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기어코 세상을 구하는 악착같은 기억으로

글 입력 2021.09.04 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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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소설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이 요원하다는 것보다 절망적이었던 것은 이 질문을 꺼내기조차 어려운 현실이었다. 기대가 좀처럼 실현되지 않아서, 오히려 더 큰 실망을 안겨서, 질문이 여는 토론이 쉽게 싸움으로 변질돼서, 그 과정에서 너무나 많은 폭력이 이뤄져서, 쳇바퀴처럼 반복되는 이 모든 상황이 예상되어서 섣불리 앞날을 꿈꿔볼 수도 없는 현실이 지속되고 있다. 세상이 망해버렸다고 생각하면서도 줄곧 모색하고자 했던 그 이후를 이제는 희망차게 상상할 수 없다는 생각에 과거로 돌아가려는 뒷걸음마저 더뎌진다.

 

그러나 동시에,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혼란 속에서 차분히 지금을 살피기로 한 사람들이 있다. 누가 더 재난의 위험에 노출되는지 주목하는 것은 사회가 생명의 무게에도 경중을 가리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냈고, 누가 더 쉽게 비난받는지에 관한 문제는 폭력이 주로 어디로 향하는지를 인식하게 했으며, 매스컴을 타고 전달되는 소식들은 정보가 어떻게 전달되고 어떤 권력과 관계를 맺는지 고찰하게 했다. 바이러스 하나에 움츠러드는 인류의 무력함을 깨닫는 것은 인간이 지구를 지배하고 있다는 인간 중심적 사고를 무참히 쓰러뜨렸다. 무엇 하나 단언할 수 없는 세상에서 재난이 보여주는 것을 바라보며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감각했다. 어떻게 하면 돌아갈 수 있는지, 돌아간 세상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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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끝의 온실」은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사이보그가 되다’ 등의 작품으로 SF적 발상과 사회적 통찰이 만나는 독창적인 세계관을 직조해온 작가 김초엽의 첫 장편소설이다. 코로나 19로 인한 두려움이 극심하던 시기 ‘이렇게 망할 수는 없다’는 생각에서 작품 구상을 시작했다는 작가는 재난으로 절멸한 세상을 마침내 재건하는 마음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며 한 줌의 희망을 안고 묵묵히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려보고 싶었다고 한다. 작고 유약한 존재의 가치를 조명하는 작가의 강인한 인식은 치밀하게 짜인 포스트 아포칼립스 세계관을 통해 우리가 돌아가야 하는 세상에 관해 묻는 두 가지 질문에 대한 자신만의 답을 제시한다.

 

소설의 배경은 ‘더스트’라는 재난으로 멸망한 2055년 이후의 세계와, 재난이 종식된 이후 한참이 지난 2129년 그 세계의 진실을 찾아 나서는 한국의 더스트생태연구센터를 넘나든다. 이야기는 강원도에서 발견된 ‘모스바나’라는 식물의 과증식 사태로부터 시작한다. 더스트 시대 후기와 재건 초기에 번성한 이후 자연적으로 사라진 지 오래인 ‘악마의 식물’ 모스바나의 기이한 재등장에 대해 연구할 의무를 맡은 더스트생태연구센터 직원 아영은, 모스바나가 가끔 푸르게 발광한다는 지역의 소문을 듣고 외로웠던 어린 시절 친구가 되어준 한 할머니의 정원에서 보았던 푸른빛을 떠올린다. 아영은 이 식물의 진실을 알고 있다는 제보에 따라 더스트 시대 약초로 사람을 치료했다는 바랜 영광을 안고 사는 에티오피아의 나오미를 찾아가 아무도 믿어주지 않았다던 더스트 시대의 숨겨진 이야기를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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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을 지난 현재와 재난 당시의 과거를 역동적으로 오가며 소개되는 세계관은 인간이 사이보그 신체로 개조되고 공중을 나는 호버카로 이동을 하는 먼 미래를 배경으로 하지만 지금의 팬데믹 상황을 구체적으로 연상할 수 있을 정도로 생생하고 촘촘하게 그려진다. 그러나 그것은 비단 자세한 묘사 때문만은 아니다. 놀라운 풍경을 창조하면서도 지금 여기의 것과 다름이 없이 나약하고 복잡한 인간 심리의 내면을 깊이 들여다보고 재현하는 작가의 예리한 통찰이 만들어내는 세계에서는 당연히 시대를 초월하는 공통의 감정과 경험이 발생하고, 지금과 같은 인간과 지금과 같은 공동체가 등장한다.

 

이를테면, 더스트가 발생한 이후 더스트를 막을 수 있는 돔이 씌워진 ‘돔 시티’와 더스트에 무방비하게 노출되는 돔 바깥이 구분되며 사회에 경계가 생겼다는 설정이 그렇다. 돔 시티는 선택받은 자만이 입성할 수 있는 ‘정상 도시’이며, 돔 바깥으로 밀려난 사람들은 돔 시티의 유지를 위해 착취되고 약탈당한다. 그러나 돔 안에서도 분열과 폭력은 지속된다. 집단의 강화를 위해 하나씩 경계선을 더해가며 구역을 좁히지만 결국 완전한 공동체는 만들어지지 못하고 모두 파멸한다. 재난이 모두를 위협하는 가운데 권력이 허구의 기준을 세우고 착취의 구조를 조직하여 약자를 몰아내는 소설 속의 재난 상황은, 바이러스나 전쟁이 아닌 소수자를 배척하며 내부의 모순을 덮어버리려고 하는 현재 사회의 거대한 은유 같다.

 

작가가 주의 깊게 바라보는 곳은 돔 시티 안보다는 ‘버려진 곳’인 돔 바깥이다. 소외된 자들이 어떤 사람이 되고 어떤 관계를 맺으며 어떤 공동체를 이루는지 지켜본다. 돔 바깥의 디스토피아와 그 속에서 기적적으로 피어난 ‘프림 빌리지’의 이야기는 마을의 창조자이자 관찰자인 지수와 마을에 뒤늦게 들어온 나오미의 서술이 중첩된 지점에서 묘사된다. 나오미는 생사가 위태로운 상황에서 구원처럼 발견한 더스트 완화 지대 프림 빌리지가 최선의 공동체라고 생각하면서도, 동시에 이 마을이 여타 공동체처럼 언제든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돔 바깥으로 버려지고 착취당한 기억 때문에 프림 빌리지가 영원하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마을 밖으로 나가 더스트가 없는 세계를 재건해야 한다는 지수의 말에 반발한다.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버려졌다. 그들은 우리를 착취하고 내팽개쳤다. 그 사실만은 절대로 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왜 버려진 우리가 세계를 재건해야 할까.

 

(「지구 끝의 온실」, 215p)

 

    

나오미와 달리 수많은 경험으로 이미 공동체의 불완전성과 경계의 허구성을 지각한 지수는 이전과 다를 바 없이 무너질 프림 빌리지에 기대지 않고 ‘돔을 없애는 것’을 추구한다. 돔의 안과 밖을 나누는 구조 자체를 제거해야 한다는 것이다. 처음엔 인류에 대한 회의감과 무력감으로 가득 차 있던 그는, 나오미를 포함한 마을의 주민들이 불안해하면서도 허구적인 구분에 의존하기보다 당장 오늘을 살아야 한다는 무모한 끈기로 서로를 붙들며 ‘버려진 곳’을 ‘도피처’로 바꿔나가는 것을 보고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불완전한 공동체로도 세계는 재건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어떻게든 생존하고 협력해야 한다는 이상한 활기로 굴러가는 공동체가 결국 찰나의 희망을 놓치지 않고 세상을 구할 것을 직감한다. 그리하여 프림 빌리지가 무너지는 그 순간, 나오미와 주민들은 각자 더스트를 응결할 수 있는 식물 모스바나와 또 다른 프림 빌리지를 건설하겠다는 소망을 쥔 채 뿔뿔이 흩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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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려진 곳에서 사소하지만 유일한 희망을 발견하여 저들을 핍박하던 세계에 공동체의 가능성을* 퍼트린 프림 빌리지의 주민들은 그들이 세계를 구할 때 함께 한 모스바나의 특성과 닮았다. 모스바나는 죽은 땅 위에 자라나 인간이 통제할 수 없을 정도의 빠른 속도로 악착같이 번식하며 인간에게 유해한 독성을 가졌다는 이유로 아무도 반기지 않으나, 사실 더스트를 응결하는 특성이 있어 현대과학보다도 먼저 더스트로부터 인류를 구하고 자연적으로 사라진다. 마찬가지로 ‘정상’의 범주에 포함되지 못해 소외된 프림 빌리지의 주민들은 자신들을 지켜주지 않는 세상에서도 끈질기게 모스바나를 심어 결국 더스트를 완화하고 세계를 재건한다. 프림 빌리지는 붕괴하였으나, 또 다른 프림 빌리지를 만들겠다는 소망은 끝까지 살아남아 안과 밖의 경계를 무너뜨렸다. 함께 한 기억과 서로를 향한 신뢰, 그리고 그것이 켜켜이 쌓인 그리움이 이 세계를 구한 것이다.

 

모스바나를 심은 주민들뿐이 아니다. ‘지나간 것에 집착하는, 당장 중요한 현실의 문제는 돌아보지 않는(82p)’ 학문으로 치부되었던 ‘더스트생태학’을 연구하며 생태의 과거를 기억하고자 했던 아영은, 마찬가지로 잊지 않고 간직하던 푸른 빛의 기억을 시작으로 여태 아무도 믿지 못해 드러날 수 없었던 이야기를 세상에 전하며 역사를 바로잡을 수 있게 된다. 아영의 기억 속 할머니, 지수는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 더스트가 시작되고 프림 빌리지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모두 기록한 것을 남겨 아영의 연구에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지수와 프림 빌리지를 함께 만들어 온 식물학자이자 모스바나의 편집자 레이첼은 지수에 대한 그리움 끝에 아영과 만나 시대를 증언한다. 세계를 구하고, 세계를 바꾼 이 기적 같은 이야기는 모두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세계(389p)’에서도 무언가를 사랑했던 기억들로부터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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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첼은 죽음을 선택했던 자신을 흔들어 깨운 지수에 대한 호기심으로, 지수는 무뚝뚝한 레이첼에게 호의가 담긴 말을 들을 수 있을까 하는 궁금증으로 서로와 더욱 관계 맺으려 한다. 엔지니어 지수는 레이첼의 신체를 수리해주고, 식물학자 레이첼은 마을을 더스트로부터 보호하는 데 필요한 식물을 제공한다는 계약으로부터 시작된 관계는 찰나의 물음표와 함께 기간과 깊이를 점차 더해갔다. 내일 당장 세상이 망한다 해도 상관하지 않았던 둘은 더욱 살아서 서로를 보고 싶다는 생각으로 삶을 지속했고, 공동체를 만들어냈다. 생을 다해도 끊어지지 않은 기억의 연결고리는 그토록 회의했던 세상을 재건하는 데 성공한다. 세상에 대한 기대가 하나도 없는 재난 같은 상황에서도 예상치 못하게 내일을 기다리게 만드는 일들이 생겨난다. 이 소설은 누군가의 내일을 가능케 하는 작고 유약한 존재들이 언젠가는 빛내는 ‘예상치 못한’ 힘에 대한 찬사이다.

 

원예학을 전공한 작가의 아버지는 식물에 대한 작가의 질문에 ‘식물은 뭐든 될 수 있다’고 답했다고 한다. 어린 아영에게 지수가 건넸던 ‘식물들은 잘 짜인 기계’ 같다는 말을 떠올린다. 뭐든 될 수 있는 잘 짜인 기계 같은 식물은 정확히 자신이 의도한 지점으로 향한다. 모스바나가 향했던 지점은 어디였을까? 무엇 하나 단언할 수 없지만 하나 확신할 수 있는 건, ‘쓸데없이’ 눈에 띄어 제거할 예정이었으나 지수가 아름답게 바라본다는 이유만으로 제거되지 않은 모스바나의 푸른 먼지처럼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여 악착같이 빛을 내는 기억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끝내 이 세상을 재건하리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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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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