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구와 담을 기억하다 - 구의 증명 [도서/문학]

서로가 서로에게 유일한 세계이던 그들의 이야기
글 입력 2021.07.06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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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내 혈관의 피

그대는 내 심장의 숨

그대는 내 대지의 흙

그대는 내 바다의 물

그대는 내 초라한 들판

단 한 송이의 꽃

 

9와 숫자들의 ‘창세기’ 중


 

혈관에는 피가 흐른다. 피는 온몸 구석구석을 순환한다. 심장은 일정한 속도로 뛰어 숨을 쉬게 한다. 넓은 대지에는 흙이 있어야 하며, 바다에 파도가 치는 이유도 물이 있기 때문이다. 그대와 나, 서로의 상관관계가 성립한다. 그렇게 서로는 서로에게 유일한 세계이다.

 

 

 

죽음으로부터


 

구의 죽음으로부터 시작한다. ‘구의 증명’은 죽음으로 시작해 죽음으로 마친다. 죽은 구를, 담은 그녀만의 방법으로 장례를 치른다. 구의 몸을 먹는다. 계속해서 구를 하나하나 뜯어먹는다. 서로는 함께였기에, 구의 영혼은 담의 육신에 동행할 것이다.

 

 

 

서로가 함께


 

구와 담은 어린 시절부터 함께였다. 어릴 적 그들을 둘러싼 소문, 포근한 안정감을 주던 노마의 죽음, 구에게 유일한 어른이자 담이 사랑하던 이모의 죽음. 그들은 상실과 슬픔의 순간을 겪고, 찰나의 안정감과 아름다움도 서로에게서 발견한다. 그러면서 알게 된다. 우리는 함께해도, 함께하지 않더라도 함께라는 것을.

 

그래서 서로는 서로의 과거이며, 설명이 필요 없는 비슷한 감정의 공간이 만들어진다. 그들의 상황은 처절했다. 겨우 이십 대의 구와 담에게 반복되는 아픔과 무너질 수 없이 높은 현실의 벽이 있었다. 상실과 죽음을 겪고, 지겹도록 겪어 그들은 서로에게 의지한다. 구는 부모님이 물려준 빚을 감당해야 하는 현실이 있었다. 가진 건 ‘몸’ 하나뿐. 몸뚱이는 그들(사채업자)에게 또 다른 돈을 벌 수 있는 수단이다.

 

구는 그들에게 노예가 돼야 했었고, 그들의 미래는 보이지 않아 떠나라고 한다. 그러나 담이 사랑했던 사람은 이모와 구뿐이었다. 담은 다시 구를 보낼 자신이 없었고, 함께하는 앞으로의 길이 행복하거나 혹은 불행하더라도 함께하기로 마음을 다진다.

 

 


더 깊은 산골로, 청설모가 되기 위하여

 

구와 담은 계속 따라오는 그들을 피해 도망을 다닌다. 잠시 행복함을 느낄 찰나도 없이 그들은 계속해 찾아내고, 결국 구는 담에게 청설모가 되자고 한다. 사람대접해주지 않았던 지난날에서 도망쳐 청설모가 되기 위해 더 깊은 산골로 들어간다. 그러나 도망침의 끝은 죽음이었고, 구는 우주의 세계로 향한다.

 

 

 

구의 죽음 이후


 

그들은 죽을 때까지 함께였고, 함께 있지 않더라도 함께였다. 죽음을 맞이하고 육신을 벗어나 마음만 남은 구는 할 수 있는 일이 기억뿐이었고, 기억은 담에 대한 모든 것이다.

 

구의 미래는 담이다. 그런 구를 먹은 담은 최대한 오래 살아남아 ‘인류 최후의 1인’이 되길 바라며 구를 기억하고자 한다. 서로를 기억하며 그렇게 서로를 느끼길 바라며 이야기는 끝난다.

 

 


구의 장례


 

구의 장례 방법은 담의 ‘식인’ 행위로 진행된다. ‘식인’은 사람이 사람을 먹는 행위이다. 종교적 의미로서나 생존을 위한 풍습으로 전해졌다. 인간의 진화를 거쳐오며 이는 금지된 행위로 정정됐다. 그러나 ‘식인’행위는 구를 위한 담의 최선의 채택 방법이었다.

 

첫 번째로, 구의 죽음을 알리기 싫었다. 그들이 구를 찾아올 것이 분명했고, 다시 구를 물질적인 것으로 취급했을 것이다. 그리고 구의 일생에 관심도 없던 이들이 왈가왈부하는 게 싫었으리라.

 

두 번째로, 구에게 다시 고통을 주기 싫었을 것이다. 죽은 이를 정성스레 처리하여 절차에 따라 보내준다. 살아있는 자들이 죽은 이를 기리고 죽은 이는 이승과의 연을 끊어내는 일이다. 죽은 이를 보내줄 때 통상적으로 땅속에 묻거나 불에 태운다. 불에 태워 한 줌의 재로 남는 것은? 일생을 불구덩이 같은 고통에서 살던 구에게 다시 들어가라고 부추기면 구는 무서워지고 말 것이다. 땅속에 묻어 구를 기리는 일은? 구가 혼자 땅속에 묻혀 내가 오길 바라고 있다면 담은 너무나 괴로울 것이다.

 

마지막으로, 담은 구를 보내기 싫었으리라. 함께일 수밖에 없던 그들이었기에 담이 할 수 있는 일은 구를 계속 살게 하는 것, 내 안에서 살아가는 것, 다시 서로가 되는 것. 이것이 담, 그녀의 장례 방식이었다.

 

 

 

괴로움 없는 사랑은 없다.


 

담은 사랑에 대해 이처럼 말한다. “괴롭다는 것은 몸이나 마음이 편하지 않고 고통스럽다는 뜻이다. 괴로움 없는 사랑은 없다.” 내가 한 사람, 하나의 광활한 세계를 만나는 일인 사랑은, 마치 우주처럼 나의 세계에 다른 이의 세계를 불러와 서로를 끌어당긴다. 그들의 우주에는 인내해야 할 시련이 그들의 삶에 깊숙이 내려앉아 있고, 둘의 사랑을 더 처절하게 완성시킨다. 구를 먹으며 생각하는 마지막 담의 이야기는 사람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대목이다.

 

담은 식인종도 아니고 사이코패스도 아니다. 오래전 인간은 존경하고 사랑해서 사람을 먹었던 일도 있었을 것이라 담은 생각했다. 미개하게 느껴진다면 그럼 지금의 인간은 미개하지 않은가. 약육강식이며 돈은 힘이다. 사람이 무엇인지, 내가 사람이 되길 원하는지 생각하는 와중에 홀로 남겨진 자신을 발견한다. “차라리 내가 죽지. 내가 떠나지.” 남겨진 이는 사랑한, 떠난 이에게 말할 뿐이다. 시간을 되돌릴 수 없음을 안다. 혼자 무참히 떠나버리면 나는 어떻게 살아가라고 소리친다.

 

우리는 슬픔의 순간에서 상대방에게 건넬 위로의 말을 찾곤 한다. 나는 상대방의 슬픔을 완전히 알 수 없기에 내뱉는 말은 공허할 뿐이다. 슬픔을 함께 나누는 슬기로운 방법은 ‘옆에 있어 주는 것’. 그러나 둘은 잔인하게도 마지막 순간에 함께하지 못한다. 죽는 고통을 홀로 느꼈을 구, 그런 구를 생각하니 마음이 찢어졌을 담이다. ‘대신 아픈 게 낫지. 대신 죽지.’ 후회는 담을 관통하며 차라리 내가 그 고통을 겪더라도 죽어버리는 게 나은 것, 담의 괴로운 사랑이다.

 

그리고 사랑에 대한 이상적 정의라고 생각하여 덧붙인다. “사랑에 대한 대개의 정의는 시도되는 순간 실패하기 십상이다. 그래서 사랑은 전칭 명제로 규정하기가 어렵다. 그것은 매번 개별적인 사례로 존재한다. 그래서 ‘사랑이 무엇이다.’라고 말하는 일은 어리석은 일이며 다만 ‘무엇도 사랑이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신형철, 정확한 사랑의 실험, 마음산책, 2014, 64쪽) 구와 담의 사랑을 정의해본다. 괴로운 사랑도 사랑이다.

 

 

 

구와 담을 기억하다.


 

작가가 그러했듯, 이야기를 다 읽고 난 후에도 공허함이 맴돈다. 너무나 아픈 것이 그들의 사랑이었기 때문일까. 소설과 드라마 속 아름다운 사랑이 아니었기 때문일까. 그들이 겪어내는 현실이 너무나 아팠기 때문일까.

 

이러한 구와 담의 삶을 소설이라 치부하기에는 나의 가슴도 저릿하다. 그들의 사랑뿐 아니라 인생도 처절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소설이 아닌 현실 속 어딘가에도 살아 숨 쉴 세계의 이야기라고 믿는다. 그것이 우리를 기억해줄 사람은 우리밖에 없다고 말한 구의 마음을 내가 위로해줄 수 있는 최소한의 방법이라고 믿는다. 그들의 이야기에 내가 들어가진 못하지만, 내가 위로해주진 못하지만, 내가 ‘구와 담의 이야기’를 기억한다고 말해주고 싶다.

 

 

 

 

"글을 쓰거나 지치거나 불행해지면 벗어놓은 옷처럼 축 늘어져서 '9와 숫자들'의 <창세기>란 곡을 들었다. ... 쓸쓸하고도 귀한 시간이었다. 지나고 나니 글을 쓸 때의 감각보다 그 곡을 듣던 때의 감각이 더 생생하게 남아버렸다."

 

- '구의 증명' 중 작가의 말

 

 

[임민경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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