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개념으로 사고하고, 선택으로 완성하다 - 연극 '산책하는 침략자'

글 입력 2021.08.10 1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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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nopsis

 

해안가의 작은 항구 마을.

 

군사적 긴장감이 높아져 매일 같이 미군 기지의 전투기 소리에 불안감이 고조된 그곳에서 3일간 실종되었다 돌아온 남편 '신지'는 아내 '나루미'조차 제대로 알아보지 못한 채 어린아이처럼 변해버린다. 그와 비슷한 시기에 한 할머니가 일가족을 살해하고 자살하는 참혹한 사건이 일어나고, 심지어 마을에선 원인을 알 수 없는 이상한 병이 돌며 환자가 급증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신지는 그저 매일 어슬렁거리며 산책만 하고 있다. 그런 신지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나루미. 그러던 어느 날, 신지는 나루미에게 놀라운 사실을 고백하는데…

 

"실은 나, 외계인이야."

 

 

연극 <산책하는 침략자>가 2년 만에 다시 무대에 올랐다. 이번 공연은 창작집단 LAS와 두산아트센터의 공동기획으로, 이기쁨 연출가의 리드 아래 10인의 배우들과 스태프들이 매력적인 무대를 선보일 예정이다.

 

마에카와 토모히로가 쓴 동명의 희곡을 원작으로 한 <산책하는 침략자>는 인간의 몸에 침투한 외계인들이 작은 마을에서 ‘개념’을 수집하며 일어나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이야기의 발상부터 상당히 SF적이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어려운 과학 이론 같은 걸 다루진 않으니까. 굳이 비유하자면 이건 문과들을 위한 SF다. 개념을 수집하며 점차 인간에 가까워지는 외계인들과 반대로 개념을 빼앗기며 변해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대조시키며 우리에게 ‘인간다움’에 대해 철학적인 질문을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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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제공 / ⓒ옥상훈

 

 

극 중 등장하는 외계인들은 ‘개념’을 수집한다. 꽤나 의아한 설정이다. 이들의 목적은 지구를 침략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이 수집하는 정보의 대상은 각국의 무기 체계라던가, 핵폭탄의 위치라던가, 지도자들의 정보 등이 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 외계인들은 가족, 소유, 금지, 나와 남을 구분하는 기준 등과 같이 일상적이고 사소한 개념들을 수집한다. 대관절 왜? 그들은 어째서 다른 무엇도 아닌 ‘개념’을 수집하는 걸까?

 

이 물음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질문으로 거슬러 올라가야만 한다. 인간이란 무엇일까? 생물학적인 차원의 대답을 듣고자 하는 질문이 아니다. 우리를 인간답게 만드는 무언가에 대한 질문이다. 그리고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오늘날까지도 다양한 분야에서 수많은 이들의 노력이 이어지고 있다.

 

한편 <산책하는 침략자>는 인지심리학에 기본적인 바탕을 두고 있는 작품처럼 보인다. 심리학 역시 인간을 정의하기 위한 수많은 노력들 중 하나다. 그중 인지심리학은 인간의 마음을 컴퓨터의 정보처리 과정에 빗대어 이해하는 학문이다. 컴퓨터는 크게 세 단계 정도에 걸쳐 수집한 정보를 처리하고 저장하는데 인간의 마음 역시 비슷한 과정을 거친다는 것이다.

 

이때 정보를 저장하는 방식을 설명하는 이론 중 하나가 바로 ‘네트워크 모델(스키마)’이다. 인간은 나름의 정보처리과정을 통해 외부에서 수집한 정보를 기억에 저장하는데, 이러한 정보들이 수많은 연결망에 의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물망을 떠올리면 이해가 쉽다. 그리고 이 그물망이 인간의 정신을 구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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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제공 / ⓒ옥상훈

 

 

우리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않는다. 우리 나름대로 해석하고 기억한다. 가령 강의를 들을 때 우리는 교수님의 말씀을 기억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노트 속에 요약/정리한 필기 내용을 기억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를 ‘개념화’라고 하는데, 인간에게 있어 이것은 본능과도 같다. 과학계에서 공식을 만들고, 어학계에서 사전을 편찬하기 위해 괜히 애를 쓰는 게 아니다. 제대로 된 개념이 선행하지 않으면 우리는 주어진 정보를 이해할 수 없다.

 

연극 <산책하는 침략자>에는 인간과 외계인이 등장한다. 이때 외계인은 인간으로부터 개념을 빼앗는다. 그물망의 마디 하나를 통째로 빼가는 셈이다. 흥미로운 건 개념을 빼앗길수록 인간은 일상생활이 불가능해지는 등 인간 답지 못해지지만, 개념을 빼앗은 외계인은 갈수록 인간의 모습에 가까워진다는 것이다.

 

한편 개념을 충분히 수집한 외계인들은 인간의 몸을 빠져나와 지구를 떠난다. 그렇게 되면 몸의 원래 주인이었던 인간은 어떻게 될까? 신지에 의하면 그 인간은 죽는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하다. 외계인이 인간의 몸을 떠나는 순간, 외계인이 그동안 수집한 개념도 함께 인간의 몸을 떠난다. 다시 말해 개념을 모두 잃어버린 인간은 죽은 것과 다름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를 구성하는 건 피와 살이 아닌 ‘개념’이었던 건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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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제공 / ⓒ옥상훈

 

 

이렇듯 (연극 속에서)개념은 인간을 인간답게 지탱하는 역할을 한다. 허나 이와는 별개로 한 가지 물음이 남는다. 만약 그렇다면 개념의 존재는 우리를 구속할까, 자유롭게 할까?

 

안타깝게도 <산책하는 침략자>는 거기에 대해 명확한 답을 쥐어주지 않는다. 연극의 배경은 일본의 작은 마을이다. 이곳은 지금 전쟁의 위협에 시달리고 있다. 하늘에는 전투기와 미사일이 날아다니고, 뉴스에서는 연일 불안한 소식을 전한다. 이런 와중에 서민들의 삶은 팍팍하기 그지 없다. 결국 사람들은 전쟁의 위협에 공포를 느끼면서도 한편으론 모든 게 파괴되어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으면 좋겠다는 바램을 갖는다.

 

그런 그들에게 신지(외계인)의 존재는 구원자나 다름없다. 신지에게 ‘소유’라는 개념을 빼앗긴 그들은 그가 오히려 자신들을 옥죄던 사슬을 끊어주었다며 극한의 해방감을 느낀다. 그리곤 서로 뺏고 뻬잇는 게 목적인 전쟁의 무의미함을 자각하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자 반전 운동에 나선다.

 

반면 신지에 의해 일상생활이 불가능해진 쪽이 있다. 가령 나루미의 언니는 신지로부터 ‘가족’의 개념을 빼앗긴 후, 남편을 제외한 나머지 가족들에게 적대적으로 행동하며 자신을 둘러싼 관계에 대해 혼란을 느낀다. 이 경우, 신지는 본래의 목적에 맞게 완벽한 침략자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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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제공 / ⓒ옥상훈

 

 

물론 앞서 말했던 것처럼 이 연극에 정답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신지는 우리에게 구원자일 수도, 침략자일 수도 있다. 개념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를 자유롭게 할 수도, 거꾸로 구속할 수도 있다. 모든 건 가능성의 형태로만 부유할 뿐이다. 마치 나루미와 신지의 관계처럼 말이다.

 

신지의 몸에 외계인이 침투하기 전, 사실 나루미와 신지의 관계는 망가질대로 망가진 상태였다. 나루미 스스로도 우리는 별거하고 있는 것과 다름없다고 할 정도였다. 심지어 신지는 나루미 몰래 회사 사람과 바람을 피우던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종 이후, 돌아온 신지는 변했다. 나루미에게 다정한 남편이 되었다. 예전처럼 별명으로 불러도 화를 내지 않고, 연애할 적에 있었던 추억들을 스스럼없이 이야기 하기도 한다. 그런 그의 모습에 나루미는 의아해 하면서도 다시 그와 ‘사랑’에 빠진다. 물론 이때 신지는 이미 외계인이었지만 말이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신지의 다정함이 거짓은 아니다. 신지의 정체에 대해 알게 된 후, 진짜 신지는 어디 있냐는 나루미의 물음에 외계인은 자신이 곧 신지라고 대답했다. 이미 자신은 신지의 정보와 기억에 완벽히 동화했기 때문이다. 외계인 신지의 모든 행동은 인간 신지의 과거에서 비롯된다. 말하자면 그는 신지의 가능성인 셈이다. 다시 말해 신지는 이렇게도 할 수 있었다. 바람을 피우는 대신, 나루미에게 다정한 남편이 될 수도 있었던 것이다.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조건이 ‘개념’이라면, 그 조건을 행사하는 건 우리의 ‘선택’이다. 앞서 말했듯 이 연극의 배경은 전쟁이 코앞에 닥친 일본의 작은 마을이다. 그런 와중에 외계인의 침략이 시작되었고, 이들에 맞서기 위해 이제 인류는 대립을 멈추고 서로 연대해야만 한다. 허나 외계인의 침략이 아니더라도 인류는 이미 연대할 수 있었다. 침략은 연대의 충분조건이지 필요조건은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을 택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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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제공 / ⓒ옥상훈

 

 

연극의 말미, 나루미는 지구를 떠나는 신지에게 마지막으로 ‘개념’ 하나를 전달한다. 그건 신지가 얻고 싶었지만 도무지 얻을 수 없었던 것이다. 나루미로부터 그 개념을 전달받은 신지는 ‘인간다움’에 한 발짝 더 다가간다. 그리고 우린 아까의 말을 기억해야 한다.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조건이 개념이라면, 그 조건을 행사하는 건 우리의 선택이다."

 

나루미의 마지막 선물로 인해 이제 신지에게도 선택의 순간이 다가왔다. 인간에 가까워진 그는 이제 선택해야만 한다. 지구를 떠날지 말지, 지구를 침략할지 말지. 처음 맞이한 선택의 순간에 그는 모르겠다고 대답하지만 그 결정을 유예하거나 포기할 순 없다.

 

과연 나루미가 전달한 마지막 개념은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그로 인해 신지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오는 8월 15일까지, 두산아트센터에서 그 답을 확인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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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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