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변함있는 K로부터

글 입력 2021.09.21 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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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에게.


저는 원체 시혜적인 태도를 고치지 못하는 오만방자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다른 이들의 기분을 불쾌하게 만들지는 않을까 하는 겁이 많습니다. 이번에도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에 대해 글을 쓰면서 여러 번 선생의 태도가 되어버리는 것 같아 쉽사리 진도가 나가지 않았습니다. 한참을 고민하다가 결국 당신에게 편지를 써보려 합니다.

 

이 글은 무엇이 옳다 그르다 맞다 아니다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닌, 그저 이 세상 수많은 사람 중 하나인 김혜빈이 그저 자기 생각을 담은 진솔한 편지입니다.

 

*

 

고등학교 2학년 때의 일입니다. 어떠한 이유였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나이 차이가 큰 사촌으로부터 꾸중을 듣고 있던 때였습니다. 큰 거실에서 마주 보고 앉아 일방적인 설교를 듣던 중, 사촌이 저에게 물었습니다.

 

“너는 네가 1년 전과 다르다고 할 수 있어? 5년 전과는? 나는 아니야. 성장한 것으로 보이지만, 생각보다 세상은 빠르게 흘러가고 나는 과거랑 여전해. 어른스러워지지 못했어. 다른 어른들도 마찬가지야. 어른인 척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게 크게 다르지 않다고.”

 

그 이야기를 들었던 저의 감정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등줄기에서부터 감정이 타고 올라와 저의 몸을 빳빳하게 굳혔으니까요. 그 감정은 다름 아닌 당혹스러움이었습니다. 어째서 자신의 치부를 이토록 당당히 드러내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 당시의 저는 반성하지 않고 성장하지 않는 삶은 건강한 삶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누구에게나 삶은 거칠고 고단하겠지요. 저 또한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저 자신의 결정이 아닌 타인의 결정 속에서 이리저리 흔들리는 갈대 같은 삶을 살아왔습니다. 인내의 열매는 달다는 흔한 문구들을 떠올리며 버텼지만 어째 저의 아픔은 유독 길게 느껴졌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아픔은 중첩되었고, 내디딘 발바닥에 닿는 지면마다 거친 표면의 돌부리들이 널브러진 것처럼 따가웠습니다.

 

아픔은 다른 이들을 향한 저울질을 만들어 냈고 저의 시선은 다른 사람들을 향하게 되었습니다.


학교, 학원, 눈길이 닿는 곳마다 수많은 사람이 존재했습니다. 그들이 딛고 서 있는 지표면은 물을 머금은 흙더미 같았습니다. 서늘하고 포근하겠지요. 발가락 사이사이 그 습기 많은 흙이 피부를 간지럽히고, 그럴 때마다 기분 좋게 소리 내며 웃는 하루들을 보내겠지요. 토양의 생명력이 뼈를 타고 올라와 육체 속을 흐르고, 태양의 빛을 마음껏 머금겠지요.

 

그 당시 제가 바라보던 세상은 그랬습니다.

 

하지만 제가 서 있는 곳에서의 저는 까칠한 아스팔트 위에서 태양이 칼날이 되고, 기어코 생채기 나버린 것만 같았습니다. 피딱지 앉은 저의 발이 유독 모나 보였습니다. 저의 것이 아닌 모든 것이 반짝이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상처 안이 곪아 진물이 나는 것을 유심히 바라보다 서글퍼질 때가 많았습니다.

 

덕분에 어릴 적부터 사람이란 무엇인지, 사람이란 어째서 살아가는지 등등 원초적인 질문에 대해 고민해왔습니다. 삶을 지탱할 이유가 필요했고, 함께 이야기를 나눌만한 어른이 없었기에 소설이나 만화 등등을 찾아 헤맸습니다. 그리고 저의 가치관을 확립해주는 대중문화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수많은 이야기의 수많은 등장인물과 주인공을 보고, 그들의 이야기 속에서 스스로에 대한 답을 찾아 내려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토록 많은 것들을 보고 읽어내린 결과 제가 내린 결론은 다름 아닌 “나는 주인공이다”였습니다. 특히 만화를 좋아하니까 만화책의 주인공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슨 꿈 같은 엉뚱한 소리냐고 생각하실까요? 어린아이 같은 생각이라고 여기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실제로 그 생각을 할 때는 한창 사춘기이던 시절이었으니까요. 하지만 그저 한 때의 구름 같은 가벼운 생각이라고 하기에는 성인이 된 지 수 해가 지난 지금도 저는 아직 그 결론을 믿고 살아갑니다.

 

영화나 만화에서 주인공의 고난은 필수적입니다. 고난의 크기가 클수록 주인공은 고통스러워했습니다. 괴로워하고, 힘들어합니다. 그들의 꽉 쥔 주먹에 손바닥이 손톱에 찔려 피가 날 것만 같습니다. 하지만 이윽고 주인공은 더욱더 단단하게 성장하죠. 그리고는 마치 눈 속에서 꽃망울을 피워내는 다홍빛 매화처럼 해피 엔딩을 맞이합니다.

 

아, 그럼 지금 내가 아픈 이유는 주인공이기 때문이구나. 분명 나는 큰 사람이 되어 이때를 떠올리며 웃겠구나. 학교 수업에 집중하지 못하고 비 내리는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던 소년은 문득 잔잔한 빗소리를 들으며 자신의 삶을 납득했습니다. 그런 흐름입니다.

 

그때부터 저는 진짜 주인공이 되기 위해 노력하게 되었습니다. 우연이 주인공을 만들어내는 경우는 없었습니다. 제가 봐왔던 주인공은 지쳐 쓰러지고, 그래도 다시 일어서고, 앞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런 소년만화의 주인공들을 따라가려 노력했습니다.

 

드래곤을 만난 용사가 검 실력이 부족해서 순식간에 죽어버린다면 그것은 만화가 아닌 보통 주인공이 되고자 했던 사람의 이야기 중 하나겠지요. 하지만 실패했던 용사가 두 번째에 성공한다면 ‘실패를 딛고 성장한 주인공’이 있는 만화가 될 것입니다.

 

저는 드래곤을 무찌르고 공주를 구하는 용사가 되고 싶습니다. 그러려면 과거보다 오늘의 내가 더욱 발전되어 있어야만 합니다. 실패하면 더 노력하면 됩니다. 아흔아홉 번 실패해도 ‘드디어 백번째에 성공한 주인공’이 되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스스로가 변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더욱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끊임없이 성장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세상에 불변하는 것은 많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좋았던 기억은 퇴색되기 마련이고 싫었던 기억은 풍화되기 마련입니다. 혹은 극대화되거나 과장되겠지요. 그리고 그 기억을 바라보는 시선은 점차 달라질 것입니다. 물건은 점차 색이 바래자고 노란빛이 물들겠지요. 설레었던 감정은 익숙함으로 변합니다. 점점 접하게 되는 음식의 맛은 다양해질 것이며 길을 걷다 처음 보는 꽃집에서 마주치는 꽃의 종류 또한 다채로워질 테지만, 어느새 그것들이 또 익숙해지는 하루를 보낼 것입니다.

 

저는 어제는 7시 20분에 일어났지만, 오늘은 8시 50분에서야 눈을 떴습니다. 방금까지 당신은 ‘당신은’이라는 단어를 읽고 있었지만, 이제는 ‘이제는’이라는 단어를 읽고 있습니다. 시간이 흐르는 곳에 영원한 것은 그리 많지 않고, 매 순간 모든 것은 변하고 있습니다. 마치 어제는 나비가 되기까지 사흘 남았던 번데기가 오늘에 들어서며 이틀이 된 것처럼. 당연한 흐름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를 둘러싸고 있는 세상은 항상 어제와는 다른 오늘로 변해 있습니다. 그 변화의 흐름에서 저 또한 변하겠지요. 그것이 퇴행이 될지 성장이 될지는 저에게 달렸을 것입니다. 저는 변화를 인지하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옳은 사람’이 되는 길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니, 사촌의 이야기가 얼마나 당혹스러웠는지 이해하실 수 있겠지요. 어제보다 나은 오늘의 내가 낫다고 고개 끄덕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을 삶의 목표로 삼고 있는 저에게 성장하지 않았다는 것을 당연하다는 듯이 이야기하는 것은 지금까지의 치열히 살기 위해 노력했던 저의 나날들을 너무도 쉽게 부정하는 것만 같았습니다. 사촌의 이야기는 그로부터 수년이 지난 지금도 공감하기 어렵습니다.

 

*

 

이리 적고 보니 마치 불변을 부정하는 것만 같아 마음이 좋지 않습니다. 하지만 저는 제가 불변하는 존재하는 사실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동경하는 대상을 따라가기 위해 노력해온 과거가 있으신가요? 저는 있습니다. 그 누구보다 제가 목표로 했던 소년만화 주인공 같은 반 학우였습니다. 서늘했던 교실 안도 그 애가 있으면 온기를 풀어내고 공기가 몽실거리는 것만 같았습니다. 삼삼 오오로 모인 교실에서 늘 중심에 서 있던 친구였죠. 공부도, 대인관계도 열심히 했던 그 친구에게 저는 순식간에 매료되었습니다. 춤도 잘 추고 노래도 잘 부르는 친구였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저는 멋대로 그 아이를 따라잡는 것을 목표로 삼고 공부했습니다. 지칠 때이면 그 애를 떠올렸죠. 그때가 아마 제가 가장 열심히 공부했던 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당연히 저는 저였습니다. 웹툰 <치즈인더트랩>의 손민수가 홍설이 되지 못했던 것처럼. 손민수가 온몸을 홍설처럼 치장하고 말투까지 변화시킨다고 정말 홍설이 되지는 않는 것처럼. 저는 저일 뿐입니다. 제가 공부를 열심히 해서 그 애를 따라잡았다고 제가 그 애가 될 수는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 애처럼 살고 싶다고, 그 애와 같은 성격이 되고 싶다고 그 애가 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애처럼 그 애의 색으로 반짝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죠.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는 너무도 공허하고 허망했습니다.


고등학교 졸업을 앞둔 어느 날, 중학생 동창을 우연히 만났습니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연락처를 교환했습니다. 순식간에 약속까지 잡았죠. 제 기억상으로는 제가 그 친구와 친밀히 이야기를 나누었던 적은 다섯 손가락에 꼽히지 않았습니다. 같은 동아리 안에서 친구와 친구가 얽혀 마주치던 관계였으니까요.

 

하지만 약속 장소로 나가 오랜만에 대화를 나누게 된 그 친구는 무언가를 용기 낸 듯한 표정으로 저에게 말을 꺼냈습니다.

 

“나, 지금까지 네가 되고 싶었어. 그래서 나한테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네 생각을 했어. 너였으면 어떻게 행동했을까, 너였으면 이 상황에서 어떻게 이야기했을까 하고. 너는 강한 사람이었으니까. 너를 마지막으로 만난 지 3년이나 지났는데, 그 3년 동안 난 너를 따라잡기 위해 노력하며 살았어. 오랜만에 만난 너는 그때 내가 동경했던 그 모습 그대로 여전하구나.”


한 인디 게임에서 인상 깊게 읽었던 문구가 떠오릅니다.

그 모든 일이 있었음에도, 여전히 당신이다.


과거는 변하지 않습니다. 저의 존재도 변하지 않습니다. 성장할 수는 있어도, 변하고자 노력해 정말 변했어도, 그렇게 어제보다 나은 사람이 되어도 김혜빈이 김혜빈인 것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 친구는 저의 변하지 않는 ‘김혜빈’이라는 모습을 본 것이겠지요.

 

과거 동경했던 아이와 비슷해지기 위해 노력했던 저도, 반대의 상황에 놓였던 저도, 성장하기 위해 노력하는 저도 결국에는 김혜빈입니다. 저는 제가 김혜빈이라는 사실이 싫지 않습니다. 어차피 다 같은 김혜빈이라면 변화하는 김혜빈이 되고 싶을 뿐입니다.

 

*

 

이 편지를 쓰고 있는 요즘은 비가 계속 오고 있습니다. 어제는 처음 개봉했던 보조배터리가 빗물을 맞아 고장 날까 봐 전전긍긍했는데 오늘은 종일 집에 틀어박혀 당신에게 편지를 쓰고 있네요. 당신에게 편지 쓰는 일에 집중했던 탓인지 오늘 빗소리가 들렸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일단 지금은 가끔 걸음 소리가 들리는 것 빼고는 고요합니다.

 

편지를 다 쓰고 나니 뿌듯하네요. 이 글을 쓰기 전보다, 저 스스로가 더욱더 자신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된 듯한 느낌입니다. 미래의 저는 여전히 이런 뿌듯함 속에서 자신을 잃지 않으며 나날이 변화했으면 합니다.

 

그리고 당신은 당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오늘과는 다른 내일을 마주하길 소망합니다.

 

 

김혜빈 드림.

 

 

[김혜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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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2
  •  
  • 푸른하늘
    • 저도 항상 변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스스로에게 얘기합니다.
      어제보다 나은 오늘이 되었으면 좋겠고, 오늘보다 나은 내일이 되길 원합니다.
      그런데 가끔씩은 그게 맘처럼 잘 안되는 경우도 많더라고요.
      변하지 않으려 하는, 멈춰있으려는 내 모습이 용납되지 않고 증오스러운 경우도 많았고요.
      아직은 많이 멀었다는 생각을 합니다.
      나아지고 싶지만 나아지지 못하니 아직 어리다는 생각도 하고요.
      나이만 찼지, 그 외는 성장하지 않았다는 생각도 많이 듭니다..
      장담할 순 없지만, 사촌분께서도 저와 비슷한 자괴감을 느끼고 계시진 않았을까, 하고 추측해봅니다.
      자신을 용납할 수 없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한 것은 아닐까, 하고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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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umydarling
    • 푸른하늘댓글 감사합니다 :) 하지만 사촌의 성격과 뉘앙스, 당시 상황 등등 사적인 부분들을 고려해 보면 아무리 생각해봐도 말씀해주신 느낌은 아닌 것 같습니다 ㅎㅎ 그래도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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