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자몽

글 입력 2021.09.03 1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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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감정을 과장하는 경향이 있다. 이제는 그러지 않아야겠다고, 자몽을 까다가 생각했다. 과육을 둘러싼 희끄무레한 껍질을 벗기면서 진짜 내 마음 그대로를 외부세계에 드러낸다면 어떨까 상상한 것이다.

 

타인 앞에서의 나는 어떤 모양인지 떠올려 보았다. 본디 타고난 것보다 더 부드럽게, 과할 정도로 친절하게, 누군가를 축하해 줄 때는 정말로 점프하면서—뛸 듯이 기뻐하는 모습을 만들어낸다. 남들을 대하는 보통의 애티튜드가 그렇다. 오해와 불명예에서 나를 보호하기 위함이다. 나쁘지 않은 평판도 조용히 따라온다.

 

그렇게 나는 순백의 두꺼운 껍질을 덮어 입고 단정한 모습으로 자리한다. 가죽 같은 겉껍질을 벗겨도 속껍질에 둘러싸여 있다. 그러니 내 세계에 뛰어 들어와 나를 가르고 껍질을 뜯으려 하지 않으면 진짜 알맹이를 볼 수 없다.

 

그러다 문득 무엇이 옳은 것일까 의문에 빠졌다. 내가 껍질을 스스로 벗는 것이 좋을까? 솔직함은 언제나 미덕일까. 비난받을 구실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서였지만, 타인 또한 그런 나의 꾸며낸 친절함을 사랑해왔다고 믿는다. 대개 나를 다정하다고 평한다. 착하다고 종알대며 허리께를 도닥인다. 에너지가 넘친다고 엄지를 추켜세운다. 그럴 때마다 진짜 나를 알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다고 생각했다. 기운이 몸에서 빠지다 못해 땅 밑으로 낙하하곤 했다. 보여주지 않은 건 나면서도 꼭 그렇게 혼자 불편해했다.

 

컨디션이 좋지 않을 때면 대화 중 동공이 풀리지 않도록 계속해서 나사를 조이는 버릇이 생겼다. 그런 날 밤에는 좋지 않은 기분 그대로 대화를 해보고 싶다며 벽지를 긁었다. 고저 따위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건조한 대화. 배우와 관객이 존재하지 않는 대화. 스스로 갸륵함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 대화. 노력하지 않는 대화. 그런 대화를 나눠보고 싶었다. 다만 두려웠다. 기실 그들이 보는 나는 불투명한 껍데기를 뒤집어쓴 반쪽짜리 자아인데, 붉은 살을 보고 꺼리며 도망가 버릴 것인지 아니면 진짜 속은 이렇구나 하며 겉을 함께 벗겨줄 것인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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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상념에 빠진 채 자몽을 손질했다. 처음에는 여물지 못한 손끝 사이로 과육이 죄다 부스러져 이리저리 흩어진 파편들을 모아야 했다. 그러나 마지막에서 세 번째 자몽 조각을 벗길 때 즈음엔 제법 기술이 숙련되어 꽤 큼직한 덩어리를 그릇에 담을 수 있었다. 서서 기계적으로 노동하는 이 시간이 만족스러웠다. 구태여 웃지 않아도 되고, 나를 포대기에 둘둘 싸서 잘 포장하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다.

 

손끝으로 자몽의 과육이 알알이 터졌다. 마녀가 된 것만 같았다. 주문을 외우지도 않았는데 손에 토옥톡-하고 넘치는 힘이 튕겨져 나왔다. 이를 이기지 못하고 저만치 떼구루루 굴러가는 것들도 있었다. 조금 더 다정하게 자몽을 대해주어야 했다. 달래듯이.

 

그런데 다정하려면 힘이 들었다. 하고 싶은 대로 찢듯이 껍질을 벗기고 우악스럽게 알갱이들을 긁어내서는 안 됐다. 손끝에 집중한 채 천천히, 조금씩, 빛을 처음 쐬는 빨간 것들을 배려하면서. 그렇게 자몽을 상대해야 했다. 진짜 나를 무턱대고 덜컥 내놓아서는 안 된다고, 마구잡이로 광장에 던져놓는 것을 솔직함이라고 일컬어서는 안 된다고 자몽이 조잘거리는 것 같았다.

 

나는 나를 생각하듯이 남을 생각해야 하고 남을 배려하듯이 나를 배려해야 한다. 모든 개방 절차는 아주 섬세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어떤 알맹이도 바닥으로 낙하하거나 도중에 으깨어져 붉은 죽음을 맞지 않도록. 그리하여 향긋함이 공중에 무해하게 퍼질 수 있도록. 숨김이 언제나 미덕인 것은 아니듯, 개방 또한 건강한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내가 흠 없이 손질될 수 있게 도울 누군가도 존재한다고. 자몽을 까면서 생각했다.

 

껍질을 다 벗긴 손에서는 새콤한 향기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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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미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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