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상실로 장식하는 삶, '노르웨이의 숲' [도서/문학]

글 입력 2021.08.28 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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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살 무렵, 도서관 서가 구석에서 <상실의 시대>를 발견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문학사상사에서 정발한 초판본으로, 종잇장이 죄 누렇게 바래있었다. 청소년 소설이 조금은 지겨워진 터라 세계 문학 전집을 건들기 시작했던 때였다. 오히려 청소년 도서를 적극적으로 찾아보는 지금의 나로서는 치기 어렸단 생각이 들지만, 아마 내 세계를 확장하고 싶다는 시의적절한 욕구였을 것이다. 그 욕구에 대한 해답으로서 <상실의 시대>가 적절했냐에 대해 논하자면… 그 짐작이 맞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명성조차 제대로 모르던 적이었다. 예상했겠지만, 당시 읽은 <상실의 시대> ―원제 <노르웨이의 숲>― 은 여러 의미에서 충격 그 자체였다. 조금 더 커서는 하루키의 대표작들을 무섭게 먹어치워가며 그의 작품 세계를 이해할 수 있었으나, <상실의 시대>가 내게 안겨 준 장마철 살내음마냥 진동하는 진한 삶의 향은 오래 잊히지 않았다. 그런 내가 <상실의 시대>, 아니, <노르웨이의 숲>을 다시 펴든 건 얼마 전이었다. 꽤나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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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초적인 질문이 떠오른다. ‘상실의 시대’라 함은 무언가를 상실한 이들이 이룬 시대일까, 아니면 개인을 상실에 빠지게 하는 시대를 일컫는 것일까. 상실을 낳는 것은 무엇이며, 인간은 이를 어떻게 수용하며 살아야 할까. 아니, 상실로 인해 뚫린 구멍들을 안고서까지 살아야 할 필요가 있을까. 답보다는 결론이 필요한 물음들이다.

 

책을 읽으며 ‘상실’이 폭력의 한 종류라고 느끼게 된 이유는, 누군가의 상실의 경험이 타인에게 또 다른 상실을 안긴다는 것을 여실히 느꼈기 때문이다. 사회 문화적 요소들이 신경계마냥 복잡하게 연결된 외부세계, 그리고 못지 않게 속 시끄러운 내면을 양 극에 두고 방황하는 개인들의 이야기를 따라가면, 어느새 스스로의 초상을 마주하게 된다. 작품에 대한 더 깊은 이해를 위해 차례로 고찰을 이어가보고자 한다. 물론 이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견해임을 밝힌다.

 

 

 

<노르웨이의 숲> 인물들에 대한 고찰


 

애니메이션 영화 ‘인사이드 아웃’이 떠오른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5개의 감정들이 한 아이를 이루는 것처럼, <노르웨이 숲>의 인물들은 각각 다른 종류의 상실을 상징하고 이들이 하나의 커다란 시대적 상실로 집약된다는 느낌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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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상실의 시대> 홍보 이미지

 

 

와타나베는 방황을 상징하고, 방황이란 방향성의 상실이다. 그는 주인공이라는 사실이 무색하게 여타 인물들에 비해 비교적 평범하고, 평평한 인물이라 느꼈다. (그러나 '어딘가 고독하며 은근 여자에게 인기가 많고 재즈와 술을 좋아하는' 남자 주인공이라고 설정함으로써 이제는 조금 고루한 하루키다움을 고수했다.) 확고한 취향과 내면세계를 지니고 있으나, 그 시대 사람들이라면 응당 즐길 것들을 향유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이것이 작가가 와타나베를 서술자로 내세운 이유이라고 생각한다. 독특한 인물들의 소용돌이 가운데 위치한 와타나베는 마치 태풍의 눈처럼 고요히 관계를 맺는다. 그를 특별하게, 보다 입체적인 인물로 보이게 하는 것은 그의 주변 인물들이다. 특히 그를 둘러싼 여성들이 그로 하여금 다양한 사랑의 감정, 또는 동정과 사랑의 아슬한 경계 위에 서있는 기분을 느끼게 한다. 따라서 주변인들의 상실은 곧 와타나베의 상실로 흡수되는 양상을 보인다. 와타나베는 다양한 상실의 집약체로서 주인공으로 기능하는 것이다.

 

이야기가 진행될 수록 그의 고뇌와 방황은 깊어져만 간다. 작가는 그 과정에서 2차적으로 발생하는 상실을 드러내면서도 상실한 것을 어떻게든 찾아내야 한다고 강요하지 않는다. 그저 그 방황이 지독할정도로 끈질기고 하릴없음을 보여줄 뿐이다. 상실에는 아무런 목적도 목표도 없다. 그저 잃어버린다는 상태뿐이 존재할 뿐이다.

 

<노르웨이의 숲>의 많은 인물이 자살로 생을 마감하지만, 와타나베는 방황과 상실을 지속하며 여전히 살아있다. 살아있어 방황하는지, 방황하기 위해 살아가는 건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 나오코와 하사미 등 여타 인물들이 실제적 죽음을 맞았다면, 와타나베는 ‘영혼의 죽음’에 다른 캐릭터가 아닐까 생각한다. 어쨌거나, 또 다시 상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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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오코는 유년의 상실을 보여준다. 염세적인 태도를 보이는 인물이지만, 그럼에도 매우 환상적인 존재로 느껴진다. ('하루키적' 여성 캐릭터의 전형이라 느낀다.) 1인칭 서술자인 와타나베는 나오코에 대한 감정을 아주 세밀히 묘사하지만, 정작 나오코에게는 그가 어떤 존재인지 단편적으로 밖에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와타나베와 나오코는 모두 스물이란 나이에 의미를 둔다. 상실이 밀뭍듯이 밀려오는 경계로서의 나이이다. 둘이 함께 보냈던 십대의 끝자락은 시간의 흐름과 함께, 가즈키라는 같은 상실의 경험을 공유하며 사라진다. 완전무결한 순수성 역시 함께 쓸려가는 것이다. 나는 와타나베가 나오코에게 느끼는 감정이 연인 사이의 사랑을 닮았다기 보다는 과거에 대한 미련과 남겨진 이에 대한 동정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그에게 나오코는 유년의 상실이자 언젠가 행복이 있었던 과거에 대한 증거이며, 일종의 책임감을 갖게 하는 존재인 것이다. 그런 나오코 역시 와타나베에게 있어 하나의 상실의 축을 이루고 있다.

 

미도리는 사랑의 상실이다. 그는 성적 궁금증과 욕망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이성적 매력'이 가득한 여성으로 묘사된다. 녹록치 않았던 가정환경 등을 고려하면 응당 불운한 유년기의 소유자지만 특유의 뒤틀린 낙천성이 그의 매력을 돋보이게 한다 느꼈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인 인물이었다. 미도리가 성적 관심이 유별난 이유는 감정적 사랑에 대한 부질없음을 깨달은 결과가 아닐까 예상해본다. 부모님에 의한 정신적 학대, 학창시절 원만치 못했던 교우 관계 등이 그 욕구의 반향을 이룬다. 수없는 상실의 경험에 피로해진 그는 자꾸만 실질적 자극에 눈을 돌리게 되고, 점점 깊은 근원으로 들어간다. 인간의 근간을 이루는 감정이나 원초적 행위에 관심을 갖는 것이다. 그런 그가 와타나베에게 일종의 정신적 사랑을 표했다는 사실을 통해 미도리의 진심을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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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사와는 이해하고 이해 받고자 하는 욕구의 상실, 즉 관계의 상실을 상징한다. “나는 나에 대한 타인의 이해를 바라지 않는다.”라는 그의 말은 이해를 받으려는 노력을 않으니, 하려는 노력도 않는다는 언명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그는 폐쇄적인 동시에 개방적이고, 이러한 모순을 아무렇지 않게 껴안고 사는 인물이다.

 

그의 평판이 좋은 이유는 그가 스스로를, 나아가서 인간을 잘 이해하기 때문이 아닐까. 적어도 잘 이해한다고 '믿고' 있다. 그것이 착각일지라도, 믿음은 상실을 경험하고 구멍난 삶을 끌고 나감에 있어 매우 중요하다. 허나 이러한 긍정적인 사고 과정 아래에 남은 찌꺼기는 걸러지지 않았을 것이고, 그 참을 수 없는 굶주림을 문란한 성생활로 드러낸 것이라 예상한다. 개인의 미시적 삶에 초점을 맞추고자 했던 작가의 시각이 여실히 드러나는 인물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하사미는 동경의 상실을 보여준다. 그가 나가사와를 사랑하는 이유는 맥락적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필자는 그가 앞서 언급한 나가사와의 높은 자기 이해력에 매력을 느껴 그를 동경하지 않았을까 예상했다. 또한 와타나베는 '하사미가 내 친누나였으면 좋았을 거다' 언급하는 만큼 정신적으로 그를 존경한다. 아마 가장 인간적인 의미의 존경의 대상이 아니었을까 싶다. 동경과 사랑의 감정을 이렇게 서로의 꼬리를 무는 뱀처럼 관계망을 얽고 있다. 그러나 총명하고 단단했던 하사미의 자살은 와타나베에게 동경할 대상의 상실을 안기고, 이는 그 어떤 것도 마음 놓고 동경하기 어려운 우리의 초상을 보여준다.

 

 

 

성적 묘사에 대한 고찰


 

<노르웨이의 숲>이 입소문을 탄 이유에는 그 외설성이 분명 자리하고 있다. 그렇기에 이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루키의 작품을 읽을 때마다 하는 생각이지만, <노르웨이의 숲>을 다시 읽으며 여성 캐릭터를 다루는 그 특유의 방식에 대해 얇은 불편함을 느끼기도 했다. 그러나 일단 이 부분을 차치하고 논의하고자 한다.

 

인간은 어쩔 수 없이 물리적 자극에 반응한다. 가끔 지갑을 채울 지폐 몇 장보다도 마음을 채울 싸구려 애정이 더 간절해지는 게 인간이라 생각한다. 따라서 이들은 뻥 뚫린 가슴에 온도를 지닌 또 다른 가슴을 맞대고 잠들고 싶은 욕구를 이길 수 없다.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것과 같은 상황이지만, 자꾸만 뚫리는 상실의 구멍에 그때그때 일회성 욕구 풀이를 욱여 넣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루키가 성적 묘사를 자세히 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잘 보면 그가 묘사하는 성행위 장면은 애무 방법부터 시작해 그 움직임에 서려있는 감정까지 모두 다 다르다. 누가 성행위를 하는지, 어떤 상황에서 하는지, 상대에 대한 감정이 어떤지에 따라 다양하다. 이는 각자가 겪은 상실의 경험과 그것을 채우기 위한 욕구, 그리고 관계에 대한 정의를 보여주는, 하루키로서는 절대 생략할 수 없는 하나의 심볼이라 사료된다. 그렇기 때문에 자세한 성적 묘사는 불가피한 부분이 있고 개인적으로 인물들 간의 감정적 관계를 이해하는데 그러한 장면들이 도움이 되기도 했다.

 

이들의 관계에 대해 얘기하다 보면, 마지막 장면인 레이코와 와타나베의 성행위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의 행위를 어떻게 해석해야할지 고민했다. 쉽사리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의 겹이 층층히 쌓인 느낌에 난해함을 감출 수 없었다. 나오코를 보내고 치룬 둘 만의 장례식에 일부였던 건지, 그저 욕망이 터져나온 결과인지에 대해 고민했다. 후자로 치기에는 그들의 섹스에 친밀함이 많이 서려있었다.

 

결국 내 결론은 이렇다. 레이코에게는 8년만에 바깥 세상으로 나와, 이전의 불행을 상실하고 새 삶으로 나아가기 위한 신호탄과 같았을 것이라고. 와타나베에게는 나오코라는 영원의 상실에 순응하고 그를 보내주는 행위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어쨌든 둘은 계속해서 상실하기를 택했다. 상실감을 끌어안기를 택한 것이다. 와타나베가 끝까지 살아남기를 선택한 것과 같은 의미이다. 상실은 삶을 장식하고, 그는 곧 삶 그 자체가 된다. 우리는 그런 시대에 살고 있다.

 

 

 

'상실'이란 장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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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이라는 단어 자체가 가진 무게가 있다. 하루키의 또 다른 작품 <댄스 댄스 댄스>에서 가장 오래도록 남은 구절이 있다. ‘죽음의 이로운 점은 더 이상 아무것도 잃을 게 없게 된다는 것이다.’ 상실에 대한 두려움이 죽음의 이점을 이끌어냈다는 사실이 묘하게 느껴진다. 상실의 시대는 개인의 몰락을 가져온다. 그만큼 강력한 것이다.

 

이러한 생각을 이어가다 보면, 작품 속에서 나오코와 레이코가 머물던 시설이 떠오른다. 그곳이 마치 유토피아의 원형처럼 묘사된 이유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아마 상실이 부재한 곳이어서 그럴 것이다. 모두들 제 시간에 각자 하고 싶은 소소한 과업을 행하고,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고, 아주 솔직하게 자신을 표현한다. 단순한 삶일수록 상실이 발생할 가능성이 줄어든다.

 

시설에서 나온 와타나베가 한동안 도쿄에 심한 염증을 느낀 것을 보면 이러한 내 생각에 더욱 힘이 실린다. 이 시설의 위험성은 여기서 대두된다. 시간은 흐르는 속성뿐 없고, 그 속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휩쓸리는 일뿐이다. 휩쓸리다 보면 손에서 놓을 수 밖에 없는 것들도 생긴다. 아이러니하지만 그것들이 흘려내려가는 반동으로 인간은 또 다시 앞으로 나아간다. 상실이 삶을 죽이는 경우와 삶을 끈질지게 살려내는 경우 모두를 보여주며 하루키는 삶 앞에서의 태도에 대해 더욱 고민하게 한다.

 

우리는 견딜 수 없을 만한 상실을 겪더라도 견딜 수 없어하는 또 다른 이들을 마주친다. 그들이 때로는 우리를 조금은 더 견딜 수 있게 만든다는 걸, <노르웨이의 숲> 인물들을 보며 느낄 수 있었다. 무작정 낙관적으로 해석할 결말은 아니었더라도, 나는 앞으로 상실 속에서도 레이코의 기타 소리를 듣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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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송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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