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찐따 박성빈] 조선족의 아들

글 입력 2021.08.09 2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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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뿌쯜따오. 모릅니다. 엄마는 내가 중학생 때까지 강남에서 중국어학원 강사로 일했다. 12살 무렵 엄마는 동생과 나를 그 학원 학생으로 등록시켰다. 3개월가량 엄마 손에 이끌려 그곳에 다녔다. 배운 것들을 다 잊었는데 ‘뿌쯜따오’만 기억한다. 학원에 다니지 않을 때에도 엄마는 종종 중국어로 말을 걸었다. 니취날. 뚜어샤오치엔. 3개월 배운 중국어로 무어라 답하기 버거웠던 나는 뿌쯜따오만 외쳤다. 뿌쯜따오. 뿌쯜따오, 하면 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엄마는 웃고 말았다. 나중에는 엄마가 한국어로 말을 걸 때도 뿌쯜따오라고 외치는 것처럼 행동했다. 더 이상 말 섞는 게 귀찮다는 태도를 취했다. 방문을 걸어 잠갔다. 엄마 얼굴을 보지도 않고 묻는 말에만 답했다. 방문 앞에는 늘 뿌즐따오가 걸렸다. 몰라. 그러니까 제발 내게 뭘 묻지 마.

 

 


2.


  

중학생 때 엄마와 안산에 간 적 있다. 외삼촌과 외숙모가 그곳 공장에서 일했다. 12살 중국에서 보고 두 번째로 만나는 거였다. 외숙모의 딸인 중학생 잉빈도 있다고 했다. 그들이 묵는 방은 어두컴컴했고 곰팡이가 많았다. 외숙모는 자신이 만들었다는 비누와 화장품 몇 개를 건네줬다. 엄마는 질색하는 듯이 굴다가 기어코 손에 쥐여 주는 외숙모의 넉살에 지는 시늉을 했다. 중국 음식점에 가서 양꼬치를 먹었다. 엄마가 술에 취한 모습을 처음 봤다. 알아들을 수 없는 중국어가 귀를 훑었다. 엄마는 얼굴을 찡그리다가 웃다가를 반복했다. 푸념과 넋두리, 거기서 기원한 자조 섞인 웃음 같은 것들이었을 거라고 짐작한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잉빈에게 말을 걸고 싶었는데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나는 중국말을 못했고 잉빈이 아는 한국어는 안녕하세요 뿐이었다. 외삼촌이 불콰한 얼굴로 내게 말을 걸었다. 무슨 말인지 몰라 웃고 말았다. 그 식당에서 우리 테이블이 제일 시끄러웠다. 그렇게 시끄러운데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없었다. 그날은 나를 재단하는 말들에 둘러싸여 지레 자기표현도 포기하는 나날의 전조인 셈이었다. 나는 내가 어떤 성분을 타고났는지 알 수 있었다.


J는 우리 엄마가 중국어학원 강사라는 걸 알았다. 가끔 TV에서 유행하는 엉터리 중국말을 따라했다. 너희 엄마가 가르치는 게 이런 거잖아. 하하하. 실은 너네 엄마 조선족 아냐. 하하하. J의 발화에 악의는 없었다. 내 엄마가 조선족일리 없다는 걸 전제하고 치는 장난이었다. 악의 없는 문장도 타인에게 폭력이 될 수 있음을 몰랐던 나는 아무 제동도 걸지 못했다. 아니라고  부정하며 같이 웃었다. 나는 내가 상처받았는지도 몰랐다. 나를 구성하는 성분이 약점이 될 수 있다는 것도 그때 알았다.


내가 다문화가정이라는 것이 발각되거나 드러나면 사람들은 어쩔 줄 몰라했다. 엄마가 조선족이라는 게 알려지면 더 어쩔줄 몰라했다. 군대에서는 다문화가정이라는 이유로 도움·배려 용사가 됐다. 엄마가 중국에서 왔다고 하면 사람들은 잠깐 입을 다물었다가 자기 불행의 역사를 늘어놨다. 그들이 J와 다른 게 뭘까. ‘다른 존재’라는 인식이 깔렸다는 점에서 J의 조롱이나 당신들의 연민은 다를 게 없다.


다문화라서 불행할 거라는 재단을 살면서 여러 번 겪었다. 나는 대충 거기 호응해주다가 어느 때부턴 내가 진짜 불행하다고 생각했다.

 

 


3.


 

엄마는 드센 사람이다. ‘드세다’는 수사가 가장 어울린다. 뭔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곧바로 쏘아붙인다. 가게서 사장이나 직원과 싸우는 일은 예사다. 차량이 보도에서 갑자기 튀어나오거나 하면 그 따위로 살지 말라며 당장 운전자와 싸울 태세를 취한다. 드센 태도는 어린 아들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엄마에게 장난을 걸었다가 뺨을 맞았다. 기온이 영하권으로 떨어진 날 점퍼를 걸치지 않았다고 엎드려 맞았다.


드센 것보다 못 견디겠는 건 엄마가 팔자 이야기를 꺼낼 때다. 어쩌다 아빠 같은 인간과 결혼했는지 모르겠다는 말. 너는 저렇게 되지 말라는 말. 너 몰래 우는 나날이 얼마나 많은지 아냐는 말. 엄마 말처럼 아빠는 마흔 무렵까지 돈을 벌지 않았다. 무능한 사람이었다. 엄마는 아빠를 경멸했다. 그 감각을 내게 쏟아 내는 순간이 잦았다. 5등급이 즐비한 성적표를 들고 갔을 때, J와 밤늦게까지 놀고 들어왔을 때, 고3 주말 늦잠을 잘 때, 그런 때에 이 따위로 살아서 어떻게 앞날을 준비하겠냐며 칼로 찌르듯이 말했다. 머리가 굵어지며 개무시로 응수하던 나는 도저히 참을 수 없어졌을 때 엄마에게 미친 듯이 소리를 질렀다. x발 진짜. 왜 주말인데도 시비를 거는거야. 그리고 공부? 이 따위 환경에서 내가 공부를 어떻게 할 수 있는데.


방문을 걸어잠그는 순간 엄마 눈자위에서 무언가를 봤다. 누군가의 부모가 되지 못한 나는 ‘무언가’의 정체를 여전히 모르겠다. 엄마는 울먹거림을 참는 표정이었다.

 

 


4.


 

원래 없던 가족 간 교류는 대학에 오면서 더 없어졌다. 나는 돈이 필요할 때만 가족을 찾았다. 집에 가는 날이 줄었다. 전화가 오면 받지 않았다. 나는 귀를 자른 것처럼 굴었다. 가족 이야기가 나오면 TV에 나오는 가족을 갖춘 것인 양 말했다. ‘보통’의 가족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 보통을 상정하고 흉내냈다. 사람들이 내게서 무언가도 발견하지 않기를 바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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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암에 걸렸다. 엄마를 사랑한다는 감각을 가져본 일 없는 나는 당혹스러웠다. 엄마가 죽는 건가. 상실에 대비해야 하나. 엄마와의 유대가 깊지 않은 내가 상실감을 느끼기는 할까. 엄마는 다른 검진을 받다가 초기에 발견했다는 말을 이었다. 수술 받고 몇 주 입원하면 돼. 위험하지 않아.


몇 달 만에 집에 올라가 엄마가 있는 병동에 하루 머물렀다. 엄마가 걱정돼서가 아니었다. 나 때문이었다. 도리나 의무, ‘그래도’ 같은 감각이었다. 거기서도 나는 역정을 냈다. 그 와중에 잔소리를 하는 엄마가 대단해서, 병동이 끼치는 공기가 싫어서 엄마의 모든 질문을 시비로 해석했다. 내가 받는 상처에는 예민하게 굴면서 엄마의 가슴팍에 상처를 새겼다. 하루 있는 것도 견디기가 어려웠다. 친정 식구들도 올 수 없는 형편이었다. 엄마의 친구들은 매일같이 왔다고 했다. 엄마는 나보다 친구들이 더 가족 같지 않았을까. 내가 역정을 낼 때 엄마는 무슨 기분이었을까. 그 당시에는 엄마의 심정을 헤아려 보려는 노력도 안했다. 다음 날 자취방에 왔다. 나는 엄마의 병이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 곳에 왔다는 이유로 안도했다.

 

 


5.


 

3학년 ‘인권과 정치’ 수업의 발표 차례가 돌아왔다. 주제는 자유였다. 나는 ‘다문화’를 골랐다. 이향규 작가의 ‘후아유’를 읽고 난 뒤라 그랬다. 책에는 영국인 남성과 결혼해 스스로 다문화가정을 꾸린 작가의 일화가 수록됐다. 편견과 재단을 통과하며 자기 정체성을 자문한 흔적들이 책에 고스란히 있다. 엄마의 멍한 표정도 그런 자문의 발로일까. 나는 어떤 사람일까. 책에 나온 고통의 경험을 겪어본적도 없으면서 나는 내가 대단한 불행을 겪은 것인 양 착각했다. 내가 통과한 것들은 기분 나쁜 위화감이지 불운이나 고통이 아니었다. 그 위화감들을 거대한 불행으로 비약시키면 내 속에 고인 뒤틀린 감정들이 배설될 거라 믿었다. 그건 최악의 믿음이었다. 나는 약자성에 매몰됐다. 청승에 찌들고 싶었다. 누군가 나의 고통을 발견해줄거라 생각했다. 발표 대본을 쓰며 내 불행을 과장했다. 내 엄마가 조선족이고 대상화에 시달린 일화를 대본 앞에 배치했다.


발표가 끝나고 몇 학생이 손을 들었다. 나는 기대했다. 내 고통에 공감해줄거라 생각했다. ‘다문화’라는 호명이 대상화라면 뭐라고 불러야 합니까. 이들이 약자인 것도, 지원이 필요한 것도 분명한데. 결혼이주여성의 노동이 비정규-단순 노동에 머물러있다고 했습니다. 그럼 이들이  무슨 노동을 할 수 있습니까. 말도 안 통하는데. 일단 결혼해서 국적 취득하려 온 거잖아요.


x같은 x발 새끼가. 지금까지 뭘 들은 건데. 속으로 주억거렸다. 욕지기를 게워내고 싶었다. 나는 질문한 이들을 노려봤다. 다른 이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누군가는 코를 긁었다. 누군가는 자고 있었다. 대부분은 이 수업이 빨리 끝나기를 바라는 표정이었다. 화는 당혹감으로 바뀌었다. 사람들은 내게 별 관심이 없었다. 네가 다문화가정인데 뭐 어쩌라고. 누가 물어봤냐. 그런 문장을 눈자위에 새겨넣은 것처럼 보였다. 나는 어버버버 더듬으며 질문에 답하고 발표를 마쳤다. 수치심이 들었다. 개인의 위화감을 거대한 불행인양 흉내냈음을 들킨 것 같았다. 나는 불행을 전시했고 사람들은 그걸 간파했다. 혹은 네 불행에 나까지 끌어들이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태도였다. 사람들은 청승을 싫어했다. 나는 그걸 그제서야 알았다.

 

 


6.



연작 기획기사의 주제를 ‘이주민’으로 골랐다. 내 성분을 알고 싶다거나 청승에 찌들고 싶다거나 그런 게 아니었다. 내가 가장 집중할만한 주제가 그거라고 생각했다. 어쨌거나 나를 구성하는 성분이니까. 기사를 쓰면 엄마의 삶도 좀 이해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회사에 다니며 원래 없던 말수는 더 줄었다. 엄마와 말한 적은 손에 꼽았다. 같은 집에 사는데도 그랬다. 뿌쯜따오, 외쳤고, 그럼에도 엄마는 종종 방문을 두드렸다. 나는 엄마의 질문에 좀 더 길게 대답하고 싶었다. 엄마의 불행과 내 성분을 전시하고 팔았던 적이 있다고 고백하고 싶었다. 그러려면 엄마가 어떤 궤적을 그렸는지 알아야했다.


이자스민 전 의원을 인터뷰했다. 그는 결혼이주여성으로 한국에 들어왔다. 일정 기간 체류해 ‘한국인’ 자격을 획득한 한국인이다. 한국인이라서 비례대표로 출마했고 정치활동을 펼쳤다. 사람들은 그의 입법활동을 힐난했다. 한국에게 도움되는 정책을 설계하지 않았다는 이유다. 이주아동권리기본법, 고용허가제 개선등을 발의했지만 여론에 가로막혔다. 이주아동권리보장법은 미등록이주민(불법체류자)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의 출생신고를 의무화 한다는 조항을 담았다. 즉, 출생을 공표해 아이에게 최소한의 의료·교육의 권리를 보장하겠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었다. 법은 ‘군대도 안 갈 아이에게 체류자격을 줄 필요 없다’는 반발에 시달렸다. 법제사법위원회 게시판에 달린 1만 5천여개의 댓글은 이 같은 내용이 태반이다.


고용허가제는 그 자체로 개악이다. 고용주는 싼 노동력으로 외국인 노동자를 부리고 그들의 모든 공적권한도 위임받는다. 어떤 이유든 계약이 해지되면 이주노동자의 비자는 취소되고 불법체류자로 분류된다. 노동자는 고용주의 부당한 지시에 무조건 응할 수밖에 없다. 더불어 5년 이상 체류한 외국인에게 영주권을 부여하는 게 원칙이지만 고용허가제로 들어온 노동자는 최대 체류기간이 4년 10개월이다. 외국인 노동자를 한국인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내용이다. 이들은 한국 땅에서 노동하며 살지만 영주권도 투표권도 가질 수 없다.


이자스민 전 의원은 다문화지원사업도 문제라고 지적했다. 문화융합, 모든 문화를 존중해야 한다는 취지면서 ‘다문화가정’만 따로 분류해 사업을 펼친다. 선주민은 대상에 포함되지 않는다. 그는 “결국 ‘당신들은 다른 존재’라는 낙인을 새기는 국가정책”이라고 말했다.


‘당신은 한국인이 아니다. 당신은 다르다’ 이 같은 태도가 모든 정책에 전제돼 있다. 정책은 ‘다르다’는 인식을 확대하고 사람들은 구별짓는다. 엄마는 드세질 수밖에 없었다. 다른 존재가 아니라는 항변이 엄마의 마음에 고여있던 거였는지도 모른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느 순간부터 나 스스로 ‘다른 존재’라고 인식했다. 다문화가정이고 엄마는 조선족이라는 문장을 말할 때 나 스스로 위화감을 풍겼던 거 아닐까. 사람들이 어쩔 줄 몰라했던 건 내가 만들어낸 위화감에 호응해서가 아니었을까. 나는 이자스민에게 내 경험을 토로하고 싶은 마음을 애써 눌렀다.


사람들이 청승을 싫어한다는 걸 겪고 기사를 썼다고 해서 자기연민이 해소된 건 아니다. 여전히 스스로를 가여운 인간이라 생각할 때가 있다. 엄마가 어떤 궤적을 그렸는지 역시 아직 잘 모른다. 짐작만 할 뿐이다. 직접 물어보면 되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여전히 당신이 밉다. 말을 걸면 화가 날 때가 있다. 그래서 글을 쓴다. 당신에게 이걸 보여주는 순간을 상상한다. 당신이 미웠다고, 내가 이런 마음이었다고, 내가 뒤틀려 있다고, 그래도 씀으로써 바뀌고 싶었다고 당신에게 말을 걸고 싶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다.


두 달전에 엄마와 밥을 먹었다. 엄마와 둘이 밥을 먹은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외가의 소식을 들었다. 외삼촌은 아직도 술을 좋아한다고 했다. 외숙모는 중국으로 돌아갔다고 했다. 잉빈은 의사가 됐다고 했다. 그러다가 엄마는 느닷없이 미안하다고 했다. 능력 있는 부모가 아니어서 미안하다고 했다. 나는 울고 싶었다. 밥을 먹을 때는 안 울었는데 집에 돌아와서는 울었다. 나 역시 미안하다고 말해야 했는데. 능력 있는 자식이 아니어서 미안하다고 말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게 후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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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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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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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리원
    • 솔직한 글 잘 읽었습니다. 글이 꾸밈이 없고 진솔해서 항상 너무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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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매튜
    • 게시된 글을 우연히 보게 되었고 읽고 나니 왠지 몇자 남기고 싶네요.
      1. "조선족"이란 명칭은 중공중국정부에서 지어준 이름이에요. 거슬러 3-4대만 올라가면 중국에서도 다 "조선사람"으로 불렀고 중공중국에서 정권을 세우기이전에는 오늘날과 같이 한민족과 특별히 구별되어 지칭하는 "조선족"이란 특히한 공동체 정체성이 없습니다. 그러니 이는 정치적 진영논리가 담긴 용어이니 너무 크게 의식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국적은 바꾸면 그만이지만 민족은 바꿀수가 없다고 생각하시고 당당한 한국인 정체성으로 사시면 됩니다.
      2. "엄마"는 결국 "내편"입니다. 같이 있을때 엄마한테 잘 하시고 엄마랑 잘 지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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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자
    • 술술 읽히는데도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는 글이네요
      잘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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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양익준
    •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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