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애러비'에서 발견한 현타의 순간 [도서/문학]

환상에서 현실로 추락하다
글 입력 2021.08.12 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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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블린'


 

총 15편의 단편들로 구성된 <더블린 사람들>은 '더블린'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사실 '더블린'은 아일랜드의 수도이자 작가 '제임스 조이스'의 고향인데,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한다. 제임스 조이스는 이 작품에 수록된 단편들이 더블린이라는 장소를 매개로 하여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강조했다.

 

작품을 집필할 당시, 아일랜드는 오랜 기간 영국의 식민 지배를 받고 있었다. 하지만 아일랜드 국민들은 독립을 위해 서로 힘을 합쳐 영국에 대항하기보다는, 눈앞에 닥친 현실에 인지하지 못하고 내부적 갈등에 처해 있었다. 이러한 시대를 산 제임스 조이스는 더블린을 '마비(paralysis)의 중심지'로 표현했다. 내부 분열로 국가적 비극을 극복하지 못하는 아일랜드가 마비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아일랜드의 수도인 더블린은 아수라장의 한복판에 내팽겨쳐진 곳으로 인식되었다.

 

<더블린 사람들>에는 식민 통치 현실에 무감각한 더블린을 냉소적으로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마비의 고착화'가 공통 주제인 단편 15편 중 14편은 유년기, 청년기, 성년기, 장년기로 구분할 수 있는데, <애러비>는 유년기에 해당한다. 이 글에서는 <애러비>의 소년이 느꼈을 환멸과 현실 자각 타임을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소년의 짝사랑



 

"나는 아침마다 앞쪽 응접실의 바닥에 누워 맹건 누나네 문을 바라보았다. 내 모습을 들키지 않도록 새시에서 3센티미터도 안 되게 블라인드를 내려놓고 말이다. 누나가 문간 층계로 나오면 가슴이 뛰었다."

 

"누나가 우리를 기다릴 때, 삐죽이 열린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불빛에 누나의 몸매가 뚜렷한 윤곽을 짓고 있었다. 누나가 몸을 움직이면 드레스가 펄럭였고 부드럽게 한 줄로 땋아 늘인 머리채가 좌우로 출렁거렸다."

 

 

‘나’로 등장하는 소년은 맹건의 누나를 좋아한다. 그래서 소년의 시선 끝에는 늘 맹건의 누나가 있다. 아침마다 맹건 누나의 방문을 바라보며 그녀가 언제 나올지 노심초사한다. 짝사랑을 들키지 않으려고 블라인드 사이로 빼꼼 눈을 내밀며 맹건 누나를 기다리던 소년은, 그녀가 문간 층계로 나오면 심장이 몸을 뚫고 튀어나올 것처럼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소년이 맹건 누나를 계속 눈으로 좇는 만큼, 그녀에 대한 묘사가 아주 자세하다. 단순히 외모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그녀가 부드럽게 땋아 늘인 머리부터 입은 드레스, 몸의 윤곽까지 맹건 누나의 전체적인 모습을 망라한다. 짝사랑하는 대상을 관심 있게 관찰한 것이 드러난다.


 

"이 소음들은 내 생활에 단 하나뿐인 감흥으로 수렴되어, 내가 한 무리의 적을 뚫고서 성배를 고이 모시고 가는 모습을 상상하게 만들었다. 맹건네 누나의 이름은 나 자신도 이해하지 못하는 이상한 기도와 찬송을 하는 동안 수시로 내 입술로 튀어나왔다. 내 눈에는 종종 눈물이 그렁그렁했고, 때로는 무언가가 심장에서 솟구쳐 가슴속으로 쏟아지는 것 같았다."

 

 

소년이 아주머니가 장 보는 것을 도와주기 위해 시끌벅적한 거리를 지나는 장면이다. 거리에 연신 따가운 욕설과 고함이 오가는데도 이 소음들은 소년의 생활에 단 하나뿐인 감흥으로 수렴된다. 이는 외부의 혼란스러운 상황조차 맹건 누나에 대한 소년의 집중을 방해하지 못함을 보여준다. 모든 감각은 그녀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 생생하게 작동했다.

 

소년의 유일한 감흥은 소년이 한 무리의 적을 뚫고 성배를 고이 모시고 가는 상상으로 확대된다. 이제 소년은 짝사랑을 성스럽고 고귀한 행위로 정의하고 있다. 성배로 묘사된 짝사랑은 길거리에 나뒹구는 소음이 더럽힐 수 없는 고결함으로 승격되었다. '성배를 고이 모신다'는 표현에서 소년이 자신의 짝사랑을 매우 소중히 여기고 있음이 드러난다.

 

소년은 기도와 찬송을 하는 동안 수시로 맹건 누나의 이름을 고백했다. 성배, 기도, 찬송 같은 단어가 등장하는 것을 볼 때, 소년의 짝사랑은 그저 종교적 차원을 넘어서서 속세는 침범할 수 없는 신성한 영역에서 다루어지고 있다. 신을 신실하게 믿게 될 때 큰 깨달음을 얻는 것처럼, 짝사랑이 성스러움으로 승화된 순간 소년은 벅차오름을 경험하게 되었다.

 

 

 

짝사랑, 현실로 추락하다


 

 

“그 깜깜한 속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허영심에 쫓기다 꼴불견이 되고 만 푼수 같은 내 모습에 두 눈이 참담함과 분노로 이글거렸다.”

 

 

소년은 바자회에서 물건을 사다 주겠다고 맹건 누나와 약속했기 때문에 애러비로 향한다. 하지만 도착했을 때 바자는 몇몇 매점을 제외하고 폐점한 상태였다. 소년은 정적만이 가득한 홀을 조심조심 걸어가다가 여자와 남자들이 시시덕거리며 대화를 나누고 있는 한 매점 앞에서 자기 꽃병과 꽃무늬 찻잔 세트를 살펴본다.

 

판매원으로 보이는 여자가 다가와 살 것이 있냐고 물어보지만, 귀찮다는 듯이 심드렁하게 응대하는 것을 보니 의무감에 물어본 눈치이다. 쑥스러움에 없다고 말한 소년의 대답을 듣고 처녀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 청년 둘과 재잘재잘 떠든다.

 

마침내 홀이 칠흑같이 깜깜해졌을 때, 그 속에서 소년은 ‘참담함’과 ‘분노’에 사로잡힌다. 바자의 천박함이 짝사랑하는 상대에게 선물 줄 생각에 들떴던 소년을 ‘허영심에 쫓기다 꼴불견이 되고 만 푼수’로 전락시켰기 때문이다. 소년은 자신의 순수한 마음이 바자에서 형편없고 초라한 것으로 추락했음을 갑작스럽게 깨닫고, 참담함과 분노의 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동시에 소년은 자신이 기대했던 공간이 실제로는 보잘것없고 천박한 장소였음을 확인하고, 애러비에 품었던 기대감이 무참히 깨져버린다. 성역에 이르렀던 소년의 짝사랑은 다시 비천한 현실로 돌아오게 되었다.

 

 

 

현타: 현실 자각 타임


 

국어사전에 '현타'는 '헛된 꿈이나 망상 따위에 빠져 있다가 자기가 처한 실제 상황을 깨닫게 되는 시간'이라고 나와 있다. <애러비>에 나타난 정신적 환멸을 기술하면서, 소년이 자신의 상황에서 느낀 감정이 결국 '현타'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년은 맹건의 누나에게 동방의 신비한 것들로 가득한 '비자'에서 선물을 사다 줄 생각에 마구 들떠있었다. 하지만 막상 도착했을 때, 마주한 비자의 광경은 소년의 설레는 마음을 바닥으로 추락시켰다. 늦게 출발하는 바람에 소년이 맹건의 누나에게 자신의 마음을 표현할 기회는 0%에 수렴하게 되었고, 여자와 남자 두 명 간의 천박한 대화는 소년의 순수한 마음을 비웃을 뿐이었다.

 

소년은 비자에서 산 선물을 맹건의 누나에게 주면서 자신의 감정을 고백할 환상에 젖어있다가, 사실 비자는 형편없고 초라한 곳이라는 현실을 깨닫고 참담함과 분노를 느끼게 된 것이다. 환상에서 현실로 안착한 순간, 그 괴리감은 소년에게 이루말할 수 없는 괴로움과 좌절감을 안겨주었다. 이는 '현타'와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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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지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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