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ROTEA] THE WORLD 21: 완벽하고 지고하신 모순

글 입력 2021.07.14 1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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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쓸 때마다 떠오르는 심상이 있습니다. 바로 글을 쓸때마다 자동으로 동그라미 모양으로 글이 모아지는 상상입니다. 시작하는 단어와 끝 문장이 맞닿을 때 저의 망상은 최고조에 이릅니다. 동그란 원은 하나의 세계로 모아집니다. 글에 빼곡하게 박혀있는 어리석은 생각, 스스로를 경멸하게 만드는 망상들은 동그란 원 밖을 나가지 않습니다. 문장의 첫 단어와 문장의 끝인 . 가 닿는 순간, 한심하게 쏟아지는 구멍에 마개가 끼워집니다.

 

이전 연재물에서 언급했듯, 저는 저의 이야기를 쓰는 데 있어서 대단한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글에서 비쳐보이는 자의식의 부산물들을 바라보는 것은 정말 짜증나는 일입니다. 그런 점에서 성교육 과제라는 비유는 아주 적절하다고 봅니다. 이 안에는 숨길 수 없는 판타지와 그로인해 드러나는 무지와 순수함이 뷔페처럼 전시되어 있거든요. 저는 그래서 글을 씀으로서 나를 드러내보내기 보다, 하나로 수축되어 사라지길 바랍니다. 말하자면 지금 제가 써내려가는 이 글자들과 거기에 박힌 상념은 하나하나는 탄생하는 것이 아니라, 버려지는 셈입니다.

 

여기까지 쓰고보니 새로운 생각도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학창시절 저는 의무와 책임을 어딘가 던져놓고 그림을 그려댔습니다. 이세계 환생을 위해서 이세계 트럭도 필요없었습니다. 타블렛과 풍부한 망상만 있으면 충분합니다. 좌우간 제가 뱉어낸 글자나 선이 만들어낸 또다른 세계는 최악의 만족감을 주곤 했습니다. 하지만 그 끝은 대충 비슷했습니다. 저는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그림이 존나 싫다". 물론 지금이랑 같은 의미입니다. 10년이 지나도 이런걸 보면 이런 습관도 영영 버릴 수 없는가 봅니다.

 

이 글을 읽으면서 "그래서 어쩌란 거지?"라는 생각이 들었다면, 아주 합당한 생각입니다. 저는 경멸을 전시하기 위해서 이 글을 시작한 것이 아닙니다. 저는 그 생각의 어리석음을 고백하고자 합니다. 동그랗게 그려진 자의식에 찬 거울은 여전히 혐오스럽지만, 제가 틀렸습니다. 어리석은 세계를 견고한 성인 것마냥 지키면서 사는 것은 경멸할 일까지만은 아닌듯 합니다.

 

일련의 과정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우선 극단 산울림에서 올린 작품 이야기를 해야합니다. 최근 산울림은 헤밍웨이의 삶을 건조하게 다룬 작품을 올렸습니다. 자칫하면 헤밍웨이의 모순적 삶을 고발하는 작품이 될 수 있음에도, 극단은 '노인과 바다'와 엮음으로써 헤밍웨이의 삶과 예술에 대한 판단을 관객들의 손으로 넘겨주었습니다.

 

실제로 그의 삶을 함께 곁들여 읽는 '노인과 바다'는 정말 새로웠습니다. 노인과 바다에서 등장하는 노인 산티아고는 삶이라는 지루한 지옥과 맞서싸우는 성실하고 강한 인간이지만, 정작 헤밍웨이 본인은 그러한 남성상에 얽매여 신경증으로 고통받고 자살하고 마는 연약한 인간이었습니다. 산티아고는 연약한 헤밍웨이가 뒤집어썼던 강한 남성의 가죽이었습니다.

 

저한테 이 연극은 정말 여러 감정을 느끼게 했습니다. 헤밍웨이가 지향했던 삶의 가치와, 그렇지 못한 작가 본인의 괴리가 저의 삶에서도 호소하는 바가 컸기 때문입니다. 노인 산티아고의 이야기를 보고 있노라면, 알베르 카뮈의 행복한 시지프스가 떠오릅니다. 그들의 이야기는 심금을 울리는 데가 있지만, 어딘가 씁쓸한 점이 있습니다. 필연적으로 다가오는 삶의 고통을 긍정하는 것과, 내 몸을 좀먹고 있는 고통을 부정하는 것은 아주 다르지는 않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래서 헤밍웨이의 삶을 일부 이해한 후 읽은 산티아고의 이야기는 이전보다 아름다웠습니다. 헤밍웨이는 자신의 가장 아름다운 자화상으로 산티아고 노인을 완성했습니다. 그는 삶의 고통에 맞서는 투우사인 동시에 늙고 지친 노인이며, 자연과 동화되길 바라며 소년의 순수한 애정을 그리워하는 노인이었습니다. 바다에는 현실에서 그가 닿길 바랬던 삶의 이상적인 영역과 그의 깊은 곳에서 억압되어 있던 감수성이 너울거립니다.

 

한 사람이 필사적으로 지키려는 환상이나 세계는 경멸스럽습니다. 그가 쌓아올린 세계는 그의 삶의 범위에서 멀리 벗어날 수 없는데도, 그는 여러 경험들로 인해 그것이 전부라고 믿게 됩니다. 소명이나 신념이라는 미명 아래에 한 사람의 무지와 착각이 들끓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한 사람이 필사적으로 지키려는 환상이나 세계는 아름답습니다. 그가 쌓아올린 세계는 그의 세계의 약간 밖에 있습니다. 그가 결코 경험할 수 없지만, 그가 꿈꾸는 가장 아름다운 가능성이 그곳에 있습니다. 백일몽과 환상이라는 이름 아래에 그 세계 아래에는 그만의 감수성과 갈망이 들끓습니다. 우리가 희망이라 부르는 것이 그 안에 있는 셈입니다.

 

아이러니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나요? 우리의 가장 미성숙한 부분이 가장 성숙한 부분이 될 수 있다는 점, 착각으로 만들어진 성이 그 사람이 꿈꿀 수 있는 가장 최선이 될 수 있다는 점이 말입니다. 이 아이러니를 떠올린 시점에서 [TAROTEA]를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의 주제는, '순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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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는 여정을 떠났고, 그 마지막 단계에 이르렀습니다. 바보는 자신이 길을 떠나온 것에 다시 돌아왔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처음에 그는 앞이 절벽인지도 몰랐으며, 그가 어디를 가야하는지도 몰랐습니다. 하지만 원점으로 돌아온 그는 다릅니다. 그는 몸, 정신, 영적 세계를 탐구함으로써 각각을 구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는 세계를 일부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출발점이자 도착점인 이곳에 도착한 그는 그 모든 세계가 하나로 엮였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정신과 육체, 과거와 미래, 개인과 세계는 하나의 자아와 같습니다. 그의 자아는 세계를 이해하는 출발점이자 도착점입니다.다시 바보가 되어, 그는 이제 절벽을 향해 마지막 발걸음을 내딛습니다. 하지만 그는 추락하지 않고 우주로 떠오릅니다. 그는 이제 우주와 하나가 되어 춤을 춥니다. 바보의 여정은 끝이 나지만, 이는 또다른 시작이기도 합니다.

 

'세계'카드는 젊은 여성이 중심에서 춤추고 있는 카드입니다(일부 사람들은 양면의 화합에 초점을 맞추어 자웅동체라고 이야기합니다). 중심에 있는 젊은 여성은 모든 것이 태어나게 하는 위대한 어머니입니다. 그는 죽음 이후의 삶을 연결하는 문이기도 합니다. 그녀의 발은 교차하고 있습니다. 이는 매달린 남자를 떠올리게 합니다. 실제로 매달린 남자를 거꾸로 하면 세계에 등장하는 여성의 모습이 됩니다. 댄서는 매달린 남자의 반대 모습입니다. 매달린 남자가 그 자신을 무한히 들여다볼 때, 댄서는 무한히 뻗어나가는 바깥 세계를 관찰합니다.

 

'세계'카드는 동시에 '전차'카드의 반대이기도 합니다. 전차는 전진하거나 후퇴합니다. 전차는 결코 빙글빙글 돌수 없는데 비해, 세계 카드는 회전 목마처럼 빙글빙글 돕니다. 전차가 전진하고 후퇴하는 것은 승리와 패배로 이어질 수 있는 반면, 세계에서는 어떤 곳에 위치하더라도 훌륭하고 흥미롭습니다. 각 모서리에 위치하는 것은 다르지만 위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꼬리를 물고있는 뱀과 화환은 무한함을 의미합니다.

 

각 모서리에 초점을 두자면, 각각 사자, 황소, 아기천사, 독수리가 있습니다. 이는 전차 카드에서도 찾을 수 있는 상징이기도 합니다. 그때도 언급했듯, 각 상징은 타로카드의 네 가지 요소, 나침반의 네 방향, 사계절, 우주에서의 네 모서리를 상징합니다. 이는 모드 춤추는 사람의 시야와 힘 안에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세계카드는 전반적으로 해방된 자아를 의미합니다. 자아는 통일된 상태에 도달하였고, 이곳에서는 음과 양이 모두 합쳐져 있습니다. 모순이 존재하지만, 그러한 모순이 모두 정답인 세계인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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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왜 이 카드를 엮어 쓸 생각을 했냐고 물어본다면, 글쎄요. 뭐라 말하긴 어렵지만, 저는 이 카드가 우리가 살아가면서 떠올리는 한심한 환상과 한계, 그것들의 가능성을 가장 아름답게 표현한 카드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는 가장 끔찍한 것을 통해 가장 아름다운 것들을 키워냅니다. 헤밍웨이 개인의 삶은 최악이었고, 그가 꿈꾼 세계도 한심한 면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래서 그가 갈망해온 세계는 아름답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어떤 차원에서 모순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구분할 수 없지만, 삶의 어느 순간에 깨닫게 될지도 모르겠지요. 사실 깨닫는게 답도 아니고,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그냥 발전없이 한심하게 살아가는게 인생의 최선일 때가 있거든요. 안 그래도 복잡한 세상에서 죄책감까지 느껴야겠습니까? 그냥 할 수 있는걸 하면서 살아가는거죠.

 

그래서 이 글을 쓰는 순간까지, 저는 둥그런 모양의 글을 쓰는 상상을 합니다. 앞서 말했듯 버리는 과정이지만, 어쩌면 반대로 무언가를 만들어내려는 강렬한 의지의 표현일지도 모르죠. 뭐가 뭔지 정의할 생각은 없습니다. 솔직히, 별로 그렇게 중요한 고민이라는 생각도 안들어요. 답을 찾으려는 행위 자체가 좀 우스운 삽질처럼 느껴지기도 해요. 28살에 자아찾기? 예술의 의미 찾기? 이상이나 신념에 답을 찾기? 솔직히 최불암 시리즈보다 웃기거든요.


이걸로 제 연재물이 드디어 끝이 납니다. 끝을 앞두고 나니 왜 이 시리즈를 시작했는지를 생각하게 되네요. 개인적으로 솔직히 밝히자면, 타로티 시리즈가 진심으로 그 어떤 독자에게 어떤 감상도 남기지 않길 바랍니다. 어떤 감동을 주질 않길 바란다는 뜻입니다. 이 글은 그냥 허공에 주먹질 하는 한 사람의 이야기들이었을 뿐입니다. 사실 별로 치열하지도 않았죠. 글을 쓴 사람으로써 밝히자면, 당신이 이 글을 주변 병신 친구의 한탄으로 받아들였다면, 이 글은 최대의 목표를 달성한 셈입니다. 반대로 당신이 이 글이 어떤 의도나 메시지를 이야기하려한 것처럼 받아들였다면, 이 글의 최악의 목표를 달성한 셈입니다.

 

후자였다면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그건 내 의도는 아니었지만, 내가 가진 한심함의 부산물의 결과겠지요. 그래도 여기까지 읽어준데다가 어떤 감상까지 가지게 된, 진짜 끝내주는 인내심을 가진 선생님들에게는 감사드립니다. 제가 특별히 드릴건 없지만 내일 아침, 점심, 저녁 밥 중 한끼는 맛있는거 먹길 기원해드리겠습니다.

 

 

[손진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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