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꽃이 지는 새로운 이유를 찾아서 [도서/문학]

글 입력 2021.08.13 1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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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땐 성인이 되면 마법처럼 무언가 크게 달라질 줄 알았다. 그러나 현실은 외부로부터의 변화만 있었고, 취할 수 있는 행동반경이 넓어진 것 말곤 없었다. 한층 성숙해진다거나 내면의 성장 따위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나는 그저 나라에서 부여하는 숫자만 달라진 한 사람에 불과했다.

 

과거와 현재의 나를 비교하자면 분명 어딘가 달라졌다. 외적으로나 내적으로나 나름 좋은 방향성을 띠는 큰 변화가 생겼다고 확신한다. 아마 당시에는 눈치채지 못했지만, 성인이 되었을 때도 그 전과의 차이점은 소소하게나마 존재했을 거로 생각한다. 이렇듯 나는 ‘어른’의 틀에 알맞게 들어가기 위해 조금 느리더라도 변화하고 진화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내 머릿속의 '어른'은 어떤 이미지길래 이러한 변화에 집착해온 걸까. 아마도 나는 어른의 기준이 되는 명확한 숫자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무의식적으로 ‘30대’를 떠올리고 있었던 것 같다. 그때쯤이 되면 번듯한 직장인이 되어 제 앞가림 정도는 확실히 할 수 있는,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그런 멋진 사람이 되어 있을 거로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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칙릿 소설의 대표작답게 주인공 은수가 일과 결혼, 인간관계에서 겪는 혼란에 관한 이야기다. ‘30대 초반 미혼 여성’이라는 타이틀을 가진 은수는 모든 게 평범했다. 인생도, 가족도, 외모도, 성격도, 인간관계도. 별 탈 없이 굴러가던 시간이 사회가 규정한 ‘나이’라는 장벽을 만나면서, 은수는 이제껏 크게 개의치 않아 했던 결혼을 현재 자신이 이루어야 할 과제로 지정했다. 은수의 결혼 후보는 총 세 명, 태오, 영수, 유준이다.

 

태오는 술자리에서 우연히 만난 하룻밤 상대에서 연인으로 발전한 7살 연하남이다.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은수를 진심으로 사랑했지만, 은수의 입장에서는 현실과 타협하며 살아가는 자신과 달리 이상을 좇으며 살아가는 태오에게 미래를 마음 놓고 맡길 수는 없는 처지였다. 영수는 직장 상사가 주선한 소개팅 상대였다. 그는 작은 회사를 운영하는 CEO로 미래를 보장할 순 있지만, 모든 게 보통인 사람이었다. 크게 모난 구석이 하나도 없는 만큼 한 방의 매력도 없었고, 서로에게 향한 마음마저 보통의 보통이었다. 유준은 은수의 친구인 유희의 사촌으로 은수와도 오랜 기간 친구인 상대다. 집안이 부유한 덕에 속 편한 백수로 살던 유준이 어느 날 자신과 같이 사는 게 어떻냐는 제의를 하면서부터 자연스레 후보에 들게 되었다.

 

은수는 이 세 명이 만든 삼각형 안에 들어가 자신이 정한 조건에 부합하는 남자를 찾기 위해 계산하기도 하고, 마음 가는 대로 행동하기도 한다. 자신과 세 명의 남자들의 관계만으로도 벅차게 살아가던 와중 30년간 무사고였던 가정사에 접촉사고가 발생하고, 친구인 재인과 유희의 예기치 못한 행보로 자신을 돌아보기도 하고, 개미처럼 일하던 회사에 사직서를 내며 졸지에 백수가 되기도 한다. 이 과정 속에서 은수가 느끼는 혼란과 자신의 선택이 불러일으키는 결과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있다.

 

 

 

‘3’이 주는 무게


 

2006년도에 출간한 흔적이 군데군데 묻어있다. 퇴근 후 돌아와 컴퓨터 메신저를 켜 친구와 나누는 채팅, 익숙지 않은 내비게이션의 사용, 하루 빨리 결혼을 성사해야 한다는 가치관 등 Z세대인 나와는 친근하지 않은 사고방식이 통용되던 사회였다. 특히, 비혼 비율이 급증하는 현재와 달리 30대에 진입했다는 이유로 결혼에 100%의 가능성을 열어 두는 행동이 가장 눈에 띄었다. 소개팅한 지 2주 만에 결혼을 준비하는 재인과 삶이 무료하다는 이유로 결혼이라는 자극제를 일시적으로 인생의 목표로 삼았던 은수까지, 그 당시 ‘3’이라는 숫자는 사람들에게 암묵적으로, 때론 표면적으로 많은 압박을 가하고 있었다. 어쩌면 지금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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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털 사이트에 ‘30대 여성’을 검색했을 때 가장 먼저 뜨는 창이다. 은수의 조건에 부합하는 정보를 하나라도 더 수집하고자 검색했을 뿐인데, 이러한 광고를 줄줄이 마주하게 돼 적잖이 놀랐다. 2006년과 2021년 사이에 존재하는 15년이라는 긴 시간은 사회적인 여러 관념들을 바꾸어 놓긴 했지만, 여전히 깊이 고정된 많은 것들로 인해 그사이 간극은 더 넓혀지지 않고 한계점에 도달하고 만다. 기존 관습에 따른 정보들이 실제로 누군가에게는 큰 도움으로 닿을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긴 하지만, 유입을 위한 검색어 선정은 조금 더 고찰해야 하는 부분이지 않나 싶다. 이제는 30대라는 이유로 자발적으로 삶의 목표를 결혼에 맞추어 살아가는 사람은 많지 않으니 말이다.

   

 

옳은 일과, 옳지 않은 일을 판단하는 기준이 점점 모호해져만 간다. 25세의 여자를 부러워하는 건 탱탱한 피부 때문이 아니다. 내 질투의 이유는, 그녀의 무모한 용기가 수틀리면 쉽게 손 털고 첨부터 새로 시작할 수 있는 자의 자신감에서 비롯되었을지도 모른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59p

 

재인과 유희는 미친 게 아니다. 재인은 재인대로, 유희는 유희대로 자기만의 길을 쉼 없이 찾아가고 있는 거다. 오직 나만 조그만 웅덩이의 썩은 물처럼 이 자리에 멈춰 있다는 자괴감이 쉬이 가시지 않았다. -73p

 

20대 후반을 지나오면서부터 종종 ‘이미 너무 많은 것들을 알아버렸어’라는 탄식을 뱉어내게 되곤 한다. 세상의 숨겨진 이치들을 이미 다 꿰뚫어버린 것 같지만, 실상 곰곰이 따져보면 내가 몸으로 직접 겪어낸 것은 별로 없다. 아는 것과 겪는 것 사이에는 분명 엄청난 간격이 가로놓여 있다. -101p

 


나이의 앞자리에 변화가 생기는 순간이 나이가 들어감을 가장 크게 실감할 때가 아닐까 싶다. 20대가 되면서 합법적 성인이 자유로이 취할 수 있는 행동들에, 30대가 되면서 사회적 신분의 변화가 가져다주는 냉정한 사회의 현실에, 40대가 되면서 느끼는 신체적 변화에, 이 모든 것들은 대게 앞자리가 바뀔 때 가장 큰 의미를 두기 마련이다.

 

아직 30대도 경험하지 못한 사회생활 풋내기의 주관적인 의견으로, 이 중 인간이 가장 맞이하기 두려워하는 숫자를 꼽으라고 한다면 단연코 ‘3’일거라 생각한다. 사실상 20살이 되는 순간부터 온전히 내 선택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는 성인임에도 불구하고, 괜스레 30살이 되어야만 막중한 책임감을 가진 진정한 어른이 된 것만 같은 느낌이다. 누구나 어릴 적에 상상했던 30대의 모습이자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30대의 모습만 봐도 그렇다. 부모로부터 완전한 독립을 이루고, 본인 명의로 된 재산 하나쯤은 있고, 통장에는 일정 금액 이상이 쌓여있는, 직장 내 신임을 받는 멋진 직장인.

 

그러나 어깨너머 바라본 실제 30대는 약간의 혼란을 겪는 어른아이 같은 면모가 많이 보였다. 사회가 정해준 계단을 밟아온 사람이 30대가 되어 자신의 삶에 방향을 스스로 정하는 것이, 환경에 자신을 맞추어 살다 30대가 되어서야 스스로 환경을 선택하는 것이, 너무 무탈하게 살아와서 지독한 무료함에 휩싸이는 것이, 어른이라 생각했지만 속에는 아직 여린 아이의 존재가 크게 자리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은수는 급하게 결혼했다가 얼마 안 가 이혼한 재인, 멀쩡히 다니던 회사를 때려치우고 뮤지컬 배우가 되겠다는 유희 사이에서 혼란스러웠다. 같은 나이의 비슷한 친구들이 쉼 없이 길을 개척해 나갈 때, 두려움에 갇혀 스스로 선택하는 법을 잊은 자신에 자괴감을 느꼈다. 31살의 나이가 사회적으로 어린 나이가 아님을 너무도 잘 직시한 나머지 앞으로 가기 위해 발을 떼는 법을 잊어버리고만 탓이다. 아니, 어쩌면 잊어버린 게 아니라 처음부터 방법을 몰랐을지도 모른다. 은수의 삶의 궤적은 어느 하나 모난 곳이 없었으니 말이다. 그 때문에 그들의 선택이 얼마나 무모한지, 무엇을 감내해야 하는지, 얼마나 많은 불확실한 미래가 다가오는지, 전부 알고 있는 은수는 선뜻 그들을 따라가지 못한다. 어쨌거나 20대의 시간과 30대의 시간에는 큰 차이가 있는 건 사실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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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 생각해보면 어느 순간 나는 먼 미래의 모습은 그리지 않았다. 마냥 어릴 땐 성인이 된 모습을 그려본다거나, 가정을 꾸린 모습을 상상해보는 등 기약 없는 시간 뒤편에 있는 미래에 대한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지만, 지금은 마냥 그렇지만은 않다. 당장 있을 내일도 큰 사건이 하나 개입되지 않는 이상 미래를 상상한다거나 기대하지는 않았다. 그렇기에 30대의 내 모습을 상상하는 일은 만무했다.

 

그랬던 내가 처음으로 향후 몇 년간의 계획을 구상한 적이 있었다. 바로 아트인사이트 에디터에 지원하면서이다. 약 6개월이 지났지만, 당시 2029년도까지의 계획을 작성하던 마음가짐과 포부는 여전히 생생히 기억난다. 불과 작년에 30살과 점점 가까워지는 나이에 두려워했던 것이 무색하게도 그때 나는 ‘나의 30대가 기대된다’라는 말을 적었다. 25살의 내가 꿈꾸는 것들이 하나씩 실현되어 만족스러운 20대를 보낸다면 기쁜 마음으로 30살을 환영할 수 있다는 확신이었고, 지금도 변함없다. 만약 미래의 내가 기쁜 마음으로 30살을 맞이한다면 은수가 받았던 ‘3’이 주는 무게를 스스로 덜어내는 법을 알 수 있을 것만도 같다.

 

 

 

어른의 세계


 

 

해마다 어김없이 봄꽃은 피었다 지고, 우리는 여전히 막막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다시 십 년쯤 뒤 우리는 또 어딘가에 모여 꽃이 지는 이유를 추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때는 우리 모두 조금, 아주 조금씩은 달라져 있겠지. 꽃이 지는 새로운 이유를 발견해냈겠지. 그렇게 믿어보기로 한다. -439p

 

 

‘어른’의 기준은 참 모호하다. 성인이 된 순간부터 어른이라기에 20살의 행동은 너무 어리석기만 하고, 사회적 지위를 얻은 순간부터 어른이라기에 모든 사람이 자기 일에 책임을 지는 것도 아니다. 또, 옳은 일과 옳지 않은 일은 판단하는 것에 기준을 두자니 세상엔 옳지 않은 일을 선택하는 사회적 지위를 갖춘 사람이 훨씬 많지 않은가.

 

표면적으로는 분명 나도 어른에 속하는데, 여전히 그 기준을 잘 모르겠다. 하나 확실히 아는 것은 어른에 가까워질수록 겁이 많아진다는 것. 시간이 흐르면서 약점은 늘어나고 겁은 많아진다. 모든 게 조심스러워지고, 도전을 두려워하고, 변화를 무서워하고, 모든 결정에 계산이 따른다. 은수의 행동에서 우리는 자신을 투영시킬 수 있다. 발전은 없지만 안전한 회사에서 벗어나는 걸 두려워하고, 결혼은 현실이기에 세 남자 사이에서 이리저리 재고 따졌던 것들, 이 모든 건 아는 게 많아질수록 겁이 늘어남에 따른 정당한 행동이었다. 은수의 계산된 행동을 마음껏 비난할 수 없었던 이유는 지극히 현실이었기 때문이다.

 

 
저지르는 일마다 하나하나 의미를 붙이고, 자책감에 부르르 몸을 떨고, 실수였다며 깊이 반성하고, 자기발전의 주춧돌로 삼고. 그런 것들이 성숙한 인간의 태도라면, 미안하지만, 어른 따위는 영원히 되고 싶지 않다. -43p
 

 

어린이는 타인의 문제 해결보다 자신이 하고자 하는 걸 더 중요시한다. 그러나 성인은 타인의 문제 해결에는 참견이라는 탁월한 능력을 보이면서 정작 자신이 하고자 하는 건 전혀 알지 못한다. 참고로 그렇다고 해서 타인의 문제 해결 역시 뛰어나게 잘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자신의 세계를 기준으로 만들어진 편협한 사고방식이 참견으로 전환되어 표출된 것뿐이다.

 

사람들은 어릴 때 힘든 일을 많이 겪다 보면 또래보다 일찍 철든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고 한다. 많은 풍파 속에서 스스로 길을 개척해나가는 과정 덕분에 일찍이 어른이 될 수 있었다고. 길을 만들며 좌절하고, 반성하고, 이 모든 고난과 역경을 성장의 발판으로 삼아왔던 것이 성숙한 인간의 태도를 만들었다고 말한다.

 

나는 과거와 현재를 비교하며 일종의 내적 성장이라 불리는 것이 전부 좋은 방향으로 형성된 거라 믿어왔다. 좋은 것이라 믿은 게 실은 편협한 사고방식을 내 맘대로 넓은 세계에 맞췄던 것이고, 하나의 풍파를 이겨내면 한층 더 성숙해진다는 말은 앞으로 겪을 일이 무수히 많이 남았다는 말과도 같았다. 그러니까, ‘어른’이라 불리는 것에 나는 아직 한참 모자란 사람이고 우리 사이의 거리는 너무도 멀다.

   

우리가 가까워지기 위한 노력이 넓은 세계에 걸맞은 확장된 사고방식을 반드시 키워야만 하고, 더 큰 풍파와 맞서야만 하고, 이 모든 것들을 자기 발전의 주춧돌로 삼아 매 순간 신중히 살아가야 하는 거라면, 은수와 마찬가지로 어른 따위는 영원히 되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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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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