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꾸미는 사랑에는 이유가 있어 [드라마/예능]

글 입력 2021.07.16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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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나 영화 속 대사를 읽다가 뜬금없이 깊은 생각에 빠지고는 한다. 그런 시간을 누려 본 작품은 대부분 인상 깊거나 꽤 재밌었던 작품으로 기억한다. 시간 보내려고 영화를 보다가 그럴 때도 있고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확실한 작품을 보다 그럴 때도 있다. 그 작품의 감독이 본래 전달하려던 게 무엇이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여기는 사람이다. 내가 그것을 감상하면서 뽑아낸 것이 더 중요하다. 예술은 제작자와 감상자의 상호 작용 속에서 태어난다는 쓸만한 핑계로 내 의견을 정당화해본다.


나갈 일이 잘 없어서 다시 왓챠를 구독하고 만인의 최애 작품인 ‘메인 화면’으로 2시간 정도 보내고 작품 골라서 1시간 정도 보내는 삶을 살고 있다. 일본 영화나 애니메이션을 자주 보던지라 더 나아가서 드라마에도 손을 뻗고 있다. 그럭저럭 괜찮은 작품을 두루 봤고, 최근에는 ‘꾸미는 사랑에는 이유가 있어’라는 드라마에 빠졌다. 전개 자체는 대단히 가볍고 부드럽게 흘러가지만 중간중간 던지는 별것 아닌 대사 한 마디가 꽤 울림이 크다.

 

 

 

행복; 딜레마의 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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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은 실체가 존재하는 대상이나 물질이 아니라 크기를 따질 수가 없다. 그런데도 우리는 큰 행복이나 작은 행복이라 말한다. 소소한 행복에 만족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게 그런 부류의 말 중에 하나다. 구태여 행복의 크기나 양을 잰다면 그건 온전히 행복을 느끼는 개인이 그 기분에서 얻는 성취나 만족감, 혹은 기쁨을 어느 정도로 강렬하게 받아들였는지에 달렸다. 지구상에 어림잡아 70억 정도의 사람이 살고 있으니 행복의 기준도 70억 개 정도 있다고 보면 되겠다. 그냥 측정하지 말라는 소리다.


나는 행복의 총량에 대해서 풀어내고자 한다. 한 문장 쓸 때마다 기억이 삭제되는가 싶겠지만 내가 떠들고자 하는 것은 숫자로 표현되는 수치가 아니다. 매우 두루뭉술하고, 몹시 추상적이며, 아주 주관적인 내 관점에서 바라보는 행복의 총량과 그 양을 측정하는 기준을 말할 뿐이다. 내 글을 읽고 공감한다면 좋을 일이고 공감하지 못해도 좋은 일이다. 전자의 경우는 나와 비슷한 기준을 가졌기에 비슷한 것을 공유할 수 있고, 후자의 경우라면 전혀 다른 기준에서 새로운 행복을 찾아 나갈 수 있다.


행복은 딜레마가 안겨주는 선물이다. 내 마음대로 얻거나 버릴 수 없기에 행복은 큰 기쁨을 가져온다. 내 의지로 결정할 수 없을 확률이 높으면 클수록 좀 더 큰 행복으로 다가온다. 맛있는 걸 먹을 때도 행복하지만, 원한다면 언제든 먹을 수 있기에 그 행복이 크지는 않다. 사랑하는 누군가와 연인이 되는 것은 내 의지만으로 되는 일이 아니기에 상대와 맺어졌을 때의 행복은 말로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로 크다. 오랜 시간 동안 혼자 속으로만 앓다 마침내 맺어진다면 그 행복과 그로부터 오는 감동은 더 클 것이다.


행복이 내 의지에서 벗어날수록 그 총량이 커지기에 기대치 못 했던 행복일수록 더 큰 행복으로 다가온다. 오히려 내가 행복을 임의로 결정지을 수 있다면 그건 불행이다. 고생과 기다림 끝에 얻는 달콤함이 얼마나 깊은 맛을 내는지를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그 기다림 없이 원하는 족족 얻는다면 행복은 행복이 아니라 그저 그런 무언가일 뿐이다. 행복은 어느 순간 찾아오고, 어느 순간 사라졌다, 오지 않겠구나 싶을 때 불쑥 나타나야만 하는 존재다.

 

 


꾸미다; 꾸며야만 할까? 적어도 처음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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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에서는 ‘꾸미다’를 ‘모양이 나게 매만져 차리거나 손질하다’, ‘거짓이나 없는 것을 사실인 것처럼 지어내다’로 정의한다. 나를 꾸미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라 설명할 때는 전자의 의미로 사용한다. 저 사람은 자기를 잘 꾸민다거나 좀 꾸미고 다니라는 말을 할 때도 같은 의미로 통한다. 나도 싫다는 사람에게 강요하지는 않지만 넌지시 한 번은 꾸며보라고 권유하는 편이다. 술 좋아하는 사람이 같이 술 먹자고 불러내는 것과 비슷하다.


연인 관계로 발전하기까지의 과정에는 ‘꾸미다’라는 행위가 필연적으로 동반된다. 가장 좋은 모습으로 호감을 얻고 싶다는 본능의 산물이다. 그냥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좋아하는 사람이 진짜 사랑이라는 사람도 꽤 있다. 세상 물정 모르거나, 철이 없거나, 현실은 모르고 낭만에 차 있거나, 노력 없이 날로 먹으려는 사람이다. 있는 그대로의 서로를 이해하고 받아들여 사랑하는 단계는 시작이 아니라 끝에 도달해야 할 영역이다. 꾸며진 모습에만 얽매이는 것도 안 될 일이지만 처음부터 ‘이게 나니까 받아들여’라는 태도를 보이는 것도 옳지 않다.


처음에는 부단히 꾸미다가도 서로 사랑하는 시간이 오래될수록 점점 자신의 본모습을 드러낼 수밖에 없게 된다. 그건 사랑이 식는 게 아니라 사랑이 변해가고 성숙해가는 과정일 뿐이다. 그 과정에서 사랑은 여러 가지를 보여준다. 이 사람이 꾸며낸 모습은 어떤 것이고, 꾸며내지 않은 자연스러운 모습은 어떠하며, 후줄근하게 망가졌을 때는 어떻게 되는지까지 보여준다. 그 모든 것을 하나씩 배워가면서 사랑은 점점 깊어지고 내가 사랑하는 누군가를 받아들여 간다. 이 순서를 건너뛰고 처음부터 마지막 단계에 발을 딛기를 바라는 건 어불성설이다. 하지만 꾸민 모습으로 누군가의 호감을 얻으려는 사람이 속물인 게 아니라 그 단계를 전부 건너뛰려는 사람이 날로 먹으려는 사람이다.

 

 

 

Epilogue; 정답은 없다.



아직 이 드라마의 마지막 화를 보지는 않아서 결말을 모른다. 결말을 알게 된다 해도 내가 이 드라마로부터 읽어낸 메시지의 내용은 달라지지 않는다. 예술은 정해진 답이 있는 문제가 아니다. 창작자가 어떤 의도를 담았건 간에 내가 읽고 얻어 낸 것이 곧 그 작품이 가진 의미가 된다. 결말을 알게 되더라도 내가 이미 읽어버린 의미에 약간의 다른 의미가 더해질 뿐이지 그것이 사라진다거나 오답으로 처리되지는 않는다. 이 작품은 반드시 이 의미로만 해석해야 한다고 말하는 작가가 있다면 그 사람은 자신을 예술가라고 부를 자격이 없다.


학창 시절에 미술이나 음악 수업을 들을 때면 작품을 만드는 기초적인 기술이나 역사 따위만 가르친다. 전문가나 평론가의 정해진 해석을 주입한다. 작품을 어떤 방식으로 감상하고, 어떻게 자신만의 의미를 추출하는지는 가르치지 않는다. 덕분에 우리는 그런 방법을 직접 발로 뛰어 배우기 전까지는 창작자가 숨겨 둔 의미를 읽어내는 것이 곧 정답이라는 착각에 빠진 채로 살아간다. 예술과 소통하는 방법을 배워가면서 차근차근 그 늪에서 빠져나온다. 애초에 그 늪에 던져진 상태로 시작점에 서 있다고 보는 게 더 정확하지 싶다.


예술에 정답은 없다. 내가 어떻게 해석하건 내가 만든 그 해석이 곧 그 작품에 대한 나의 정답이다. 드라마나 영화를 봐도 전체 줄거리와 연출 방법을 분석하며 감독의 의미를 읽어내려고 할 필요는 없다. 나와 비슷하게 누구는 아무렇지 않게 넘길 한 줄의 대사에서 그 작품 전체의 감동을 얻더라도 자기가 만족한다면 충분하다. 감독은 자기 나름으로 자신의 메시지를 담아 작품을 내놓은 것으로 모든 역할을 완수한다. 그 완성본에서 어떤 것을 떼어내 것으로 할지는 온전히 그 작품을 감상하는 사람에게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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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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