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현실과 꿈, 그 사이 어딘가에서 [미술/전시]

기억을 탐구하는 작가, 이진주
글 입력 2021.07.10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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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들 ManDle, 2012, Korean colour on fabric, 130x163 cm.jpg

맨들 ManDle, 2012, Korean colour on fabric, 130x163cm.

 

 

어디서 봤던가? 잎이 다 떨어진 겨울나무에 앉아있던 까마귀들이 큰 소리에 놀라 날아가는 장면을.

 

아니, 자세히 보니 검은 비닐봉지들이다. 검은 비닐봉지들이 바람에 나뒹구는 모습, 노란색 깃발 혹은 천 쪼가리가 불에 타며 회색 연기를 만들어내는 모습. 공사장의 라바콘과 구조물, 어린이용 미끄럼틀, 해변의 의자와 파라솔... 내가 직접 봤던가? 아니면 꿈이었나? 내가 꾼 꿈이 맞긴 할까?

 

 

 

'꿈'같은 이야기


  

이진주 작가의 <맨들>을 마주한다. 얼핏 친근하게 느껴졌던 전체 풍경은 그림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사물들의 묘한 조합으로 바뀌고, 화면을 꼼꼼하게 관찰할수록 오히려 수수께끼처럼 혼란스럽다. 이 그림에서처럼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일상적인 사물들과 그들의 비논리적인 배치는 이진주 작가 작품의 특징이다.

 

마치 ‘꿈’같은 서술 방식이다. 개연성이 없는 사건,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광경, 시공간을 넘나드는 진행도 꿈속에서는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이질감을 느끼는 것은 꿈에서 깨고 나서의 일이다.

 

<앞집>처럼 파노라마 같은 그림들을 왼쪽부터 오른쪽으로 읽어나가다 보면 일관된 하나의 이야기가 아닌 관계없는 여러 이야기가 겹쳐있음을 알 수 있다. 꿈속 장면들이 툭 끊기기도 하고 다른 장면으로 급전환되기도 하듯이 그림 속 공간도 서로 관계없는 풍경들이 이어져 있다.

 


앞집 The Opposite House, 2012, Korean colour on fabric, 107x270cm.JPG

앞집 The Opposite House, 2012, Korean colour on fabric, 107x270cm.

 

 

 

기억을 파고들다


 

작가 노트에 따르면 이진주 작가 작업의 핵심은 ‘기억’이다.

 

 

마주 하고 싶지 않은 불편한 '환기' 속에서 무엇이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장치가 되는 것일까. 기억의 공통적인 구조들은 무엇일까. 잊혀지지 않고 살아남은 기억은 어떤 방식으로 가공되는 것일까. 알츠하이머에 걸린 사람들은 왜 과거의 기억만을 잃는 것이 아니라 현재를 살아 갈 수 없고, 미래를 상상할 수도 없는 것일까. 기억과 꿈과 의식의 경계는 어디일까. 시간성과 공간성을 뛰어넘은 기억의 인지 작용에서 나의 지각이 재구성하여 만든 이미지의 잔상은 어떤 것일까.

 

이런 물음들로 시작된 내적 탐구의 과정에서 가시화된 것이 나의 작업으로 기록된다.

 

- 작가 노트 中

 

 

기억의 구조, 작동 방식, 기능, 역할에 대한 질문들을 바탕으로 한 탐구와 사유가 그의 그림에 담겨있다. 머릿속 어딘가에 깊이 침잠해있던 것, 마주하기 두려운 것, 문득문득 떠오르는 것들을 수면 위로 끌어내어 집요하게 파고들고 구체화한다.

 

우리의 기억은 주로 감각적 자극에 의해 소환된다. 어떤 광경을 보고, 냄새를 맡고, 소리를 듣고 과거의 인물이나 상황이 떠오른다. 이진주 작가의 작품은 회화인 만큼 우선적으로 시각을 통해 우리의 기억을 자극한다. 그의 그림 속 일상적인 사물들은 보편적인 동시에 개인적인데, 쉽게 발견되는 사물이기에 많은 이들의 기억을 담고 있는 반면 그 기억들은 매우 다양하고 사적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빨랫줄에 널린 이불과 나무에 걸린 연에 담긴 사연은 아주 다양할 것이다.

 

하지만 더 나아가, 사물과 인물 형태의 사실적인 묘사는 후각, 청각, 촉각, 심지어는 미각까지도 자극한다. 매캐한 연기, 흙과 풀 냄새, 축축한 물의 감촉, 바람의 소리, 빨간 과일의 맛이 그림을 통해 느껴진다. 작가의 극사실적인 회화기법이 더 생생한 기억을 돕는 것이다.

 


가짜 우물 deceptive well, 2017, korean paint on linen, 260x528cm.JPG

가짜 우물 deceptive well, 2017, korean paint on linen, 260x528cm.

 

 

 

시공간을 부유하듯 떠다니는 이미지들


 

 

삶은 떠돌지만, 기억은 남겨진다.

시작도 알 수 없고 끝도 알 수 없는 어디든 떠돌아다닐 수 있는 고립된 섬과 같은 곳.

어디에도 있고 어디에도 없는 시공간을 관통하는 나약한 시선들.

자유연상과 같은 덩어리진 기억들의 집합들로 발현된 섬세한 오브제들.

격리되고 부서지고 묵시적인 동시에 은폐하지 않고 부서진 채로 서로 지탱하는 세계.

고정된 상징을 넘어선 감상자와 연합하여 파생되는 알레고리적이며 다의적인 이야기.

 

- 작가 노트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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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위부터 오른쪽 아래 순서대로 <시작>, <기도>, <씨앗>, <미완>, <빛>, <중심>. 

 

 

둥근 캔버스 안 칠흑같이 검은 바탕에 둥둥 떠다니는 손과 물체들은 시공간을 뛰어넘어 우주 혹은 깊은 심연을 부유하는 듯하다. 여기가 어디인지, 낮인지 밤인지 알 수 없는 곳에 놓여있다.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어느 순간 다시 나타날 듯한 이 이미지들은 소멸할 것 같아 연약하지만, 다시 떠오르리라는 희망이 있다.

 

작품 제목인 ‘시작’, ‘기도’, ‘씨앗’, ‘미완’, ‘빛’, ‘중심’... 발음하는 것만으로 가슴 벅찬 단어들을 소리 내보고 하나같이 소중한 것들을 쥐고 있는 손들을 보고 있자면 새로운 생명 혹은 세계의 탄생, 그 시작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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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Names, 2018, Korean paint on linen, 94x122cm. (출처: artistjinju)

 

 

All Names에서도 여러 형태의 손이 차원을 넘나들듯 맥락 없이 갑작스럽게 등장한다. 포크는 중력을 무시한 채 서 있고 기울어진 판 위에서도 똑바로 놓여있는 커피잔 속 액체는 흐르지 않는다. 현실의 법칙이 성립하지 않는 비현실적인 꿈속을 유영하는 듯하다. 

 

이처럼 이진주 작가의 작품들은 산발적으로 떠오르는 과거의 단편들처럼 불완전하다. 우리가 선택, 변형, 삭제, 재배치의 과정을 거쳐 ‘기억’하듯 작가도 이런 방식으로 작품을 완성한다.

 

하지만 불완전하다는 것은 전체가 아닌 선택된 부분만이 존재한다는 뜻이기에 망각을 이겨낸 과거의 단편들, 즉, 선택적으로 기억된 것들은 더 큰 의미가 있다.



 

견디게 하는 기억, 견뎌야 하는 기억


  

Withstand, 2019, Korean paint on linen, 30x34.4cm.jpg

Withstand, 2019, Korean paint on linen, 30x34.4cm. (출처: artistjinju)

 

 

작가가 말했듯이 기억은 이미 끝이 난 과거의 것이 아니라 현재, 미래와 함께하는 삶의 진행형 요소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기억은 오히려 현재의 것이다. 과거가 왜곡되고 일부분 망각된 상태로 ‘재’구성된 것이기 때문이다. 기억의 대상은 과거에 있지만, 기억의 주체인 나는 현재를 살고 있고 미래를 살 것이기 때문이다.

 

작품 Withstand 속 등장하는 일상적인 사물들은 마치 기억의 조각처럼 모여 있다. 연약한 그들은 ‘견디고 있다 (withstand)’. 나를 견딜 수 있게 하는 기억들은 무엇이고, 내가 견뎌내야 하는 기억들은 무엇일까? 현재와 미래로 나아갈 수 있게 하는 기억들은 무엇이고, 감당해야 하는 과거의 기억들은 무엇일까?

 

‘함께 서서 (with + stand)’ 견디고 있는 그림 속 사물들처럼 과거의 조각조각들은 함께 모여 우리가 나아갈 현재와 미래를 만들어낸다.

 

 

 

작품 만나보기


 

우리 각자의 기억을 환기하는 이진주 작가의 작품들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리고 있는 그룹전 ⟪재난과 치유⟫에서 2021년 8월 1일까지, 천안 아라리오 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그룹전 ⟪13번째 망설임⟫에서 2022년 3월 27일까지 만나볼 수 있다.

 

작가의 그림을 눈앞에서 마주하면 자신도 모르게 꿈을 꾸듯 과거의 기억 속으로 푹 빠져들어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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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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