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다른 누구도 아닌, 앨리스 달튼 브라운이다 - 앨리스 달튼 브라운, 빛이 머무는 자리 [전시]

액자에 담긴 그림이 바다 크기로 커지는 기적
글 입력 2021.08.16 0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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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 다 빈치, 피카소도 아니고, 앨리스 달튼 브라운? 필자는 학생 시절 미술사 동아리를 했었지만, 벌써 9년이나 지난 일이다. 현대미술 마니아가 아니라면 쉽게 들어봤을 이름은 확실히 아니다.


역사에 한 획을 그은 미술가의 전시가 아니니 한산하고 조용할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입구부터 가족과 연인, 아이의 시끌시끌한 수다 소리가 들렸다. 여기 있는 그 누구도 앨리스 달튼 브라운이 누구인지 모를 텐데, 전시 소식을 어떻게 알고 왔지? 아, 먼저 세상을 살다 간 유명한 미술가도 생전에 했을 개인전은 분명 이렇게 대중에게 생소했을 것이다. 그들의 전시도 여타 전시처럼 어느 미술관 한편을 차지하고 있었을 테고, 여유로운 주말을 즐기는 사람들의 배경이 되어 차근차근 기억되고 평가를 받았겠지.


화가의 이름을 처음 들어본 사람이라도, 커튼 뒤로 시원하게 뻗은 호수와 포말이 가득한 쪽빛 바다가 그려진 그림이 낯설지는 않을 것이다. 과연 현실에는 존재할까 싶을 정도로 영롱한 물빛. 벽에 걸린 액자를 한 걸음 더 떨어져서 바라보면 액자의 크기보다 훨씬 거대한 호수가 펼쳐지는 착각마저 든다.


이것이 진정한 그림을 감상하는 방법이 아닐까. 유명한 사람임을 알고 그림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림에 흠뻑 빠져 온몸으로 느끼고 겨우 빠져나온 뒤에 작가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지는 것. 소설 ‘호밀밭의 파수꾼’에서 주인공 콜필드가 ‘좋은 소설은 마지막 책장을 덮고 난 후 소설가를 만나보고 싶은 마음이 드는 책’이라고 말했던 것처럼. 역시 화가는 그림으로 말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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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타카에서 청소년기를 보낸 앨리스 달튼 브라운은 세밀한 유화 작업을 토대로 자연 소재와 인공 소재를 대비하는 그림을 주로 그렸다. 소호 갤러리의 포토리얼리즘에서 영감을 받아 극사실주의로 노선을 전환한 그는 80년대에는 내부와 외부의 경계에 집중하였고, 90년대에는 내부에서 외부로 시선이 옮겨가는 묘사에 치중했다. 2000년대부터는 가상 세계를 그가 봤던 기존의 풍경과 접목하여 새로운 세계를 창조해내는 작업을 했다.


책 ‘발칙한 예술가들’에서 지은이 윌 곰퍼츠는 ‘예술 학교는 무엇을 생각할지 가르치지 않는다. 어떻게 생각할지를 가르친다’라고 한 바 있다. 실제로 그림을 보면 미술로 학사 학위를 받지 않은 앨리스 달튼 브라운이 미술을 시작하며 그린 그림에는 대상을 어떻게 표현할지를 고민한 흔적이 엿보인다. 미술관 초입에 보이는 ‘어린아이의 장난감 블록과 스크린’, ‘나무 그림자와 계단’이 이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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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들에는 주로 수직, 수평선이 사용되었는데, 햇볕이 내리쬐는 방향에 따라 생기는 그림자, 그리고 그 그림자가 주변 빛의 영향을 받아 미세하게 달라지는 것까지 확인할 수 있다. 마치 영화감독이 원하는 장면을 촬영하기 위해 조명을 설치하듯, 앨리스 달튼 브라운은 광원을 이리저리 다양하게 조절하며 물체와 이루는 조화를 끊임없이 탐구했다.

 

 
성인이 되어서야 돌이켜보니 이타카는 도시 자체로서 의미가 있었다. 이타카는 지리적 위치 때문에 항상 흐리다. 그래서 이따금 비치는 따사로운 햇살이 더욱 소중하고 특별하다. 이타카의 태양은 구름 사이로 오후에야 가장 밝게 빛나는데, 그 금빛 햇살로 긴 그림자가 드리울 때가 가장 아름답다.
 


고향 집에서 드문드문 고개를 내밀던 태양 빛에 대한 동경 때문이었을까? 이후 그의 작품에는 강렬한 태양, 그리고 그가 잠깐씩 머물렀던 원색의 페인트로 칠해진 집이 등장한다. 이와 동시에 그림 그 자체가 계절감을 듬뿍 머금은 채, 전시장에 서 있는 관객이 집 현관에 있다고 착각할 정도의 너른 공간감을 선사한다.


관객은 왜 그의 그림 속을 거닐게 되는 것일까? 아무리 사진처럼 묘사가 되어 있다고 해도 화가의 손에서 그림으로 옮겨지는 순간 화가의 의도가 반영되므로 우리가 직접 눈으로 봤을 때의 풍경, 즉 ‘사실’과는 거리가 있을 텐데 말이다. 어린이들의 마법 세계와 어른들의 자극으로 점철된 세계가 아닌, 우리 모두가 꿈꾸는 ‘환상의 세계’를 구성하는 조건들을 알맞게 구성하고 적절한 색을 선정했다고밖에 말할 수 없을 것이다.


필자는 거대한 그림의 왼쪽 위부터 오른쪽 아래까지 훑으면서, 그림 단 한쪽도 허투루 그리지 않으려고 노력한, 오래 들였을 화가의 단단한 공(功)을 느꼈다. 화가의 인내심은 이전까지만 해도 그림을 감상하기보다 분석하기에 바빴던 필자를 끝내 무너뜨리고 말았다. 지금 저런 곳에 있지 않아서, 액자 저편에 펼쳐져 있는 세상으로 당장이라도 달려가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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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소리가 들리는 다음 섹션으로 걸음을 옮기면 삼면의 벽에 걸쳐 바다가 펼쳐져 있다. ‘정적인 순간’, ‘설렘’, ‘차오르는 빛’은 화가가 한국 관객을 위해 그린 세 점의 연작이다. 감상에 도움이 되라고 틀어놓았을 물소리는 개인적으로 사족이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눈으로만 그림을 봐도, 분명히 귀나 코가 뻥 뚫리는 기분을 느낄 것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바닷가에 가면 수평선 끝자락까지 시야를 뻗어 넓디넓은 바다를 담아가려고 한다. 그런데 이 그림에서는 화가가 의도적으로 달아 놓은 커튼, 바다가 제힘을 못 이겨 새하얗게 부서지는 거품 때문에 근경에 집중하게 된다. 동시에 중앙의 수평선까지 눈에 들어오며 전시장이 갑자기 확 넓어지는 느낌이 든다. 커튼이 관객 쪽으로 날리며 훅 바닷바람이 들어온다. 전시장 안 에어컨의 냉기가 바닷바람 같았다. 영화 ‘위대한 개츠비’의 초반부에 등장하는, 바람에 커튼이 휘날리는 장면이 떠오른다.

 


미술관을 나오며 문득, 매일 내가 무엇을 보며 사는지를 돌아보았다. 우리는 산과 바다, 꽃을 얼마나 보고 살아갈까? 버스나 지하철 속에서 창문으로 한정된 조그마한 프레임을 통해, 지나다니는 차와 사람과 건물, 모두 사람이 만든 것만 본다. 밖을 보면 그나마 다행이다. 대부분의 시간은 휴대폰을 통해, 손이 가는 대로 누르면 톡톡 튀어나오는 정보를 머리에 집어넣는다. 머리와 마음은 쉴 틈이 없다.


직접 가기 힘들다면 사진이라도, 사진 찍을 시간마저 없다면 그림이라도 자주 감상해야 할 필요성은 여기에 있는 것 같다. 4차 대유행 때문에 휴가도 포기했는데, 그림을 통해 짧지만 알찬 휴가를 보냈다. 미술관의 처음부터 끝까지 그의 이야기를 따라가면서,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구축하기 위해 인고의 시간을 견뎠을 화가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리하여 관객 (적어도) 한 명의 마음을 움직이는 데 성공한 그에게, 이 글의 맨 첫 문장을 변주한 마지막 문장을 선물하고 싶다.


그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도, 피카소도 아니다. ‘앨리스 달튼 브라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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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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