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행복한 기억을 매듭짓는 법 [공간]

글 입력 2021.08.23 1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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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 두 번 다시없을 특별한 날들이 있다. 오랫동안 품어온 꿈이 실현된 날, 영원히 지속될 수는 없지만 그래서 더 특별해지는 날들 말이다. 미래에 대한 걱정 없이, 그 순간만을 충실하고 싶지만 어쩔 수 없이 조바심을 느끼게 되는 날들. 시간을 어떻게 채워도, 결국엔 아쉬움이 남고 말 날들.

교환학생으로 프랑스 파리에서 지냈던 시간이 그랬다. 반년의 시간이 이렇게 빠르게 흐를 수가 있나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나한테는 파리라는 도시가 아주 특별했기 때문이다. 파리와의 첫 만남은 어렸을 적 들었던 한 강의에서였다.
 
 
 
파리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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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학년 2학기, 초등학교와 중학교의 경계에 서있던 시절이었다. 엄마는 구청이나 문화센터, 예술기관에서 하는 프로그램들을 잘 찾아보고, 일단 한번 들어보도록 해주는 분이었다. 예술의 전당에서 들었던 미술사 수업도 역시 엄마의 추천이었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지만, 그 수업은 내 삶에 중요한 분기점이 되었다.

봄, 여름은 시대 순으로, 가을과 겨울은 중요한 예술가를 중심으로 미술사의 흐름을 공부했다. 사실 공부라기보단, 재미있는 이야기 듣기에 가까웠다. 처음 듣는 이름과 명칭이 가득했지만, 어렵기보다 흥미진진해서 눈이 빛나는 시간이었다. 미술은 참 신기하고 재미난 것이었고, 미술과 맞닿은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프랑스 파리는 선생님이 들려주신 이야기들에 자주 등장한 배경이었다. 예술가들이 모여 작품을 만들고, 전시회를 열고, 이야기 나누는 장면을 상상하면 즐거웠다. 그 즈음 성인이 되면 꼭 파리에 가야겠다는 꿈을 품게 되었다. 잠깐 가는 여행보다는, 몇 달 이상 천천히 머무르면서 파리를 마음껏 느끼고 마음에 담고 싶었다.

대학생이 된 후, 나는 파리의 꿈을 잊지 않았다. 교환학생으로 떠날 수 있는 학교들이 나열된 엑셀을 열심히 들여다보았다. 프랑스어 자격증이 필요하지 않고, 경제학과 학생도 신청할 수 있는 학교가 딱 하나 있었다.

그래도 괜히 한번 망설였다. 어린 날의 감상에 젖어 선택하면 후회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찬찬히 정리하니 교환학생으로 가게 될 도시에 바라는 점은 세 가지였다. 첫째, 문화예술을 도시 곳곳에서 만날 수 있는 곳. 둘째, 큰 강과 공원을 품은 곳. 셋째, 여행 가기 좋도록 교통이 편리한 곳. 유럽에서 이 조건들을 충족시키는 곳을 찾아보았고, 역시나 파리가 딱이었다. 이쯤 되면 운명이라 생각했다.

파리의 대학교를 1지망으로 적어낸 후, 교수님과 간단한 면접이 이어졌다. 교수님은 왜 그 학교를 가장 희망하는지 물어보셨다. 나의 대답은 ‘Dream City’였다. 얼마 뒤, 최종 교환 학교가 발표되었다는 알람이 떴다. 떨리는 손으로 페이지를 열었을 때, 소리를 질렀다. 역시 운명이야!
 
 
 
파리의 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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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로 길고 험난한 준비과정이 이어졌다. 정신없이 흐르던 시간이 어느 날 멈췄고, 나는 파리에 서있었다. 시차가 적응되지 않아 약간은 몽롱한 상태였고, 눈앞에 펼쳐진 밤의 파리가 과연 현실인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생활에 필요한 각종 물품을 구입하고, 서류를 처리해야 하기에 다시 바빠졌다. 열심히 배워 온 프랑스어는 안녕? 활기찬 인사 외엔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혼자 집을 나서는 것도 무서웠다.

하지만 버스에 처음 오른 날, 나는 내가 받은 가장 큰 행운을 알았다. 판테온 근처 기숙사로 배정되어서, 어디를 가든 루브르 박물관을 가로지르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었다. 창밖으로 오랜 시간 꿈꿔온 루브르의 투명한 피라미드를 무수히 만날 수 있었다. 매일 보아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매일 새로이 태어나는 마음이 들었다.

파리의 수많은 예술공간 중, 가장 먼저 가본 건 오랑주리 미술관이었다. 모네의 <수련>이 둥글게 감싸는 그곳에 서있고 싶었다. 지베르니의 정원을 떠올리면서, 모네의 아침과 밤을 생각하면서 많은 시간을 그곳에서 보냈다. 긴 의자에 앉아 친구에게 편지를 쓰기도 하고, 음악과 함께 하염없이 그림을 바라보기도 했다.

오랑주리를 시작으로 파리의 다양한 미술관을 부지런히 다녔다. 루브르와 오르세에서 많은 관광객 사이사이를 걸어 다니며 미술사에 길이길이 남은 작품들을 관람했다. 언제든 다시 방문할 수 있다는 마음이 좋았다. 유명한 작품만 점 찍듯 보기보다, 사람들이 잘 찾지 않는 관들을 홀로 거니는 여유를 만끽했다. 작품을 보다보다 너무 많이 걷고, 끊임없이 생각을 해서 지치는 감각이 좋았다.

퐁피두 센터에서는 좋아하는 현대미술을 마음 내키는 대로 즐기고 경험했다. 거대한 규모, 거친 표현, 모호한 메시지들이 좋았다. 지하의 어지러운 배관과 튜브를 보는 듯한 건물의 외관을 보는 게 좋았다. 퐁피두 센터는 하나의 커다란 현대예술 작품 같았다. 무엇보다 파리에서 가장 트렌디하고, 힙한 마레 지구의 중심에 퐁피두 센터가 빛을 밝히고 있다는 점이 가장 좋았다.

수많은 미술관에서 시간을 보내면서, 파리라는 도시에 대해 생각했다. 파리는 예술과 일상생활이 하나를 이루고 있었다. 예술은 여유가 있을 때 즐길 수 있는 것, 교양 있는 사람들의 것이라는 오래된 고정관념이 그곳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파리 사람들은 예술이 주는 기쁨과 위로, 다양한 감정과 에너지를 공유하고 있었다.
 
 
 
파리에서 만난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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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에 흠뻑 취할 수 있어 좋은 시간이었다. 하지만 예술만이 파리에서의 시간을 특별하게 만든 것은 아니었다. 낯을 많이 가리는 나로서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지만, 그곳에서 아주 중요한 사람들을 만났다.

예술을 좋아하는 마음으로 파리를 선택한 사람들이었기에 마음이 잘 맞았다. 전시회와 아트페어, 카니발 소식을 공유하고 함께 가보자고 조심스레 묻는 것이 시작이었다. 미술관 속 작품들이 그토록 좋았던 것은 나란히 서서 작품을 바라보고, 이야기 나눌 수 있는 그 사람들 덕이었다.

그래서 파리에서 가장 소중하고 행복했던 기억은 사람들과 함께했던 순간이다. 센 강 앞에 편하게 앉아 나무 위에 음식들을 올려놓고 이야기를 나누던 저녁. 값싼 와인과 집에서 챙겨온 딸기와 과자, 별다를 게 없는 것들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완벽했다. 낮에 본 전시에 대해서, 음악에 대해서, 우리 앞에 놓인 불안한 삶에 대해서 마음 편히 이야기를 나눴다. 그때 강가를 스치던 바람, 그리고 이 사람들을 오래도록 사랑하게 될 것이라는 마음은 선명히 남아있다.
 
 
 
돌아오는 길

 
행복한 시간은 유달리 빠르게 흐른다. 시간은 붙잡으려 할수록 달아났고, 어느덧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그렇게 다시 나의 고향, 서울에 돌아왔다. 하지만 나의 마음은 여전히 파리에 둔 채, 몸만 집에 도착한 느낌이었다.

강렬하게 행복한 기억은 큰 상실감을 남겼다. 주말마다 웃음소리가 흐르는 파리의 골목을 지날 때마다 나는 영원히 이곳에 속할 수 없는 이방인이라고 생각했다. 그 생각이 현실로 다가온 순간이었다.

파리에서의 생활이 어땠는지 묻는 질문에 괜히 심술이 났다.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아름다운 그때 그 시절'로 남는다는 게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차라리 가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속상하지 않았을 텐데 괜한 후회를 하기도 했다.

돌아온 날들을 세어 보면서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리움이 더 커지니까, 파리에서 찍은 사진과 영상을 일부러 찾아보지 않았다. 학교와 일에 치여서 너무 지친 새벽에만 가끔씩 꺼내 보았다. 그런 날은 인생에 다신 오지 않을 거야, 슬픈 마음이 들었다.
 
 
 
이제는 행복한 기억을 매듭지을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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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알아주지 못할 억울한 마음을 누르며 살아도, 시간은 흘렀다. 파리에 대해 전처럼 자주 생각하지도, 애달픈 마음이 들지도 않게 되었다.

오랜만에 파리에서 함께했던 친구들을 만났다. 밝은 초저녁에 만나 맥주 한 잔을 시작하니, 어느덧 어둑한 밤이 되었다. 여름날에도 술에는 국물이지, 뜨끈한 어묵탕을 앞에 두고 소맥 잔을 기울였다.

어김없이 파리 이야기가 나왔다. 친구는 그때 찍은 사진들을 열심히 보여주면서 즐겁고, 행복하고, 아쉽고, 속상했던 그 시절 이야기들을 불러왔다. 그런데 참 놀라운 일이었다. 더는 지난 파리의 시간을 생각하는 게 슬프거나 허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마음이 따뜻하게 채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문득, 나의 파리 에피소드는 이렇게 잘 마무리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이야기는 끝을 맺었고, 나는 자연스럽게 다음 에피소드를 이어가고 있었다. 어떤 기억들은 감정을 되짚어보고, 잘 정리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이 들기도 했다.

다시 파리에 간다면 그날의 나는 2018년의 나와 다를 것이다. 다른 생각을 하고, 다른 감정을 느끼고, 다른 하루를 보낼 것이다. 하지만 과거의 파리도, 언젠가 다가올 그날의 파리도 한 편의 에피소드로 내 삶에 스며들 것임을 이제는 안다.

식은 어묵탕 앞에서 나는 오히려 행복한 마음이 들었다. 그 시절의 애틋함과 치열했던 마음을 나누고, 이해받을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에 행복했다.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어도, 그 시간을 함께 걸었던 사람들은 여전히 내 곁에 있었다.

그렇게 나는 내 생에 가장 행복했던 기억을 잘 매듭지었다. 그 과정이 쉽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이제 또 다른 행복, 그리고 그에 뒤따르는 과정까지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다. 한번 해보았으니 더 잘 해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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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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