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이따금 나를 살게 하는 너에게 [사람]

글 입력 2021.08.08 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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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지욕기생’. 좋아하는 다섯 글자다. 논어에 등장하는 이 구절은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살아가게끔 하는 것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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쌉쌀한 풀냄새가 풍기는 날이 오면, 나는 2016년의 여름을 떠올려 보곤 한다.

 

그 해 여름, 고3이던 나는 꽤 힘들었다. 하루 종일 누군가와 함께 있었던 반면 그만큼이나 많이 외로웠던 시절이었다. 야자를 마치면 버스를 타려고 줄을 서 있는 학생들의 무리를 비집고 걸어서 집에 가곤 했다. 도로변에 심긴 가로수들을 따라 언덕을 넘는 사이에 버스가 대여섯 대쯤 나를 지나쳐 갔다. 그래도 괜찮았다.


어느 날, 보통의 하루처럼 이어폰을 꽂고 걸어가고 있을 때 누가 내 가방을 툭 쳤다. 돌아보니 같은 반 친구였다. 착해 보였지만, 친하진 않았던 친구였다. 집에 가냐고 묻기에 고개를 끄덕였고, 그 친구는 내게 어디 사냐고 물었다. 반림동, A 아파트에 산다고 하자 친구는 자신은 바로 그 뒤에 위치한 B 아파트에 살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같이 걸어갈 것을 제안했다.

 

사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시절의 나는 누군가 나의 시간에 나타나는 것에 익숙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런데 다음 날도, 그다음 날에도 자율학습이 마치면 그 아이는 먼저 걸어가고 있는 나의 가방을 툭툭 쳤다. 좋아하는 노래가 있는데 혹시 걸어가는 동안 틀어도 되냐고 조심스럽게 묻기도 하고. 길을 걷다가 갑자기 떡볶이를 먹고 싶다고 날 이끌었다. 너도 알다시피, 그 떡볶이 너무 맛있지 않냐며.

 

그러다 보니 우리는 매일 함께 교실을 나서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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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대화가 뚝뚝 끊기기도 했다. 근데 어느 순간부턴 무슨 얘기든지 할 수 있었다. 말로 꺼내기 어려운 두터운 문제들도 별것 아니게 느껴졌다. 우리는 비눗방을 터트리듯 가볍고도 어두운 고민들을 꺼내놓았고, 그럴 때마다 우리의 문제들은 사실은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허공 위로 흩어졌다.


시간은 계속 흐르고 수능 날짜도 점점 가까워졌다. 각종 상담도 받아야 했고, 준비해야 할 서류들도 많아졌다. 야자를 빠지고 집으로 곧장 가기도 하고, 학원으로 바로 이동하기도 하면서 우리가 집에 같이 가는 날도 줄어들었다.

 

사실은 그때의 난 너무 바빴고, 할 일이 많아서 그 친구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친구 또한 그랬을 것이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수능 시험을 치르고 나서는 우리는 더 이상 집에 같이 가지 않았다.

 

확실히, 우리는 가까웠다. 그 깊이는 가늠할 수 없지만 가끔은 깊었고 가끔은 얕았을 것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학교를 떠나면서 우리는 또 보자는 말과 함께 기약 없는 이별을 했고, 그렇게 가까웠던 사이가 아니다 보니 자연스럽게 연락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2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나는 올해로 스물한 살이 되었다.

 

작년 겨울, 나는 부산에 간 적이 있다. 그리고 일행과 거리를 걷다가 우연히 그 친구를 만났다. 그 아이는 친구들과 팔짱을 낀 채 걸어가고 있었다. 우리는 분명히 동시에 눈이 마주쳤다. 하지만 가까이 가서 인사하지는 않았다. 그저 자연스럽게 서로를 지나쳤다. 하지만 시선에서 그들이 멀어지자 나는 친구에게 속삭였다.

 

”방금, 고등학교 때 내가 참 좋아하던 친구를 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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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웠던 나의 시간에 찾아와줬던 너.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그 친구와의 대화가 그 시절의 나를 살게 했다는 것을 알았다.

 

사실은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그 당시의 우리는 분명 치열하게 고민했겠지만 들여다보면 전형적인 고등학생의 고민이었을 것이다.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모르겠다는 말, 혼자만의 싸움이 가끔 힘들다는 말, 공부는 너무 싫다는 말, 그렇지만 힘내자는 말들이 담겨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때의 단편적인 기억들은 그 시절의 나를 버티게도 했지만 지금에서도 가끔 나를 살게 하고, 성장하게 한다. 가끔 내 얘기를 진지하게 듣던 눈빛이, 선한 미소가 떠오를 때면 어김없이 감사하다. 그 기억들은 내 마음의 공간에 가장 좋은 기억들 중 하나로 새겨져 있다.

 

혹시 그 친구가 이 글을 읽게 된다면, 꼭 말해주고 싶다. 네가 그때 나를 살게 했고, 그때의 추억들은 이따금 나를 살게 한다고.


그리고 나는 지금 이 순간 내 곁을 찾아와준 사람들을 사랑하겠다. 우리가 언젠가 멀어진다고 해도 괜찮다. 그저 이 순간의 다정한 말 한마디가, 오늘의 사소한 대화가, 언젠가, 이따금 그들을 일으키고 살린다면.

 

‘애지욕기생’

 

앞으로도 그렇게 사랑받고 더 사랑하면서 살았으면 한다.


 

[이나경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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