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고전이 도그마일 필요는 없잖아요? – 연극 '햄릿의 비극'

글 입력 2021.09.04 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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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 ‘적’이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극작가의 가장 대표적인 극을 공연했다. 바로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햄릿”이다. 극이나 문학에 전혀 관심 없는 사람일지라도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라는 대사는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만큼 “햄릿”은 원작에 충실하게 공연하든 새롭게 재해석하여 공연하든, 그것을 공연하는 이들에게 많은 부담을 안겨줄 희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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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시나리오가 명작이라는 평가를 받을 때는, 그 텍스트 자체의 작품성이 뛰어나다는 표면적인 의미만을 갖는 것이 아니다. 이는 그 희곡을 공연에 올린 극단이 많음 역시 암시한다.


그리고 이 암시는 명작을 공연한 이들 중 몇몇은 성공했을 테지만, 대부분은 이미 뛰어나게 소화해낸 소수의 명성 때문에 묻히게 되었음을 귀띔하는 것이기도 하다. 또한, 관객 역시 그 작품의 내용을 알고 있는 상태로, 적지 않은 기대와 함께 공연을 관람한다. 따라서 고전적인 명작을 공연하는 극단은 많은 부담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극단 ‘적’의 “햄릿의 비극”은 기대 이상으로 환상적이었다.


고전 작품을 활용할 때에 짜릿한 점이 무엇인가? 거기에는 저작권이 없다는 것이다. 비(非)그리스도교인에게 ‘성경’은 하나의 고전 작품이다. 따라서 그것을 뒤죽박죽 섞어 새로운 창작물로 만들어내는 것은 적어도 지식재산권법상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창작자가 세상을 떠난 지 70년은 훌쩍 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때로 ‘고전’이라는 무거운 지위에 짓눌려 그것을 일종의 도그마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그럴 필요가 있는가? 필자는 극단 ‘적’의 “햄릿의 비극”이 바로 이 ‘그럴 필요가 있는가?’의 질문 세례 속에서 탄생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극단 ‘적’은 너무나도 꼭꼭 숨겨진 나머지 그것이 도그마임을 인지하기도 힘들었던 부분을 꼬집는다. 그리고 완전히 새로운, 하지만 동시에 원작에 철저한 “햄릿의 비극”을 탄생시켰다.

 

이 재해석을 더욱 환상적으로 만들어주는 부분은, ‘새로움’보다 ‘원작에 철저함’에 있는데, 본 극단이 셰익스피어가 직접 쓰지 않은 대사는 단 세 마디만을 사용했다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그 세 마디가 어떤 것인지는 이후에 살펴보도록 한다. 기가 막히게 훌륭한 변주였다.


“햄릿”은 참 대중적인 고전 작품이기 때문에 연극 내용 자체에 관한 리뷰를 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극단 ‘적’이 다양한 실험적인 시도를 보여줬으므로, 필자 역시 그들의 실험에 집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본 기고문에서는 다섯 가지의 ‘그럴 필요가 있는가?’ 질문을 소제목으로, 그들의 신선한 시도에 집중해 보도록 한다.


※간편한 구분을 위해 햄릿 원작은 “햄릿”으로, 극단 ‘적’의 햄릿은 “햄릿의 비극”으로 지칭한다.

 

 

 

이미 해석된 것을 그대로 사용할 필요가 있는가?



“햄릿”은 이미 수차례 번역된 고전이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한 번 더 번역하면 안 된다는 법이 있는가? 다시 강조하지만 이러한 고전에는 저작재산권이 없고 따라서 번역에 대한 독점 계약도 있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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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터그 마정화는 극단 ‘적’의 “햄릿의 비극” 공연을 위해 이미 번역된 시나리오를 단순히 각색하는 것을 넘어서서 자신의 언어로 다시 해석한다. 문자 그대로 ‘재-해석’인 셈이다.


시중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햄릿”의 번역은 오래되었다. 물론 그것이 취향인 사람도 있겠지만, 번역된 문체가 너무 딱딱하고 고전적인 나머지 그 내용마저 무겁게 느껴지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번 공연을 위한 재해석에서 마정화 드라마터그는 조금 더 현대적인 단어와 어조로 번역하였다.


예를 들면 ‘폭군의 횡포’를 ‘권력자의 갑질’로 번역한 것이 그러한 것이다. 미묘한 표현의 차이를 가졌을 뿐인 비슷한 표현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소한 차이가 모이고 모여, 극의 전체적인 분위기가 조금 더 현대적인 느낌에 가까워졌다.

 

 


한 번 등장하는 대사를 한 번만 사용할 필요가 있는가?



본래 “햄릿”에서는 클로디어스가 자신이 햄릿에게 쉬이 벌을 내릴 수 없는 까닭을 설명하는 장면은 단 한 번만 등장한다. 햄릿이 레어티스의 아버지 폴로니어스를 살해했음에도 왕이 큰 벌을 내리지 않아 왕에게 따지자, 왕이 레어티스에게 그 이유를 설명할 때에 등장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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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햄릿의 비극”에서 클로디어스는 자신이 햄릿에게 쉬이 벌을 내릴 수 없는 이유를 여러 차례 설명한다. 거투르트는 자신의 아들인 햄릿을 사랑하는데, 자신은 거트루트와 끈끈히 엮여있으므로 쉬이 햄릿을 벌할 수 없음을 계속해서 역설한다.


클로디어스의 처절한 변명 반복은 역설적으로 자신의 사랑이 얼마나 불건강한 것인지를 보여준다. 이처럼 격정적인 대사의 반복은 극의 분위기를 더 극적으로 만드는 데에 이바지했다.

 

 

 

한 캐릭터의 대사를 한 캐릭터만 읊을 필요가 있는가?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라는 대사는 본래 햄릿이 독백으로 한 번만 읊는 대사이다. 인간은 마음만 먹으면 쉽게 죽음을 선택할 수 있음에도, 햄릿이 자신이 ‘차라리 죽고 싶음’에도 쉽게 죽음을 선택할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할 때 단 한 번 읊어지는 대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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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햄릿의 비극”에서는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에 해당하는 대사가 두 번 활용된다. “사느냐 죽는냐 그것이 문제인 것이지”라는 조금 더 현대적인 어감의 번역과 함께, 햄릿이 먼저 한 번 읊고, 햄릿과 레어티스의 결투 장면에서 레어티스가 한 번 더 읊는다.


또한, 원작에서는 햄릿의 아버지 즉, 선왕의 망령이 직접 햄릿 앞에 나타나 햄릿에게 자신을 죽인 클로디어스에 복수할 것을 명하며 햄릿과 대화를 나눈다. 그러나 “햄릿의 비극”에서는 햄릿이 일종의 빙의 과정 거친다. 선왕의 유령이 햄릿에게 씌워지고, 햄릿을 연기하는 배우가 직접 ‘유령’의 대사까지 소화해낸다.

 

 


햄릿 ‘배우’가 남성일 필요가 있는가?



기본적으로 ‘배우’의 사전적 정의는 ‘연극이나 영화 따위에 등장하는 인물로 분장하여 연기를 하는 사람’이다. 배우는 극중 캐릭터를 ‘분장’하여 ‘연기’를 하는 것이지, 그 캐릭터와 같은 정체성을 공유할 ‘필요’는 없다. 물론 공유한다면 분장과 연기가 조금 더 수월할 수는 있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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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대로 생각하면, 캐릭터와 정체성을 공유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관객이 불편함 없이 집중할 수 있는 공연을 선보였다는 것은, 그 캐릭터를 연기한 배우의 뛰어난 연기 능력을 입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본래 햄릿 캐릭터의 성별은 남성으로 설정되어 있다. 이는 햄릿 캐릭터를 연기하는 배우가 ‘덴마크의 왕자’, ‘왕의 아들’을 연기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지, 배우의 성별이 남성일 것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햄릿의 비극”에서는 이를 잘 잡아내었고, 여성인 박하늘 배우가 햄릿을 연기한다. 그것도 아주 훌륭하게 말이다.


“햄릿”에서 가장 잘 알려진 요소 중 하나는 아마 ‘극중극’ 구조일 것이다. 본극 “햄릿” 진행 중에는 극중극 ‘곤자고’가 등장한다. 여성 캐릭터와 남성 캐릭터가 등장하는 이 연극에서도 비슷한 시도를 선보인다. 왕비 거투르트를 연기한 배우(여성)가 극중극에서는 남성 캐릭터를, 왕 클로디어스를 연기한 배우(남성)가 극중극에서는 여성 캐릭터를 연기한 것이다.


극중극은 본극보다 조금 더 가벼운 분위기로 진행됐는데, 극중극 캐릭터 기본 설정과 극중극 배우 성별 간 불일치는 그것의 익살스러움을 더 돋보이게끔 했다.

 

 


결투가 칼싸움이어야 할 필요가 있는가?



이전에 햄릿 공연을 본 적이 있거나 희곡을 읽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번 “햄릿의 비극”에서 햄릿과 레어티스가 ‘탁구’ 경기를 하는 것을 보고 소름이 돋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햄릿은 의도치 않게 오필리아(햄릿이 사랑하는 여성)와 레어티스(햄릿이 존경하는 햄릿의 친구)의 아버지인 폴로니어스를 죽이게 된다. 이에 분개한 레어티스는 클로디어스와 함께 햄릿을 살해할 모종의 계략을 도모했고, 결과적으로 그는 햄릿과 펜싱 시합을 벌인다.


“햄릿의 비극”에서는 검술 경기 펜싱을 탁구로 대체했다. 필자가 개인적으로 소름이 돋았던 부분은 바로 탁구채를 휘두르는 행위와 칼을 휘두르는 행위가 아주 유사하여, 한 장면에서 두 행위가 겹쳐보인다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부분에서도 대사는 단 세 마디를 제외하고 원작 그대로 사용하였다.


앞서 필자가 “셰익스피어가 직접 쓰지 않은 대사는 단 세 마디만을 사용했다”라고 설명했던 부분이 기억나는가? 바로 그 대사가 이 부분에서 등장한다. 원작에서 펜싱 경기 중에 햄릿이 점수를 얻었는지 얻지 못했는지 확실하지 않은 부분이 등장한다. 햄릿은 자신이 득점했음을, 레어티스는 그렇지 않음을 주장하며 다툰다. 그러던 중 햄릿이 심판에게 판정을 묻는다. 간신인 신하는 권력자인 햄릿의 편을 들고, 햄릿의 득점 판정이 내려진다.


펜싱을 탁구로 변용한 “햄릿의 비극”에서 역시 햄릿이 득점한 것인지 아닌지 모호한 부분이 등장한다. 레어티스가 햄릿 쪽으로 탁구공을 넘겼지만, 그것이 ‘인(in)’인지 ‘아웃(out)’인지 확실하지 않았던 것이다. 햄릿은 ‘아웃’이라며 자신의 득점을 주장하고 레어티스는 ‘인’이라며 자신의 득점을 주장한다. 각자 “인!”과 “아웃!”을 반복하여 외치다가, 햄릿이 심판에게 판정을 요구한다. 간신인 신하는 권력자인 햄릿에게 득점 판정을 선물한다.


두 마디가 아닌 세 마디가 변용되었다고 설명한 이유는 “인”과 “아웃” 외에도, 이후에 햄릿이 레어티스의 공이 “네트”에 걸렸다고 주장하는 부분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펜싱을 탁구로 변용하는 아이디어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소름 돋게 신선한 부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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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극단 ‘적’의 “햄릿의 비극”은 철저히 원작에 충실하면서 이전까지의 “햄릿”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시도였다. 이를 가능하게 한 마정화 드라마터그의 뛰어난 각색, 배우들의 훌륭한 연기력, 연출팀의 신선한 연출에 찬사를 보내고 싶다. 글에서 언급하지는 않았으나 풍선을 터뜨리는 연출과 2층에서 탁구공을 쏟는 연출은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고전을 도그마로 받아들일 필요가 전혀 없음을 입증한 뛰어난 공연이었다.

 

 

[최호용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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