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어머니와 냉장고

글 입력 2021.07.04 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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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약속이었다. 이다음에 크면 엄마에게 지펠 냉장고를 사주겠다는 약속. 초등학교 들어간 무렵이었기 때문에 잊어버리진 않았다. 그 약속을 지키게 되었다.

 

어머니에게 마음의 빚 같은 게 남아있던 건 오래전부터였다. 용돈이 없어서 준비물을 산다고 엄마 지갑에서 돈을 꺼내 쓸 때는 잘 몰랐다. 어느 날 집에서 어머니가 마도매를 시작했다. 늦은 밤 혹은 이른 아침 안경을 쓰고 실을 좁은 바늘에 끼워서 옷 마감 작업을 하게 된 것이다. 워낙 야무지게 솜씨가 좋은 건 알고 있지만 그 모습을 볼 때마다 그게 내 잘못인 것만 같았다. 내가 없었더라면 언니들이 얼추 다 큰 마당에 그렇게까지 돈이 문제가 되지 않았을 테니까.


고등학교 때 다시 그 바늘과 실, 옷가지들을 보게 되면서 어떻게 하면 돈을 아낄 수 있을지 고민했다. 학원을 다니지만 시험기간에는 다니지 않았고, 어느 정도 요건을 갖춰서 할인을 받았다. 식사는 사 먹지 않고 집에서 간단하게 챙겨서. 대학에 가서 학비와 용돈을 손 벌리지 않게 되면서 마음이 편해지긴 했다.

 

나로 인해 누리지 못한 것들을 채워보려고 같이 문화생활도 함께 했지만 근본적으로 해결되는 느낌은 아니었다. 어른이 되면 해보고 싶은 것들을 경험하기 더 바쁘기도 했고. 어릴 적 약속은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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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환학생과 해외여행이 익숙해진 시대지만, 일을 시작하기까지 해외로 떠난 적은 없다. 주변 친구들이 부럽기도 했지만, 생각해보니 부모님도 이 좁은 한국을 벗어난 적이 없다. 장거리 운전도, 여행도 좋아하진 않으시고 지극히 한국적인 입맛을 지니셨지만 그래서 안 갔다고 보긴 어렵다. 친구들과 가까운 곳으로 여행을 가거나 출장을 가게 될 때면 마음 한 켠이 복잡했다. 출장은 그나마 일이니까 그렇다고 쳐도, 나만 이렇게 다녀와도 되는 걸까.


갈수록 느끼는 거지만 갈수록 태산이고, 갈수록 알고 보니 어려운 것 투성이다. 가장 놀라운 건 이렇게 사는 모습이 '평범하다'고 표현될 정도로 수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살고 있다는 것이다. 아이를 기르는 모든 사람들이 존경스럽다.


부모가 되면 감당해야 할 일이 너무나 많다. 자아실현이라는 궁극적인 목표는 쳐다볼 수도 없게끔, 내가 누리고 싶은 것 대신 아이를 위해 먼저 쓰는 삶이다. 어쩌면 부모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부모로서 느꼈던 불안을 대물림하게 하고 싶지 않은 마음 반, 그리고 자신이 살아온 모습을 기준 삼아 '좋은 삶'을 권하고 싶은 마음 반일 지도 모른다.

 

지금의 우리에게는 말도 안 되게 답답한 이야기일 수도 있겠지만 그분들에게는 그 나름의 사정이 있을 수밖에. 명예나 돈, 안정적인 직업을 이야기하는 건 그 유무로 인해 힘든 시간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무조건 정답이라는 건 아니지만 무조건 구시대적인 의견으로만 치부할 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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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은 부모에게 아무것도 쉽사리 보장해주지 않는 이상한 보험 같다. 애정, 시간, 돈을 쏟아붓는다고 꼭 자식의 성공과 부모의 보상을 담보할 수 없다. 등골 브레이커에서 효도로 넘어가는 길은 늘 험난했겠지. 효도라고 하기도 거창한 게, 어린 시절 우리에게 준 것들을 부모님이 연로해지시고 나서 우리가 되돌려주는 것 같은 개념이다.

 

만기도 아주 길고 중도해지도 사실상 불가능하며 100%는커녕 환급이 얼마나 될지도 알 수 없다. 가입할 때부터 랜덤박스라 어떤 강점과 약점이 있는지도 잘 모르겠고, 환경에 따라 다소 변동도 있다. 그나마 가입대상의 특성을 어느 정도 갖고 있다는 경향성으로 예측해볼 뿐이다.


좋은 자식이 되는 건 밑도 끝도 없는 일이다. 돈도 별로 없고, 그 많지 않은 돈을 번다고 시간도 별로 없고, 사랑은 머리가 컸다고 표현을 잘 못한다. 제법 나쁘지 않은 자식이 되고 싶을 뿐이지만 그것도 쉽지 않다. 돈을 벌게 되어도 아직도 모든 게 큰돈이다. 아직도 집에서 부모님에게 많은 것들을 의지하고 있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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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펠 냉장고' 약속도 어른이 되면 그 정도 돈은 벌었겠지 상상하고 지른 거겠지만 실상은 열심히 모아서 지킬 수 있는 약속이었다. 과거의 나는 미래의 나를 당연하게도 미처 잘 알지 못했다. 어쩌겠나, 남아든 여아든 일언중천금.


물건을 깔끔하게 쓰시는 편이라 오래 함께 한 냉장고지만 올해는 연초부터 확실히 살 때가 됐다고 해서 미리 조금씩 돈을 모아놨다. 같이 구경간 대리점에서 뽑아주신 여러 조건의 견적을 보고 이미 예상한 가격을 넘었다며 한참 고민을 하시는 모습을 보고 내가 살 테니 편하게 고르라고 말씀드렸다.

 

내가 옛날에 지펠냉장고 사준다고 했었잖아. 기세좋게 이야기하기까지 참 오래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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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심끝에 선택한 냉장고는 분홍색이 고운 오브제 냉장고였는데, 안타깝게도 집 통로 크기와 맞지 않아서 다른 냉장고를 골랐다. 최종적으로 집에 온 건 살짝 작은 다른 냉장고다. 왼쪽 냉동고는 핑크, 오른쪽은 민트.

 

집에 오니 매장에서 볼 때와 달리 생각보다 무척 크다. 냉장고는 상징적인 의미였으니 제품명이 다른 건 그냥 넘어가기로 하자. 막상 사고 나니 이왕 사는 거 더 좋은 걸 샀어야 하나 아쉽기도 했다. 하지만 엄마 말씀대로 사고 나서 다른 고민할 것도 없다. 샀으면 고민 끝!


왠지 냉장고를 사고 나니 이상하게 개운한 기분이었다. 수십 년 전 약속을 지킬 수 있어서이기도 하고, 내심 좋아하시지 않을까 하는 마음 때문이기도 하고. 엄마카드나 아빠 카드 찬스가 좋듯이 엄마 아빠도 딸 카드나 아들 카드 찬스가 싫진 않을 거 아녀.


많이 비싸지 않냐고 걱정하시던 말씀에 비해 냉장고 문을 이리저리 열어보시면서 좋아하시던 모습을 보니 웃음이 나면서도 마음이 찡했다. 냉장고란 게 사실 혼자만 쓰는 것도 아닌데. 엄마만의 냉장고도 아닌데.

 

생각보다 좀 더 오래 걸렸고, 최고로 비싸고 좋은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양치하고 난 것처럼, 발로 착착 밟아 이불빨래를 할 때처럼, 머리를 감고 바람에 말릴 때처럼 개운한 이 마음 하나면 괜찮지 싶다. 오래오래 튼튼하게 있어주렴 냉장고야.

 

 

[장지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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