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생동하는 과거 [영화]

영화 <엉클 분미>(2010)
글 입력 2021.07.23 1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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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은 보통 억울한 존재들이다.

 

그들은 강자에 의해, 크게는 권력에 의해 억울한 일을 당하고 사람들에게서 잊힌 채 삶과 죽음의 경계를 배회한다. 가해자에 의해 은폐된 역사의 뒤틀림 속에 사는 그들은 자신들을 발견하고 기억해 줄 사람을 기다린다. 어떤 면에서 유령은 굉장히 정치적이고 역사적인 존재다.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의 <엉클 분미>는 역사의 유령에 관한 영화다. 영화는 삶과 죽음, 존재와 비존재의 경계가 희미한 정글이라는 공간을 통해 태국 근현대사의 혼란 속에서 생겨난 유령을 지금 여기에 불러내고 기린다.

 

전통적인 서사 구조를 따르지 않고, 윤회 등의 불교적 요소를 자주 사용한 탓에 <엉클 분미>를 포함한 아핏차퐁의 영화는 난해하고 신비주의적이라는 편견이 있지만, 잘 뜯어보면 그의 영화는 꽤 정치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다.

 

 

엉클분미 1.jpg

 

 

주인공 분미는 전생을 기억하는, 일반적인 윤회의 기제에서 벗어난 인물이다. 전생을 기억하는 그의 삶은 개인화된 역사 그 자체며, 그는 거대 담론에 희생당한 역사의 유령들을 기억하고 기릴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존재다. 그런 그의 앞에 태국 근현대사의 혼란 속에서 억울한 죽음을 맞은 유령들이 나타나는 건 당연해 보인다.

 

그러나 전생의 기억을 잊지 못하는 것은 일종의 저주이기도 하다. 신장병을 앓는 그는 자신을 돌봐주는 처제에게 자신의 병이 업보라고 말하는데, 이는 분미가 과거 국가의 명령으로 공산주의자 탄압에 가담했기 때문이다. 몸의 불순물이 제대로 배출되지 못하고 계속 쌓이는 그의 병은 자신의 과거를, 그리고 전생을 잊지 못하는 그의 삶을 은유한다. 분미에게 자신이 앓는 병에 대한 의문은 자신의 삶에 대한 의문과 맞닿아 있는 셈이다.

 

영화의 초반부에서 그는 요양을 위해 처제인 젠, 그리고 처조카 통과 함께 정글과 맞닿은 시골 마을로 이주한다. 정글은 모든 것의 경계가 희미해지는 신비로운 공간인 동시에 태국 근현대사의 아픔이 담긴 공간(많은 사람들이 정부의 탄압을 피해 정글로 도망쳤다)이다.

 

분미가 도시를 떠나 정글이 있는 시골로 향하는 것은 죽음의 목전에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존재의 의미를 찾는 과정이다. 사방이 닫혀 있는 도시와 달리 정글과 맞닿은 개방적인 공간으로 가득한 시골에서 그는 비로소 벗어난 존재들을 마주한다.

 

 

엉클분미 2.jpg

 

 

오래전에 죽은 아내와 정글에서 실종된 후 원숭이 유령이 되어 돌아온 아들처럼 잊힌 존재와의 대화를 통해 전생을 기억하는 분미의 업보는 존재의 의미로 승화한다.

 

분미는 그들과의 대화를 통해 혼란스러운 태국의 근현대사에서 잊혀 간 개별자들을 기억해야 하는 자신의 역할을 깨달았을지도 모른다. 이런 맥락에서 유령은 장소가 아니라 생명체에 머문다는 분미의 아내의 말은 영화를 관통한다. 유령은 정글에 묶인 존재가 아니라, 누군가에게 기억되어야 하는 존재인 것이다.

 

그렇기에 분미의 죽음을 다루는 영화의 후반부는 그의 죽음으로 잊히게 될 모든 것들을 어떻게 지켜내야 하는지에 대한 물음으로 확장된다. 분미가 숨을 거두기 직전 그는 자신의 다음 생에 대한 꿈, 즉 미래를 이야기하는데, 이는 특이하게도 과거 태국의 북동부 지역에서 일어났던 정치적 탄압을 상징하는 몇 장의 스틸컷으로 제시된다.

 

미래의 이야기와 과거의 분절적인 파편, 그 사이의 공백을 채우는 지금 우리들의 시선은 단절된 시간의 층위를 하나로 묶어 잊힌 존재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그 이미지는 선형적이고 정태적인 역사성을 갖는 것이 아니라, 이 영화처럼 비선형적이고 생동하는 개별성을 지닌다.

 

분미가 자신의 몸에 쌓여 있던 불순물을 흘려보내고 편안하게 죽음을 맞는 장면은 기억하는 자로서 그의 역할이 비로소 끝났음을 암시한다. 그리고 그 역할은 영화를 보는 모든 이들에게 옮겨간다.

 

 

엉클분미.jpg

 

 

줄곧 시골과 정글의 모습을 보여주던 영화는 마지막 장면에서 도시에서 일어나는 일을 보여준다. 젠의 가족은 호텔 침대에서 TV를 보고 있다. 젠은 통에게 야식을 먹으러 가자고 말하며 함께 방을 나서는데, 방을 나가기 직전 통은 기이하게도 TV를 보고 있는 자신들의 모습을 본다.

 

유체이탈을 연상케 하는 난해한 장면이지만, TV라는 매체가 주로 거대 담론의 전달자임을 생각하면 이 장면은 TV를 통해 일방적인 시선으로 세상을 보는 데 그치지 말고 밖으로 나가 직접 세상과 부딪히며 자신의 시선을 만들어야 한다는 뜻으로도 읽을 수 있다.


<엉클 분미>의 서사가 명료하지 않은 이유도 비슷한 맥락일 것이다. 영화를 보는 관객은 서로 관련이 없어 보이는 사건의 조각들을 자기 나름대로 배치하고, 연결하고, 의미를 부여하면서 과거를 살아 움직이게 할 준비를 마친다.

 

누군가가 매끈하게 다듬은 이야기를 아무 생각 없이 수용하는 것에서 벗어나 불편하고 귀찮은 사유의 과정을 거쳐야만 우리는 잊혀 가는 존재를 우리 나름의 방식으로 기억하고 기릴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되는 것이다.

 


[박호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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