러나 미술가들의 현 미술계를 향한 끊임없는 반항은 새로운 대안을 만들어내고, 이 대안이 실패하더라도 혹은 실패함으로써 새로운 미술이 재탄생할 것이다. 뱅크시의 비판적 유전자는 그렇게 또 다음 세대로 전달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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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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