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영화예술의 순례자, 타르코프스키 - 시간의 각인 [도서/문학]

글 입력 2021.07.23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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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수도승이 양동이에 물을 길어 한 걸음 한 걸음 산으로 걸어가서 시들어버린 나무에 물을 준다. 그는 자신의 행동이 필요하다는 데 일말의 의심도 없고, 창조주에게 믿음의 기적을 바라는 신념을 단 한 순간도 잃지않는다. 그래서 수도승은 기적을 체험한다.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보니 나무줄기가 어린잎들로 뒤덮여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과연 기적일까?

이것은 진실이기도 하다.

 

- <시간의 각인> '희생' 중에서

 


영화가 탄생한 이래, 그 자체로 하나의 신화가 된 이름들이 등장했다. 서부극의 존 포드, 서스페스의 제왕 히치콕, 누벨바그의 고다르, 그리고 만인이 사랑했던 찰리 채플린의 위대한 코미디까지. 듣기만 해도 그 사람이 평생 투신해온 예술세계가 한눈에 조망 가능한 이름들이 있다. 그 가운데 한 명이 바로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Андре́й Арсе́ньевич Тарко́вский, 1932년 4월 4일 ~ 1986년 12월 29일)다.

 

시네필들에게 타르코프스키는 가깝고도 먼 이름이다. 사색의 향연으로 불리는 그의 명징한 이미지는 평소 영화의 예술성에 감화된 영화 팬들에게 큰 울림을 주지만, 프레임에 각인된 그의 시간들은 그 자체로 형언하기 힘들기에 자신을 감화시킨 눈앞의 실체를 쉽게(정확히는 설득력 있게)  이야기할 수 없다. 한눈에 확인할 길이 없는 커다란 산맥을 맞이했을 때의 압도됨, 혹은 그로 인한 두려움이 곧 타르코프스키라는 이름을 접했을 때의 영화팬들의 심정과 유사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타르코프스키가 직접 저술한 <시간의 각인>은 아득하게만 느껴진 그의 바다와 같은 작품세계에 조금이라도 접근할 수 있는 유용한 저서이다. 물론, 책을 번역한 라승도 번역가의 후문처럼, 러시아 작가들에게서 공통으로 나타나는 만연체 전통이 독자의 가독성을 방해할 수 있다. 그럼에도, 영화 예술에 일평생 헌신해온 한 감독의 진심만큼은 문화예술을 사랑하는 대다수 독자들에게 제대로 전달될 것이다.

 

 

 

30년만에 다시 돌아온, 위대한 예술가의 숭고한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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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감독의 깊이를 결정하는 가치 지향의 결정적 기준은 그가 무엇을 위해 영화를 찍느냐는데 있다고 나는 말하고 싶다. 어떻게, 어떤 방법으로 찍느냐는 전혀 본질적인 것이 아니다.

 

- <시간의 각인> '영화 속 이미지' 중에서

 


<봉인된 시간>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된 지 30년 만에 재번역본으로 출간된 <시간의 각인>은 평생을 영화예술에 헌신해온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집념 어린 행적과 예술가로서의 신실한 사념이 기록된 서적이다. 첫 번째 장편인 <이반의 어린 시절>을 시작으로 단 7편의 장편 영화만을 제작했지만, 매 작품마다 심도 있는 영상과 고유의 시적 리듬을 기반으로 한 타르코프스키의 시간들은 현재에 이르러서도 영화 팬들에게 큰 울림을 전달한다.

 

유일하면서도 인위를 거부하는 그의 예술관을 확인할 수 있는 <시간의 각인>에서는 장편 데뷔작을 시작으로 촬영 현장에서 자신이 추구하려던 방법론과 이를 구현해내는 과정에서 발생한 불가피한 갈등들이 기록돼있다. 더불어, 영화뿐만이 아닌 문화예술과 관련한 자신의 이상 및 이를 추구해야만 하는 예술가로서의 소명의식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쉽게 접근하지 못했던 타르코프스키라는 높은 산맥을 등단하는데 좋은 가이드 역할을 제공한다.

 

 

 

진실을 파고드는 인물들의 연약한 몸짓,

고국 러시아를 향한 가슴시린 노스탤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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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영화 <노스탤지어>, 1983년)

 

 

타르코프스키의 영화 속 인물들은 전부 내면의 연약함을 내포한 채 눈앞에 드리운 고난과 직면한다. 감독 스스로 연약한 인물들에 주목했던 만큼, 그의 영화 속 주인공들은 언제나 직면하게 된 고난 앞에서 수난에 가까운 고통을 겪을지언정, 결코 무너지지 않는다.

 

눈앞에 직면한 수난을 저마다의 방식으로 극복하는 과정에서 타르코프스키의 인물들은 이제껏 눈여겨보지 못했던 세상의 진실을 비로소 마주한다. 진실을 마주하기까지의 과정은 언제나 힘겹게 드러나는 것을 타르코프스키 스스로가 인정이라도 한 것처럼, 영화상에서는 극도의 엄숙함과 위엄을 갖춘 채 구현된다.


더불어, 그의 작품 속에서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정서로서 노스탤지어는 타르코프스키 책에서 강조하듯 타국에 자리 잡은 러시아인들이 겪을 수밖에 없는 민족의 질환을 반영한다. 작품 전반에 깔린 아련한 향수의 감정은, 실제로 망명자 신분을 얻게 된 후반기에 접어듬으로써 그러한 정서가 더욱 작품 내 고취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령, 그의 마지막 작품인 <희생>의 경우, 파괴될 운명인 세계로부터 지키고자 하는 주인공의 진심 어린 행위가 묘사되는 과정에서 고국을 그리워하는 감독의 그리움으로서의 정서가 짙게 깔려있다. 이는 타르코프스키의 작품 전체를 설명할 수 있는 키워드는 분명 아닐지언정, 그가 내심 품고 있던 고국을 향한 사랑과 그리움을 매번 가지고 있었다는 점과 더불어 제작 과정에서 이를 굳이 숨기지 않으려 했다는 것을 반증한다.

 

 

 

삶을 기반으로 한 진실로서의 예술을 추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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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영화 <거울>, 1975년)


 

나는 인간에게 희망과 믿음을 주는 예술을 지지한다. 그리고 예술가가 이야기하는 세계가 더 절망적이면 절망적일수록, 어쩌면 그런 세계와 반대되는 이상이 그만큼 더 분명하게 느껴져야만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살 수 가 없을 것이다!

 

예술은 우리 존재의 의미를 상징한다.

 

- <시간의 각인> '예술가와 책임' 중에서

 


인위가 가미되지 않은 독창적 형태로서의 예술은 타르코프스키가 영화를 통해 추구하려던 필생의 테마다. <시간의 각인>에서 타르코프스키는 자신이 지향하는 예술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매번 예술가들이 지양해야 하는 지점으로서 자신을 속이고 대중에 천착하려는 태도를 지적한다.

 

사변적이라고 일컫는 예술가들의 속세 지향적 태도는 그 자체로 예술가의 윤리에 철저히 어긋난다는 것을 매 챕터마다 타르코프스키는 강조한다. 그 과정에서 타르코프스키는 오늘날 사람들이 최고의 예술가로 일컫는 감독들을 거침없이 언급함으로써 예술을 향한 자신의 타협 없는 태도를 유감없이 드러낸다.


타르코프스키는 종종 자신을 가장 혼란스럽게 하는 말로서 이미지의 상징을 확인하려는 관객들의 질문을 꼽는다. 타르코프스키가 지양하는 예술가의 인위는 창작자의 의도가 다분히 개입된 것이 눈에 띄는 상징 활용에 기인한다. 타르코프스키는 오로지 현실을 관찰한 자신의 시각을 담은 이미지에 의미 따위는 철저히 없다는 것을 공공연히 강조한다. 창작자의 의도가 눈에 띄는 영화 속 장치들이야말로 예술 본연의 아우라를 헤치는 결정적 행위이다.


<시간의 각인>은 말 그대로 프레임에 새겨진 시간의 이미지야말로 온전한 형태로서 영화 예술을 입증한다는 타르코프스키의 신념을 가리킨다. 산문과 회화에 비해 상대적으로 자체적인 역사가 짧은 영화라는 매체만의 예술적 특성을 소멸시키지 않는 것이 예술가로서 감독이 지켜야 할 윤리임을 타르코프스키는 설파한다.

 

 

 

온전한 형태로서 영화의 예술성을 탐구한 순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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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예술은 자체의 법칙에 따라 탄생하며 존재한다.

 

- <시간의 각인> '시간의 각인' 중에서

 


영화 예술을 온전히 지탱하는 요소로서 타르코프스키는 쇼트와 쇼트 사이에서 유려히 흘러가는 리듬을 언급한다. '시간'의 압력으로 일컫는 영화만의 리듬은 마치 조각 속 시간의 압력을 고려하며 결합하는 방식으로서 우리가 흔히 일컫는 '편집' 행위를 통해 완성된다.

 

그가 강조하는 리듬은 어디까지나 그 예술가만이 구현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개성이 낳은 결과물이다. 타르코프스키가 리듬을 강조한 건 영화라는 매체가 지닌 복합성이 유발할 수 있는 온전한 형태로서의 영화 예술의 소멸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문학 혹은 회화의 성질에 몰두한 나머지 영화라는 매체만이 구현해낼 수 있는 특질들이 상실되는 건 진정한 영화 예술이 아니라는 타르코프스키의 진언은 일생을 영화에 바친 한 예술가의 열정을 상기시키는 대목이다.

 

타르코프스키 스스로가 공언했듯이, 이상으로서의 예술을 추구하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다. 그는 영화산업에 내포된 어쩔 수 없는 자본주의적 논리를 언급하며 순수 예술로서 영화를 제작하기 힘든 현실을 한탄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술가로서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지켜나가야 할 윤리를 수차례 강조한다. 점차 파국으로 치닫는 문명의 발달 속에서 반드시 지켜야 할 미덕을 타르코프스키는 자신의 작품 속에서 구현되길 고수했다.

 

앞서 언급했듯이, 타르코프스키의 인물들이 연약하다는 말은 다른 의미에서, 사람들이 미처 실감하지 못하는 세상의 고통을 몸소 느낄 만큼 예민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드러낸다. 세상이 떠안은 고통을 마치 나의 것인 것처럼 몸부림치고 극복하고자 하는 몸짓은 이성에 기반한 우리의 해석으로서는 이해 못 할 행위에 불과하지만, 예술을 통해 진실에 도달하려는 사람들의 눈에는 타르코프스키의 진언으로 다가온다.

 

 

 

오늘날 타르코프스키를 경험하는 것,

잃어버린 존재의 의미를 되찾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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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믿음과 사랑, 소망, 아름다움, 기도처럼 인간이 할 수 있는 최고의 것을 긍정해준다.

 

- <시간의 각인> '결론' 중에서

 


때로는 지나치게 침묵으로 일관하는 타르코프스키의 (악명 높은!) 롱테이크를 두고서 "지루하다"라는 말과 함께 전체적인 그의 작품세계를 섣불리 치부해버릴 수 있다. 혹은, 진실을 향한 예술에 헌신해야 하는 예술가들의 책임의식을 강조하는 그의 비타협적인 태도가 엄숙하다 못해 교조적인 인상을 줄 수도 있다. 그럼에도, 오늘날 여전히 그가 프레임에 새겨놓은 시간들이 끊임없이 상기되는 이유는, 국경과 문화의 차이를 막론하고서 온 인류에게 필요한 선(善)을 예술로 승화시켰기 때문이다.

 

말로만 자신의 이상을 촉구해온 것이 아닌, 결과물로서 자신의 믿음과 이념을 몸소 실천해왔다는 점이 <시간의 각인>을 통해 드러낸 타르코프스키의 굳건한 예술가로서의 의식을 더욱 빛내게 해준다. 내 앞의 타인, 그리고 그 너머 세상의 올바름을 전파할 수 있는 미덕으로서의 시간을 끊임없이 프레임에 담고자 했던 타르코프스키의 예술상은 어찌 보면 이상적으로 보이지만, 그럼에도 오늘날 여전히 타르코프스키의 시간들이 상기되고 거론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런 의미에서, 타르코프스키를 수식하는 표현으로서 영화예술의 순교자 만큼 더 어울리는 단어 선택은 없다. 영화가 지닌 예술의 무한한 가능성을 바탕으로 자신의 작품을 통해 인간의 존재 의미를 고찰할 수 있는 시간을 선사한다. 짙은 무언(Muteness)의 시간을 감내한 수도승처럼, 타르코프스키의 영혼이 반영된 작품들은 기본적인 가치를 쉽게 망각하는 사람들에게 존재의 의미를 되묻는다. 어쩌면, 바로 지금이야말로 숭고한 마음을 담아 프레임에 새겨놓은 한 순례자의 시간이 필요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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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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