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구례로 갈까? 구례! [여행]

글 입력 2021.07.26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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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한 곳으로 여행을 떠나고 싶을 때가 있다. ‘이번 휴가 어디로 다녀왔어?’라는 물음에 답을 하면 호기심 어린 눈을 되돌려 받는 그런 곳. 관광객이 많지 않고, 조용히 혼자만의 생각과 자연에 잠길 수 있는 곳. ‘여행은 살아보는 거야’라는 멋진 카피를 실현할 수 있는 곳 말이다.

 

짧은 휴식기를 맞았을 때, 나에게도 그런 곳이 필요했다. 국내 여행지를 둘러보며 찾은 곳들은 저마다 매력적이었지만, 마음에 쏙 드는 곳을 선뜻 고르기 어려웠다. 머리를 싸매던 중, 전라남도 구례라는 지역을 찾았다. 낯설지만 귀여운 지역명이 한눈에 들어왔다. 지리산을 천천히 오르며 산 내음을 맡고, 자전거로 섬진강 변을 달리는 내 모습이 그려졌다. 단숨에 떠났다, 구례로!

 

구례 버스터미널에 도착해 먼저 식당으로 향했다. 터미널에서 기분 좋게 걸어가면 닿을 수 있는, 뚜벅이에게도 편한 동네가 좋았다. 배를 든든히 채우고, 숙소에 짐도 풀고 본격 지리산으로 나섰다. 사실 등산이라고 하기엔 민망한 2~3시간 산책 코스였다. 하지만 등산 초보의 마음은 사뭇 진지했다.

 

연기암에 올라 풍경을 구경한 뒤, 화엄사로 내려와 저녁 예불을 보는 코스였다. 솔직히 이 코스를 추천해 주신 숙소 사장님께 감사 절이라도 올리고 싶을 만큼 등산 초보에게 적당히 힘들고, 보람찬 코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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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3시의 지리산은 산과 나 둘뿐이었다. 등산객들이 대부분 아침 일찍 산을 오르기 때문에, 사람이 가장 적은 시간대라고 나중에 들었다. 그 덕에 자유로움을 즐길 수 있었지만, 온정신을 압도하는 자연에 뜻밖에 공포를 느끼기도 했다.

 

산이라 하면 눈에 가득 들어오는 푸르름, 시각적인 인상만을 상상했는데, 크게 소리치는 듯한 물소리와 바람에 부딪히는 나무 소리, 새소리로 가득했다. 산 내음 또한 상상을 훨씬 뛰어넘었다. 피톤치드가 쏟아지는 산을 걸으니 윤이 반짝반짝 날 정도로 깨끗이 청소한 공간처럼, 머릿속이 맑아지고 눈앞이 선명해졌다.

 

간간이 보이는 ‘곰을 만났을 때’ 안내판에 겁을 먹고 달리듯 산을 올랐다. 오르고 또 오르니 문수보살 기도 성지라는 연기암이 보였다. 거대한 문수 보살상에 담긴 염원을 가만히 느껴보고 뒤를 돌면 지리산과 섬진강이 꿈처럼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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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히 오른 산을 말 그대로, 나무가 아닌 숲의 모습으로 바라보았다. 산의 능선을 하나하나 따라가보았다. 울퉁불퉁 올라온 나무들이 있었지만 그래도 아래로 혹은 위로 하나의 방향성을 갖고 나아가고 있었다. 저마다 다른 크기와 빛깔을 지닌 수많은 나무들이 모인 숲의 윗면. 같은 높이와 모양으로 자른 도시의 숲처럼 깔끔하진 않았지만, 그래서 아름다웠다.

 

문득 여행을 떠나기 전, 온종일 나를 괴롭힌 고민들이 사소하게 느껴졌다. 자연 앞에 사람은 참 작은 존재였다. 살면서 반복하게 되는 실수와 후회, 고민 그 모든 것들이 인생을 흔들 만큼 커다랗게 느껴져도 실은 그렇지 않다고, 산이 말을 건넸다. 그것들이 모여 때론 거친 굴곡을 만들어도, 울창하고 아름다운 삶을 일구어 가는 길에 서있는 것뿐이라고 말했다.

 

연기암의 풍경과 그 속에서 떠올린 생각을 잘 담고, 저녁 예불 시간에 딱 맞게 화엄사에 도착했다. 스님이 북을 두드리기 시작하자 평화롭게 떠돌던 비둘기들이 놀라 뛰어올랐다. 다양하게 변주되는 북과 은은하게 울려 퍼지는 종, 비둘기의 날갯짓, 조용히 흐르는 물소리가 저마다 악기가 되어 하나의 곡을 이뤘다. 역사가 고스란히 담긴 절과 그 뒤로 저무는 하늘이 곡의 배경이 되었다. 종교와 예술은 가까이 맞닿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날도 지리산에 향했다. 전날 마주한 산에 흠뻑 취해, 노고단에도 오르고 싶었다. 점점 더워지는 날씨에 지쳐갈 즈음, 평평한 돌 위에 앉은 할머니가 쉬어 가라고 곁을 내주셨다. 짧은 대화를 나누고 나선 할머니께서 함께 산을 오르자고 하셨고, 그렇게 동행이 시작됐다. 산의 소리가 섞여 반 즈음만 이해했지만, 어떤 삶을 살아온 분인지 반의반 즈음은 알 수 있었다.

 

아흔 살의 할머니, 지리산을 잘 아는 할머니를 따라 귀퉁이를 돌아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풀숲 한가운데 바위에 앉았다. 집에서 챙겨오신 간식을 내주셨고, 올해 첫 수박을 그곳에서 맛봤다. 달고 싱그러운 맛이었다.

  

친화력이 좋은 할머니 덕에 옥천에서 온 스님과 보살님도 만났고, 스페인과 몽골을 돌고 돌아오는 여행 이야기를 나눴다. 낯선 대화, 그 대화를 통해 낯선 지역에 새로운 인상이 생기는 것, 이것이 여행의 재미였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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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고단에 오르는 길 중턱에서 할머니는 쉬면서 기다릴 테니 다녀오라고 하셨다. 그 말에 따라 하나 둘 열심히 돌계단을, 또 나무계단을 올랐다. 정상에 오르니 운무에 가득 휩싸여 섬진강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뭐가 보여야 말이지’ 실망한 목소리들이 터져 나왔다. 아쉽긴 하지만 이렇게 높이 올랐는데 그 높이가 전혀 가늠이 되지 않는 비현실적인 느낌이 신기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비가 내리기 시작해 서둘러 내려갔는데, 초입에 이르니 맑게 하늘이 갰다. 하늘이 몇 천 번 바뀐다는 누군가의 말이 맞았다. 정상에서 맑은 하늘 아래 섬진강 풍경을 보지 못한 것이 서운했다. 하지만 다시 노고단에 꼭 와보아야 할 이유가 생긴 것이니 내심 좋기도 했다. 한번 찾은 여행지를 다시 찾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알고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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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고단 다음으로 천은사의 저수지를 평화로이 산책했다. 그리곤 택시를 타고 읍내로 향했다. 섬진강 이야기를 하다가, 택시 기사님이 잠시 차를 멈추고 섬진강을 짧게 구경할 수 있도록 시간을 내주셨다. 살다 보면 잊어버리고 마는 내가 사는 지역의 아름다움, 기사님은 구례의 아름다움을 매일 기억하고 있음이 느껴졌다.

 

그러니까 이 말이다. 코로나와 더위로 여행을 못 가는 건 아쉽지만, 다음 여행을 기약하며 글과 사진으로 여행지를 느껴보는 건 즐거운 일이다. 이 글을 시작으로 더 많은 사람이 구례에 관심을 갖고, 직접 만날 그날을 바라게 되면 좋겠다. 구례에는 지리산과 섬진강이 품은 자연의 아름다움이 있다. 그리고 그 속에 하루하루 성실하고, 다정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자연과 사람, 작지만 큰 기쁨과 신비를 담은 구례를 만나보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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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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