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훔친 듯이 달리고 나서야 만난 자유에 대하여: 델마와 루이스 [영화]

난 그냥 살 수가 없어, 우리 잡히지 말자
글 입력 2021.07.29 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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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고등학생 때 썼던 스터디플래너를 꺼내 보게 되었다. 그 당시 체크리스트 하단부에 위치한 작은 빈칸에 일기를 쓰는 게 매일 저녁 야간자율학습 시간의 거의 유일한 낙이었다. 아주 작은 글씨로 깨알같이 그날그날의 일상과 감상을 적는 게 그렇게 재밌었던 것은 담임 선생님의 코멘트 때문이었다. 선생님은 일정 기간마다 작성한 플래너를 확인하시고 그 말미에 매번 다른 코멘트를 남겨 주시곤 했다.


종이 자락을 넘기며 그 흔적들을 따라가다 우연히 멈춘 곳. 그곳에는 빨간 펜으로 이렇게 쓰여있었다. '절대 무기력에 빠지면 안 돼. 일어나자!'라고.


나는 무기력을 습관처럼 받아들이던 사람이었다. 어떻게 저항할지조차 생각할 겨를 없이 밀려오는 파도에 몸을 맡기는 수초처럼 자주 흔들리는 사람. 선생님은 그것을 가장 경계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무기력한 게 제일 나쁘다고.


이 이야기를 꺼낸 것은 다름 아닌 이 영화 때문이다. <델마와 루이스>에는 제목을 보자마자 알 수 있듯 델마와 루이스라는 두 여성이 등장한다. 이 두 사람의 파격적인 이야기가 나로 하여금 무기력을 경계하고 타성에 젖지 않도록 주의해야겠다는 경고와 믿음을 주었다.


한마디로 말하면 도망치는 이야기. 덧붙여서 말하면 도망치다 삶을 찾은 이야기. 그게 바로 이 영화에 속절없이 빠질 수밖에 없는 이유라고 설명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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훔친 듯이 달려



시작은 경쾌하다. 절친인 델마와 루이스가 각각 남편과 애인을 뒤로한 채 여행을 계획하고 함께 떠나게 된다. 챙기지 않아도 될 물건들까지 바리바리 챙기는 델마의 모습에 웃음이 터지던 것도 잠시 상황은 곧 반전된다.


우연히 들르게 된 펍에서 신나게 놀던 델마와 루이스. 그곳에서 만난 남성에게 성폭행 당할 뻔한 델마를 구해주려다 바로 전 델마가 구태여 챙겼던 총을 꺼낸 루이스가 가해남성을 살해하게 된다. 그렇게 이 둘의 여행 계획은 완전히 틀어지게 되고, 경찰에게 잡히지 않기 위해 멕시코로 도주하게 된다.


델마는 맨 처음 아주 수동적인 인물로 등장한다. 남편에게 절절매며 허락을 받으려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결국 말 한마디 꺼내지 못해 실패하고 몰래 도망치는 것처럼 서둘러 떠나게 된다. 그러나 살인 사건 이후 남성으로부터 수차례 상처와 억압을 받아왔던 델마와 루이스가 그 모든 것들을 극복하고 변화해가는 과정을 지켜보며 끝내 희열까지도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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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그 과정이란 쉽게 흘러가지만은 않는다. 큰 사건에 연루되어 도망자 신세가 되었음에도 해맑은 모습으로 우연히 만나게 된 남자에게 반하고, 결국엔 루이스가 힘들게 얻은 돈을 도난당하기까지 한다.

 

그 장면을 처음 보았을 때는 다소 황당하고 답답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나 첫 번째로 델마의 순정은 비난받을 것이 될 수 없으며 두 번째로는 그것이 오히려 델마와 루이스에게 완전히 자립할 하나의 명분이 되어준다는 점을 곧 깨달았다. 루이스도 델마를 오래 책망하지 않고 이렇게 말한다.

 

 

"델마, 네 잘못이 아니란 걸 아직도 모르겠어?"

 


러닝타임의 후반부, 그 둘은 합심하여 도로 위에서 여성 운전자를 희롱하고도 당당하게 구는 무례한 운전자의 트럭을 활활 불태워버린다.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살아온 그들이 '그것은 옳지 않다'라고 당당하게 이야기하고, 스스로 다른 누군가를 심판하는 이 장면은 특히나 마음에 와닿는다.


그들의 횡보를 보면 영화 <싱 스트리트>의 'Drive it like you stole it'이 떠오른다. '너의 인생이야, 너는 어디든 갈 수 있어. 핸들을 잡고 훔친 듯이 달려.'


두 여성은 운전대를 잡고, 총을 쥐는 그 순간부터 영영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달려온 게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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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뭔가를 이미 건너왔고, 돌아갈 수도 없어. 난 그냥 살 수가 없어."

 


내 삶이 온전히 나의 것으로만 이루어진 것이 맞는지 되묻게 될 때가 있다. 맞다고 주저 없이 고개를 끄덕이기에는 너무나도 많은 타인이 내 삶에 개입했기 때문이다. 그 모든 것들이 그들의 의도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 스스로가 그렇게 하도록 허락했다.


'네가 틀렸어. 넌 나를 그런 식으로 대해선 안돼.'라고 델마와 루이스가 트럭 운전자에게 말하지 못하고 애써 무시하던 것처럼 못 본 척 고개를 돌렸지만 사실 그들의 말 한마디 한마디를 가슴과 머릿속에 남겼다.


델마와 루이스의 영화 초반 행동을 보면서 알 수 없는 답답함을 느꼈던 것은 어쩌면 그들이 나의 어떤 면모를 닮아있음을 무의식 중에 알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영영 망설이고, 돌아보고, 후회할 것만 같았던 두 인물은 결국 변했다. 돌이킬 수 없는 무언가를 건너왔다고 말하며 새롭게 얻은 지금의 삶을 포기하려 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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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잡히지 말자."
 


모든 일이 마음처럼 술술 풀리지는 않았다. 그들은 여전히 경찰에게 쫓기는 현상수배자 신분이었으니까. 그렇기에 언제 잡힐까 두려움에 떨면서도 그들은 억압받던 과거로 돌아가길 선택하지 않는다. 자신들에게 기회를 주겠다며 회유하려는 경찰의 목소리에도 더 이상 적당히 타협하며 속아 넘어가지 않는다. 세상의 어느 누구라도 그들 멋대로 두 주인공을 함부로 시혜하려 들도록 허락하지 않는다.


처음으로 자신의 인생을 주체적으로 살게 된 델마는 마치 다른 차원으로 이동한 것처럼 달라졌고, 그 끝에 다다라서는 잡히고 싶지 않다며 하늘로 날아오른다. 그들에게 죽음보다 더 두려운 것은 바로 이 모든 여정을 통해 얻게 된 주체적 삶과 자유 같은 것들이었다.


푸른색의 자동차가 하늘로 날아오르는 장면이 역시 가장 압권이다. 그들이 어디로 어떻게 떨어져 파편으로 조각난 채 튕겨져 날아갈지 그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 심지어 날아오른 그들조차도 모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진정 그들이 원한 일이었을 것이다.


운전대를 잡고, 총잡이가 되자. 우리는 우리 삶을 꽉 말아쥔 채 원하는 방향으로 쏘아 올려야만 진정한 자유를 맛볼 수 있을 것이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 나간 후에야 삶을 되찾은 델마와 루이스처럼.

 

 

[고민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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