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애니메이션 '보편적인 삶'을 보고 - 지구가 재미있는 이유는 우리가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영화]

글 입력 2021.08.12 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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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요한 기준과 필요 없는 기준.


 

널리 쓰이는 어떤 기준이 있다는 것은 우리를 편리하게 만든다. 예를 들어 어린이보호구역에서는 시속 30km를 초과해서는 안 된다. 화장실에 사람이 밀릴 때에는 한 줄서기로 차례를 기다린다. 이렇게 법으로 규정되어 있거나 암묵적 규칙이 있다.

 

그러나 절대로 어떠한 기준을 내밀어서는 안 되는 것이 있다. 바로 인생이다.

 

 

초등학교 꿈 수정.jpg

 

 

어린 시절, 나는 새에 관심이 있었다. 점심시간이 끝나기 전에 도서관으로 달려가 새에 대한 책을 보았고, 주말이면 마루에 앉아 새를 구경했다. 새에 대한 흥미는 새처럼 하늘을 나는 파일럿, 새를 사진으로 소장하는 사진작가를 꿈꾸게 했다.

 

생각해보면 나뿐만이 아닌 친구들도 다양한 자신의 미래를 상상했다. 과거 속 우리의 미래는 다채로웠다. 어린 나이었지만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싶은지 명확했고, 어떤 모습이든 미래의 내 모습을 마음껏 상상했다.

 

 

 

컨베이어벨트 위, 우리의 삶


 

애니메이션 <보편적인 삶>은 나에게 공포였다. 우선, ‘보편적인’과 ‘삶’이 한 단어로 붙어 있는 형태가 이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에 수많은 사람의 삶이 존재한다. 셀 수 없이 많은 삶이 ‘보편적인’의 꾸밈을 받으면서 하나의 삶으로 구속되었다.

 

작품의 시작은 아이가 등장한다. 아이는 순수한 눈빛을 가지고 있지만, 누군가에 의해 가면을 쓰게 되었고 그렇게 어린 눈빛은 사라졌다. 아이는 컨베이어벨트 위에 앉아 있다. 아이와 컨베이어벨트.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다.

 

그러나 곧 둘은 세상 어느 것보다 잘 어울리는 한 쌍이 된다. 컨베이어벨트가 그 아이가 살아갈 인생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의지 없이 한 방향으로 움직이는 컨베이어벨트는 ‘보편적인 삶’으로 인도한다.

 

 

보편적인 삶2 수정.jpg

 

 

우리는 컨베이어벨트 위에 살고 있다. 어릴 적 상상했던 나의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어른에게 의사, 교사, 판사처럼 사짜 직업, 연금 나오는 공무원이 좋다는 말을 귀에 딱지 앉게 들었다. 사짜 직업과 공무원이 되기 위해서는 공부가 답이었고, 답을 실행하기 위한 공간인 학교에서는 공부 잘하는 아이가 착한 학생, 공부 못하는 아이는 나쁜 학생으로 나누었다. 우리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잘하는지 다양한 선택지를 주지 않고 연필만 쥐게 했다.

 

나는 기숙사형 고등학교에 다녔다. 진로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시기가 찾아오면서 미래에 대한 고민으로 가득한 날들이었다. 깊은 고민 끝에 나는 영상을 하고 싶었고, 이따금 야자시간을 빌려 촬영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계획은 쉽지 않았다. 기숙사 사감 선생님은 나에게 필요한 것은 영상을 찍는 게 아니고 공부라고 다그치셨다. 영상을 촬영하는 것은 나에게 공부였다. 카메라 다루는 법,  보기 좋은 구도를 공부하려 했다. 사감 선생님이 생각하는 공부와 내가 생각하는 공부의 정의는 달랐다. 사감 선생님께 공부는 대학 입시를 위한 도구였다.

 

아이가 올랄탄 컨베이어벨트를 사이에 두고 곳곳에 문들이 있다. 어디로 향하는 문인지, 열면 무엇이 있을지 기대하지 않아야 한다. 아이에게 열린 문은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첫 번째 문에서 책을 받고 두 번째, 세 번째 문에서는 책에 둘러싸여 책상 앞에 고개를 숙이고 있다. 그렇게 공부로 삶의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 아이는 회사원이 되었다.

 

컨베이어벨트를 따라 살던 회사원은 먼 곳에서 갑자기 열린 문을 발견하고 그곳을 향해 뛴다. 문을 열고 발견한 것은 공중에 떠 있는 수많은 가면이다. 드디어 회사원의 가면도 벗겨지지만 가면 뒤에 있던 어린 시절의 눈빛 없이 텅 비어있었다. 그 순간 가면은 처음과 달리 스스로 쓰게 된다. 빈 공간이 되어버린 자신의 얼굴을 숨기기 위한 용도로 사용하는 것이다. 가면을 오랫동안 쓰고 있다 보니 가면이 곧 나의 얼굴이 되어버린 것이다.

 

얼굴이 공허했다. 얼굴을 잃어버린 것은 개인의 가치관, 정체성을 잃어버린 것과 같다. 주어진 삶을 살았지만 사실 그는 살지 않았다. 죽어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가면을 쓴 그는 몰랐을 것이다. 모든 치아가 보이게 활짝 웃는 모습의 가면을 쓰고 자신의 모습을 한 번도 마주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가면의 의미가 가장 무서웠다. 마음의 소리를 듣지 못한 채 가면 위한 감정으로만 살아가는 모습이 두렵게 다가왔다. 또한 보편적인 것이 행복의 잣대라는 것을 가면으로 나타냈다는 점, 모두가 일반적인 삶을 살면서 같은 표정으로 항상 웃고 있는 사회가 소름 끼쳤다.

 

 

 

내리 사랑, 내리 가면.


 

보편적인 삶 메인.jpg

 

 

놀라운 점은 가면으로 표정을 잃은 기성세대는 자라는 어린아이에게 고스란히 가면을 씌운다는 것이다.

 

자신을 비롯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길을 선택했기때문에 하나의 가면이 다른 가면을 낳는다. 우리는 왜 자신의 얼굴을 잃어버릴 때까지 가면을 벗어 던지지 못했겠느냐라는 후회의 의문이 든다. 먼 과거부터 현재까지 어른이 아이에게 가면을 물려줬기 때문이다. 아이는 어른에게 세상을 배우기 때문에 아이는 삶에 대해서 듣는 입장이다. 그렇게 기성세대의 보편적 삶을 습득하게 된다. 그러나 어른의 잘못이 아니다. 어른도 아이 시절이 있기 때문이다.

 

이 빠져나오기 힘든 굴레를 작품에서는 시작과 끝이 어린아이의 등장으로 보여준다. 수미쌍관의 형식으로 작품의 메시지를 더욱 명확하게 전달하고 있다. 또한 애니메이션을 끝이 났지만 어디선가 또 가면을 쓸 아이가 머릿속에 그려졌다. 안타까움만 남는다.

 

 

 

지구가 재미있는 이유는 우리가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스스로 생활 속에서 모든 사람이 하나의 길로 걸어가는 것이 느껴졌었는데 애니메이션으로 접하니 암담한 세상 속에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사회를 보여주기에 4분 39초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한 가지 색으로 통일된 세상이 다시 빨간색, 노란색, 파란색으로 다채롭게 빛나기를 바란다. 그렇다면 우리의 현재 태도가 중요하다. 남들이 말하는 기준에 나를 가두지 않고, 나만의 속도로 나를 탐구하고 배움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

 

비록 시간이 오래 걸릴지라도 나는 그 사람이 가장 행복하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후회와 원망으로 가득한 보편적인 삶보다 성취와 기쁨으로 가능한 개인적인 삶을 살자. 암담한 굴레 속에서 어렵겠지만 꿈틀거리자.

 

 

 

에디터 황혜민.jpg

 

 

[황혜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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