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나의 자랑 하연

사랑하는 친구를 소개합니다
글 입력 2021.09.16 1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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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바람 하연



물 하에 뻗칠 연이에요!


고등학교 1학년, 하연이를 처음 만났다. 연은 매번 자기소개를 할 때마다 이 말을 문장의 첫머리에 두곤 했다. 이름대로 하연이는 나도 모르는 사이 물처럼 천천히 스며들어왔고, 그 호기롭게 외치던 자기소개처럼 당당한 에너지는 나에게까지 뻗쳐왔다.


그 이후로 주욱, 계속 함께였다. 어느새 우리는 오랜 시간에 걸친 수많은 흑역사들을 공유한 이십대 중반이 되었다.

 

연을 볼 때마다 떠오르는 인물이 하나 있다. 바로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의 이익준 선생이다. 병원을 한번 돌 때마다 아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인사를 하느라 한참이 걸리고, 어마어마한 친화력으로 카페 아르바이트생과도 시시껄렁한 농담을 주고받으며 킬킬대는 모습이 참 닮았다. 유머러스하고 다재다능한 면모와 밴드부 보컬인 것, 종종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일을 꾸미는 모습도 어쩐지 비슷하다.


그러나 연을 떠올렸던 순간은 그런 때가 아니었다. 시종일관 가벼운 태도로 일관하다가, 부모님이 편찮으시다는 소식을 듣고 절망에 빠져있는 친구를 묵묵히 차로 데려다주며, 조용히 곁을 지켜주는 따뜻한 모습. 그런 장면에서 나는 하연이가 생각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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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누군가에게 연을 소개할 때 늘 바람에 비유했다. 어디서든 눈에 띄는 위풍당당한 걸음걸이는 시원하고 쿨한 향기마저 이끌고 온다. 바람처럼.


바람, 즉 공기의 흐름. 연이 등장하면 공기의 흐름이 바뀐다. 갑자기 한바탕 바람이 분 것처럼 공간이 떠들썩해진다. 사람뿐만 아니라 공간을 깨우는 것 같다. 걔가 이야기할 때는 냉장고도 위잉 돌아가는 소리를 멈추고 숨을 죽이며 그에게 집중하고, 우리 집 달루도 그 아이만 보면서 꼬리를 흔든다.


물론 그 바람은 사람에게 보이는 힘이 가장 크다. 나그네의 옷을 벗기는 것은 바람이 아니라 햇빛이라고들 하지만 그것은 연을 알지 못해서 하는 말일 것이다. 모두를 주목하게 하고 자기 한 몸 희생해서 실컷 웃기게 하거나 그 공기를 자신만의 분위기로 가득 채운다. 그럴 때 하연이는 산들 바람이다. 선선하고 기분 좋게 부는 그런 바람. 너무 깊이 침투하지 않으면서 딱 사람을 기분 좋게 배려하는 그런 바람.


그런 하연이도 어느 때는 돌풍이 되기도 한다. 자신의 의견을 당당히 피력해야 할 때, 자신의 것을 지켜야 할 때,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열정적이고 힘찬 바람이다. 그 돌풍은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 누구든 설득하고 동의하여 휩쓸리게 하는 토네이도 같은 형태의 바람이다. 그 바람에 휩쓸린 나도 이제 나를 지켜야할 때는 기꺼이 거센 바람일 수 있게 되었다. 그걸 알려준 연에게 고마울 때가 참 많다.


때때로 그 바람은 멈춰 있는데, 그때는 공기로 존재한다. 공기처럼 옆에 있어준다. 감히 내가 너의 마음을 어떻게 헤아려. 가만히 곁에 있어주는 것 밖에 할 수 없지 하고.


뻗칠 연. 하연이의 뻗어나감. 하연이가 움직이는 공기의 흐름은 무한해서 이들 중의 한가지 형태로 정의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래도 그 바람이 변화하는 형태를 평생 바라보는 게 내 작은 바람이다.

 

 

 

나의 소울시스터 하연



 

“미즈마루 씨는 내 속에 잠재한 ‘세상에 도움은 전혀 안 되지만 이따금 저쪽에서 멋대로 불어오는, 그다지 지적이라고 하기 어려운 종류의 별난 무언가’를 긍정적으로, 컬러풀하게 이해해주는 몇 안 되는 사람입니다. 나한테는 소울브라더 같은 사람입니다”


무라카미 하루키, <마음을 다해 대충 그린 그림> 중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집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은 바로 삽화를 그리는 안자이 미즈마루이다. 일상의 소박한 낭만이 담긴 하루키 에세이의 삽화는 대부분 미즈마루가 그렸는데, 재미는 있지만 조금 거칠고 솔직한 하루키의 문체를 다가가기 쉬운 느낌의 미즈마루의 그림이 보완해주는 느낌이다.


좋아하는 소설가에게 나를 대입시킬 생각은 없지만, 우정에 관한 이야기 중 나는 위에서 하루키가 말한 ‘소울브라더’ 이야기를 아주 좋아했다. 누구나 흠뻑 빠져있는 별난 무언가가 있겠지만, 나도 항상 그 무언가가 매우 비생산적인 무엇이었으며 그다지 지적이지 않는 사람이었기에 유독 눈길이 간 글일지도 몰랐다. 사실 누군가의 별난 세계를 별다른 노력 없이 컬러풀하게 이해한다는 것은 자체로 이미 그 사람에 대한 깊은 애정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연은 나의 소울 시스터 같은 사람이다. 언제 어떤 이야기를 가지고 가도 받아들여주는 너그러움과 받아칠 수 있는 위트를 연은 모두 겸비했다.


하루키는 미즈마루를 굉장히 좋아했다. 10년을 넘은 시간동안 함께 일했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도 호흡을 맞춰보지 않은 사람’이라고 칭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둘이 꼭 맞는 레고 조각처럼 자석의 N극과 S극처럼 생각과 방향이 딱 맞아떨어지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언제나 같은 주파수로 맞춰지는 사이는 아니었다. 서로의 닮은 점을 보고 자연스럽게 이끌려 친구가 된 것은 맞지만 종종 호흡을 맞춘 적들이 있었다. 달리기로 치자면 둘 다 6분 정도의 평균 페이스를 유지하는 러너였는데, 부상 때문에 누군가 속도가 늦어지기도 했고, 오랜 시간 달리다보니 속도의 격차가 벌어진 것이다. 그럴 때면 김소연 시인의 글을 떠올렸다.

 

'동지와는 사소한 이견을 좁혀나가기 위하여 논쟁을 한 이후 옹호로 귀결되어야 옳고, 벗과는 사소한 이견으로 대화를 농밀하게 만든 이후 다름에 매혹되어야 옳다.'

 

우리는 그 격차를 농밀한 대화로 풀어냈다. 연은 매혹되고 싶은 만큼 매력적인 다름을 지닌 사람이었고, 속도는 다르되 같은 코스를 뛰는 러너였다. 자존심과 자존감의 차이를 아는 상대와 자존심을 부리지 않는 대화를 이어간다는 것은, 그 다름에 흠뻑 젖어들고 싶을 만큼 근사한 일이었다.

 

흔히들 20대 중반을 인간관계 정체기라고들 한다. 아마 누군가는 졸업을 앞두고 있고, 누군가는 사회에 뛰어들어 바쁜 나날을 보내는 가운데 급작스럽게 변화하는 환경에서는 갈등이 생기기 마련이라 하는 말일 것이다. 어쩌면 연과 나도 바쁜 일상에 치여 지금의 우정은 빛이 바래게 될지도 모른다.

 

한 치 앞도 모르는 인생, 찬란한 우정은 추억의 한 페이지로 자리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자주 해왔다. 그러나 어떻게 살아갈 지는 몰라도 살아갈 태도를 정해볼 수는 있다. 나는 이렇게 연과의 농도 짙은 대화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속도를 맞춰가며, 함께 오래 달리기 위해 서로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페이스를 조절하는 것은 결코 무용한 일이 아니라고 말하는 한 사람으로 남고 싶다.

 

 

 

나의 자랑 하연



 

너와 나는 여섯 종류로

인간들을 분류했지

선한 사람, 악한 사람......

대단한 발견을 한 것 같아

막 박수 치면서, 

네가 나를 선한 사람에 

끼워주기를 바랐지만.

막상 네가 나더러 선한 사람이라고 했을 때. 나는 다른 게 되고 싶었어. 이를테면

너를 자랑으로 생각하는 사람.

나로 인해서,

너는 누군가의 자랑이 되고

어느 날 네가 또 슬피 울 때, 네가 기억하기를

네가 나의 자랑이란 걸

기억력이 좋은 네가 기억하기를,

바라면서 나는 얼쩡거렸지.


<나의 자랑 이랑, 김승일>

 

 

시인 김승일이 그의 친구 이랑을 떠올리며 적어낸 시이다. 여기서 이랑은 최근 세번째 정규 앨범으로 컴백한 싱어송라이터자 영화감독인 그 '이랑'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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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에게 연을 소개하는 상상을 했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친구야." 혹은 "따뜻하고 착한 친구야." 그러나 어떤 말로도 마음을 담기에는 부족하다고 느꼈다. 그러다가 우연히 선물받은 시집에서 이 시를 발견했다.


"내가 자랑스럽게 여기는 친구야."

사실 나는 이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연은 내게 편지쓰기의 즐거움을 알려준 친구다.  기쁠 때나 슬플 때, 대화가 필요할 때면 각양각색의 편지지에 휘갈겨 쓴 필체로 편지를 남겼다. 편지는 생일날 형식적으로 쓰는 것에 불과한 것이라고 여겼던 나는 이후로 예쁜 편지지 모으는 것이 취미가 될 정도였다.


그렇게 나도 많이도 썼다. 연은 답장을 자주 했으니까 연에게 받은 편지만 세어봐도 나도 참 많이 넘치는 마음을 부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많은 이야기를 했지만 결국 바라는 건 하나였다. 어느 외롭고 슬픈 날, 연이 기억하는 것. 그녀가 나의 자랑이란 걸. 어느 외로웠던 날, 내가 그녀의 편지를 읽고 느꼈듯이 말이다.


어떤 일이 있어도 연이 잊지 않았으면 한다. 나로 인해 너는 누군가의 자랑이 되고, 그렇게 너의 자랑으로 불리는 것은 참 감사한 일이라는 것을. 이 글을 빌어 오래오래 기억했으면 한다. 너는 나의 자랑스런 친구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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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세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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