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트립 투 그리스 - 부캐의 10년을 마무리하며 [영화]

글 입력 2021.07.12 20:37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작년 이맘때쯤만 하더라도 이른 시일 내에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온라인 수업과 재택근무는 일시적 대비책이 아닌 뉴노멀로 자리 잡았고, 해외여행은커녕 국내 여행도 안심하고 다녀올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한 달에 한 번 이상 영화를 보러 갈 정도로 자주 영화관을 들락날락해서인지, 극장에서 휴가를 즐긴다는 말에 크게 공감할 수 없었는데 이제는 영화관만큼 안전하고도 만족스러운 휴가를 즐길 수 있는 곳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8일 개봉한 마이클 윈터바텀 감독의 ‘트립 투’ 시리즈 네 번째 작품 <트립 투 그리스>는 ‘이 시국’ 휴가에 가장 적합한 영화라 할 수 있다.

 

시리즈의 주인공 ‘롭 브라이든’과 ‘스티브 쿠건’은 ‘옵저버’ 매거진의 제안으로 2010년 잉글랜드, 이탈리아, 2015년 스페인에 이어 그리스를 여행한다. 이번 여행은 영웅 오디세우스의 대서사시 ‘오디세이아’의 여정을 그대로 따라가는 여행이다.

 

‘트립 투’ 시리즈의 독특한 점은 배우들이 자기 자신, 그러니까 ‘본캐’의 탈을 쓴 ‘부캐’를 연기한다는 점이다. 두 배우는 영국 아카데미상(BAFTA)을 수상하거나 후보에 올랐을 만큼 유럽에서는 유명한 코미디언이자 배우다. 둘은 수상 경력이나 서로가 출연한 작품을 작중에 언급하기도 하며 현실과 영화의 경계를 흐린다.

 

 

 

오디세우스의 여정



9.jpg

 

 

카메라는 오디세우스가 오디세이아에서 10년간의 여정을 시작하는 터키 아소스, 아리스토텔레스의 출생지 스타기라, 델피, 에피다우로스 원형극장, 이타카에 이르기까지 우리에게는 이미지보다 텍스트가 익숙한 곳들을 비춘다.

 

오디세이아의 줄거리를 잘 모르는 이들이라도 롭과 스티브의 이야기를 들으면 각각의 장소에서 어떤 사건이 일어났는지 금방 알 수 있다. 지중해의 뜨거운 햇살을 받으며 문명이 남긴 흔적들을 둘러보는 대리 체험과 두 남자의 대화와 유적지 탐방 사이 곁들여지는 그리스의 코스 요리는 덤이다.

영화가 끝나고도 곱씹게 되는 것은 역시 현실과 영화가 맞닿는 지점이다. 영화 초반부, 롭과 스티브는 그리스 군대가 전쟁을 하며 10년이나 머물렀던 캠프의 흔적이 있는 곳을 찾는다. 그리고 다음 섬으로 건너가 빌린 차량을 찾던 중, 그곳에서 난민 캠프에서 생활하는 엑스트라 배우를 만나 집까지 데려다주게 된다.

 

내륙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거대한 텐트촌을 이루어 생활하고 있는 난민 캠프의 모습이 10년이나 한 자리에서 전쟁을 지속해야 했던 군대의 모습과 겹치며, 영화는 아름다울 것만 같은 관광지의 이면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드러낸다.

 

 


모방과 웃음


 

4.jpg

 

 

영화 대부분은 두 남자의 수다로 채워진다.

 

그리스의 풍경은 숨이 막힐 정도로 아름답고, 신선한 재료들로 조리되는 코스 요리도 오감을 만족시키지만, 뭐니 뭐니 해도 ‘트립 투’ 시리즈의 정체성은 이들의 수다라고 할 수 있다.

 

두 남자가 테이블을 두고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형식이나, 오디세이아의 여정을 따라 들른 유적지 등을 보며 예능 ‘알쓸신잡’이 떠오르기도 했다.

 



 

영화에 언급되기도 하는 ‘모방’은 작중 유머 코드를 형성하는 중요한 장치다. 롭과 스티브는 끝없이 유명인을 성대모사하고, 서로의 말투를 흉내 내기도 한다.

 

피식대학의 ‘한사랑 산악회’ 캐릭터가 부른 ‘Peaches’가 해외에서 인기를 끈 것처럼, 때로는 모방의 대상이 무엇인지 잘 알지는 못해도 모방한다는 사실만으로 웃음을 줄 때가 있다. 영화 속의 모든 농담을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종잡을 수 없는 대화의 흐름과 성대모사만으로 충분히 웃을 수 있었다.



시리즈의 끝


 

8.jpg



영원할 것 같았던 전쟁은 끝이 나고, 위대한 문명은 바위만 남아 유적이 되었다.

 

얼마든지 갈 수 있을 것만 같았던 해외여행은 이제 말 그대로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 되었고, 두 배우는 어느덧 소중한 사람과 이별해야 하는 나이가 되었다. 끝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은 영화 속 본캐의 탈을 쓴 부캐 롭과 스티브에게도, 영화 밖 본캐에게도 해당되는 말이다.

시리즈 전 작품을 다 보지 않았음에도, <트립 투 그리스>의 수다를 통해 오디세우스만큼이나 고단했던 이들의 세월과 여정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수다로 가득 채워진 영화가 여정의 끝에 어떤 것이 기다리고 있든, 매 순간을 웃음과 울음으로 만끽하고 기억한다면 그 과정은 의미가 있음을 전하는 것 같았다.


두 남자가 찾은 식당에서 서버가 메뉴를 안내하며 ‘벌써 즐기고 계시네요(Already enjoy)’라는 말을 한다. 여행과 미식의 즐거움은 준비하고 기다리는 과정부터 시작되기에, 영화를 예매한 후 여행하는 기분으로 영화를 ‘벌써 즐겼으면’ 하는 바람이다.

 


[김채윤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4.23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