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그녀는 조명등 아래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문학]

2021 제12회 젊은작가상 대상 수상작을 읽으며
글 입력 2021.08.12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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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부터 세계를 휩쓴 ‘미투 운동’은 한국 예술계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용기 있는 이들의 증언을 통하여 그간 예술이라는 포장지에 감추어졌던 권력자들의 범죄가 대중에게 알려졌을 때, 우리는 분노하고 통곡하고 각성했다. 진정 형언할 수 없는 일들의 연속이었다.

 

다시는 예술계 내부에서 권력형 성범죄와 가스라이팅 행위가 벌어지지 않기를 바라는 예술가들은 자성의 목소리를 높였고, 그동안 대항할 수 없던 힘에 맞서기 시작했다.

 

예술계에서의 능력은 곧 권위다. 그렇기에 출중한 능력을 뽐내는 예술가의 권위란 미투 운동이 촉발되기 전까지는 절대 상대할 수 없던 엄청난 무언가였을 것이다. 심할 때는 권위를 가진 예술가의 애정 어린 관심이 훈장처럼 여겨지는 그릇된 풍토가 있었을 것으로 짐작한다.

 

나의 지인도 이윤택 연출이 수장으로 있던 ‘연희단 거리패’(패거리라 불러도 시원치 않을 그 집단)에 들어갈 뻔한 적이 있었다면서, 극단에 들어가려면 밀양 연극촌에서 합숙해야만 한다는 조건에 느낌이 싸하여 제안을 거절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고 나니 그간 일어났던 성범죄들이 남의 일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예술을 한다는 이유만으로 내 주변의 누군가 또한 위험에 빠질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뿌리부터 썩어들어간 한국 예술계의 현재를 적나라하게 뒤집어 고쳐야 한다는 결심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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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시대가 바뀌고 있다. 젊은 작가들이 손수 작품을 써 내려가며 예술로 망가진 세상을 예술로 고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특히 올해 제12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은 문학사의 흐름이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 잘 보여준다. 수상작을 집필한 작가 전원이 여성이라는 점도 눈여겨볼 점이다.

 

내 기준으로 ‘잘 쓰인 소설’은 읽기에 재밌고 곰곰이 생각할 거리를 던져줌은 물론이며,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의 각도를 단 1도라도 변화시킬 수 있는 글이다. 당연히 모든 소설이 사회를 향한 격렬한 비판 내지는 정치적 메시지를 담아야만 하는 것은 아니지만, 한 편의 소설에서 태동한 의지적 판단이 독자의 흔들리는 마음을 붙잡는다면 이는 칭찬받기에 마땅하다.

 

위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이번 젊은 작가상 대상에 자리에 오른 전하영 작가의 <그녀는 조명등 아래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는 잘 쓰인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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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하영 작가

 

 

이 소설 속의 주인공 ‘나’는 연구소에서 일한다. 직급이 낮고, 혼자 여자인 그는 이공계열의 유부남 박사들 사이에서 일하며 “악의 없는 무례함”(12쪽)에서 비롯된 무례한 언어를 견딘다. 그러나 단조로운 일상 속에서도 수려한 외모를 가진 유부남 연구자와 농담을 주고받으며 무료함을 극복한다.

 

그러던 중, 유부남 연구자는 ‘나’에게 “스물한 살짜리를 유혹하는 건 정말 쉬운 일이에요.”(13쪽)라고 고백한다. 그 말을 들은 ‘나’는 옛 기억 속에 묻어두었던 한 인물을 떠올린다. 그는 ‘나’가 스물을 넘나들던 시절에 만났던 삼십 중반의 남자, 장 피에르다. 시간을 건너 비슷한 모습의 기억이 연결되는 순간이다.

 

장 피에르는 ‘나’가 다니던 대학에 신임 강사로 취직하여 미디어 관련 교양 과목을 담당했던 젊은 교수였다.

 

군사 독재 정권에 저항했던, 소위 말하는 열혈 운동권에 속했던 장 피에르는 대학에서도 권위를 가진 교수와 맞서 싸우기로 유명했다. 그가 진행했던 수업 또한 자유분방한 세미나형이었고, 그는 학생들에게 쉽게 이해할 수 없는(관념적이며 정치적인) 영화를 보여주며 수업을 진행했다.

 

장 피에르는 심사에 뒤틀리는 일에는 어김없이 저항했고, 학생들과도 스스럼없이 사적인 술자리를 즐겼다. 어딘가 부족한 듯 건드리면 무너질 듯 위태로운 모습을 지녔으면서도 훤칠한 외모를 지닌 그는 학생들에게 독특하면서도 비범한 인물로 각인된다. 그것이 강원도 출신의 토종 한국인인 그가 이국적 별명을 얻게 된 계기였다.

 

여기까지만 생각해보면 장 피에르의 탈권위주의적 행보는 별다른 문제가 없어 보인다. 오히려 남들과 다른 예술가의 면모를 보인다고 착각하기에도 쉽다. 그러나 어긋난 신념에서 시작된 위협은 차곡차곡 쌓여 ‘나’의 삶을 조금씩 변화하게 만든다.

 

‘나’는 친구 ‘연수’와 함께 프랑스 파리로 여행을 떠난다. 그곳에서 만난 장 피에르는 연수에게 성적 욕망을 느끼며 술을 마시면 “연수의 무릎과 허벅지 쪽에 손을 가져다대는 방식으로 기쁨을 표현”(25쪽)한다.

 

스승이 제자를 성적 대상화하여 욕정을 표출하는 방식, 나아가 자신의 공허함을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한 인간의 존엄을 파괴하는 행위가 단단히 잘못되었다는 판단은 제삼자로서는 쉽게 내릴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왜곡된 시선으로 바라보며 오히려 연수를 동경하고 남모를 질투심을 느낀다.

 

20대 초반의 ‘나’와 ‘연수’는 마치 사방이 막힌 방에 들어간 것처럼, 시공간을 명확히 인지하는 판단 능력이 흐려진 채 장 피에르의 위계에 눌려있었다. 이는 명백한 가스라이팅이다. 피해자가 자신의 주체성을 잃게 만드는 끔찍한 행위 말이다.

 

소설의 말미에도 등장하는 내용이지만, 연수의 살갗을 만지던 장 피에르의 성폭력은 십 년이 넘도록 이어지다가 용기 있는 학생의 발언으로 세상에 알려진다. 폭풍처럼 일어난 파문은 장 피에르에게 처벌과 참회의 기회를 주기에 마땅했지만, 나이를 먹어서도 자기연민을 잃지 못한 그는 자신의 신변을 보호해줄 수 있는 이들의 도움을 받으려 한다.

 

진실을 수면에 띄운 학생에게도 박수를 보냄과 동시에, 우리는 어둠에 감추어진 십수 년의 시절에도 집중하여 질문을 던져야 한다. 어떻게 이 시간 동안 아무도 도움을 요청할 수 없던 걸까. 아무도 도움을 주지 않았던 걸까. 우리는 이러한 범죄를 어떻게 막을 수 있는 걸까.

 

마지막으로 놓쳐서는 안 될 단계는 상처 입은 자들의 충분한 회복이다. ‘나’와 ‘연수’는 오랜만에 만나 주체성을 정립할 수 있는 대화를 나눈다. 그것이 비록 많은 시간이 지난 이후였음에도 그들은 힘을 잃지 않는다. “그래도 그녀는 여전히 아름다웠고, 나는 나대로 내 처지를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우리 모두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각자의 굴욕을 꿋꿋이 견디며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51쪽)

 

<그녀는 조명등 아래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가 여러모로 탁월한 소설이라고 제대로 느낀 지점은 결말 부분이었다. 깨진 가로등을 바라보며 모양을 잃은 전구에도 불이 들어오는지에 대한 고민을 거듭하던 ‘나’는 “아무도 나를 반기지 않는 곳으로. 나를 길들이는 데에 실패한 거대한 시스템의 세계로”(56쪽) 들어선다. 소설 초반에 등장했던 ‘나’의 근무지, 연구소다.

 

연구소에는 스물한 살짜리 대학생을 유혹하기 쉽다고 여기는 유부남이 있다. 그의 뒤틀린 모습에서 장 피에르를 떠올렸던 ‘나’는, 자신이 스물한 살짜리 여성을 비극에서 구출하는 신화를 써내기로 마음먹는다. “정신이 번뜩 들어서 나는 얼른 그 아이에게 다가가 너보다 나이 많은 남자들의 개수작에 넘어가지 말라는 말을 해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57쪽)

 

그런데, 아뿔싸. 안개꽃 다발을 들고 있던 젊은 여자는 시트러스향 같은 비누 냄새룰 풍기는 또 다른 여자와 만난다. 그렇게 향기를 풍기는 두 사람, 아니 두 여자아이는 ‘나’의 착각을 일깨우고 사고를 전복시킨 채 유유히 자리를 떠난다. 오랜 경험으로 다져진 ‘나’의 관록 또한 이성애자 중심의 연애에서 비롯한 경험에 불과했다는 것을 일깨운다.

   

여기 조명등 아래서 많은 시간을 보낸 사람이 있다. 조명에는 금이 가 있다. 그래도 불은 여전히 들어온다. 다시 조명등 아래서 시간을 보내는 그녀의 빛나는 얼굴을 보아라. 우리는 이 곳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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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남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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