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나는 지금 인간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 변신 [도서]

인간으로 살아간다는 건
글 입력 2021.07.03 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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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아침, ‘그레고르 잠자’가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그는 침대 속에서 한 마리의 흉측한 갑충으로 변해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

 

 

 

벌레가 되어버린 나



「변신」의 첫 문장이다. 책의 첫 문장은 중요하다. 독자에게 책을 읽을지 말지를 결정하는 시작이자 책의 흥미도를 이끈다. 그 점에서 이 책의 첫문장은 가히 충격적이다. 시작하자마자 ‘갑충’이 되어버린 사람이라니? 재빠른 속도로 책을 읽어내려갔다.


줄거리는 간단하다. 가족을 부양하는 ‘그레고르’가 하루아침에 자고 일어나고 나니 갑충이 된 이야기이다. 왜 갑충이 된 건지, 왜 ‘그’가 갑충으로 변하게 된 원인이나 이유는 서술되어 있지 않다. 그저 벌레가 되고 난 뒤 돌아오는 건 가족들의 냉대와 무시, 그리고 죽음이다.


카프카는 인간이 하루아침에 갑충이 되어버린 상태의 묘사, 가족들의 철저한 무시와 냉대를 과감하게 보여 준다. 읽어갈수록 속이 불편해지는 내용이다. 불쾌하지만 머릿속에서 ‘그레고르’의 모습이 떠나지 않았다. 결국 갑충이 된 상태로 죽음을 맞이하게 된 한 가족의 가장이였던 ‘그레고르’를 말이다.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



이 소설은 노동자가 실직이나 사고로 인해 경제적 능력을 상실한 인간의 모습을 갑충으로 변한 인간이라는 동화적 상상을 곁들인 이야기다. 갑충이 된 인간은 경제적 능력이 제거되고 남게 된 껍데기를 표현한다. 즉 인간은 경제적 능력이 없으면 인간에게 기생하여 살아가는 갑충과 다를 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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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가치는 노동력으로 판단된다. 좀 더 살펴보자면 ‘그레고르’는 자신이 벌레가 되었다는 사실이 단순히 꿈이라 생각하고 평소대로 자신이 당장 해야 하는 ‘일’을 떠올리고 행동에 옮기려는 모습이 묘사된다. 이는 인간이 아무리 당황스러운 일이 생기든, 아프든 쉬지 않고 ‘일’을 해야 하는 모습을 그린다.


‘인간’보다 ’노동력’이 먼저이다. 일을 할 수 있는 인간인가 아닌가가 인간인가 아닌가를 판별하는 데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되어버렸다. 노동력을 상실했지만, 그는 인간이다. ‘그레고르’가 액자 속 여인을 사수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장면과 여동생 ‘그레테’의 바이올린 연주에 감동한 모습은 ‘그레고르’가 갑충이 되었어도 감정을 느끼는 인간임을 보여 준다.


그러나 인간의 언어를 상실한 채 오직 몸짓으로 표현하는 그의 모습을 이해하려는 인간은 아무도 없다. 오히려 변신 전 그와 가장 가까웠던 혈육인 여동생이 앞장서서 그를 죽여야 한다고 말하는 장면은 노동력이 없는 인간이 가족들에게 어떠한 자리에 위치에 있는지를 보여 준다.

 

 

 

힘을 가진 자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과연 저 사람이 아버지란 말인가?”


‘그레고르’가 갑충이 되고 난 뒤 권력 구조는 집 안의 유일한 남성인 아버지에게 돌아간다. ‘그레고르’가 변신하기 전에 아버지는 늘 지친 모습으로 침대에 파묻혀 누워 있거나 제대로 일어날 수가 없어서 반갑다는 표시로 겨우 양 팔만 쳐들어 보이던 사람으로 묘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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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레고르’가 변신한 후에 아버지는 허리를 꼿꼿이 세우며 빳빳하게 치켜세운 상의 칼라와 덤불처럼 생긴 눈썹 아래 검은 눈동자가 생기 있는 눈빛을 내뿜고 있는 모습으로 변한다. 이처럼 늙어감에 따라 자연스레 상실한 권력을 아들인 ‘그레고르’가 노동력을 상실하게 됨으로써 다시 권력을 잡게 되어 생기를 찾게 된 남성의 모습을 그렸다.


출장 영업사원인 ‘그레고르’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비인간적 사태에 녹아든 노동자의 모습을 보여 준다. 늘 일에 쫓겨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지속적인 인간관계도 맺을 시간도 사치다. ‘그레고르’에게 정서적으로 만족을 느낄 시간은 전혀 없다. 오직 조직의 일원으로만 존재해야 한다. ‘그레고르’는 이러한 사회의 요구에 충실히 임했으며 누구나가 인정하는 ‘일벌레’, ‘돈 버는 기계’가 된다.


그가 기꺼이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사업에 실패한 아버지를 대신해 가족의 생계를 해결 해야 하는 책임감과 무엇보다도 가족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다. 그러나 가족들은 곧 그의 노동력에 의존하여 그를 돈 벌어오는 존재로만 인식한다. 점차  따뜻한 교감과 대화가 줄어드는 상황 속에서 정서적 감정을 지닌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은 희미해지고, 삶은 황폐화, 기계화, 비인간화되어갔다.


인간에게 비인간이 되기를 강요하는 현실 자체가 ‘그레고르’를 변신시켰고, 비인간적 현실에서 벗어나길 바라는 강력한 무의식에 잠재된 ‘그레고르’의 소망이 ‘변신’을 초래했다.

 

 

 

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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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그러운 갑충 묘사는 강압적 현실에 인간미를 상실한 인간의 형상을 그려냈다. 또한 갑충은 비인간적 현실에 아직 훼손되지 않은 인간의 고유한 부분, 즉 ‘그레고르’가 가지고 있는 인간적인 자아이다. 다만 그것은 그동안 폭력적인 삶에 의해 겉모습이 심하게 일그러져 갑충이 된 자아이다. 이 경우 변신은 일종의 해방적 의미이다.


이처럼 변신의 원인을 외적 요인(=현실 자체)에 의한 것으로 볼 것인가, 내적 요인(=현실로부터의 탈출 충동)에 의한 것으로 볼 것인가에 따라 변신의 의미는 상반된 의미로 해석된다. 그러나 변신의 의미는 결코 어느 한 가지로만 고정될 수 없으며, 그 한 가지의 의미도 이야기의 맥락과 상황에 따라 변화를 겪을 수 있다.


가령 변신의 해방적 의미는 벌레라는 새로운 몸을 얻음으로서 현실의 강압된 힘으로부터 고유한 인간성을 지켜낼 수 있다는 점에서 처음엔 탈 현실의 긍정적 의미를 가진다. 그러나 세상과의 소통 불능, 가족들의 몰이해, 변신의 고착화 등으로 인해 점차 동물의 몸 안에 갇힌 고립된 해방으로 의미가 축소되고 희미해지다가 결국엔 무의미한 죽음과 함께 완전히 소멸된다.


꽤 오래전의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시사화되는 부분이 많다. 노동력을 중시하는 사회, 노동력이 없는 인간은 그저 한 마리 벌레로 취급하는 사회는 여전하다. 우리는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일을 해야 한다. 일을 하고 한 가정, 사회의 노동력을 인정받기 위해 몸을 혹사하고 인간적인 감정을 버리려 한다.


감정은 사치다. 그래서 우리는 일을 하면 할수록 정서적인 소멸과 인간적인 부분을 잃어간다. 매일 매체에서는 취업이 되지 않아 자살하는 청년, 힘들게 취직에 성공했지만 회사의 갑질로 인한 죽음 등 인간미가 사라진 흉악 범죄들이 가득하다.


노동력을 인정받지 못해 벌레 취급을 받는 인간, 사회에 속해 몸을 갈아 일하지만 한 사람이 아닌 한 조직의 일벌레로 전락된 사람이 편하게 쉴 수 있는 곳은 없다. 하루 아침에 ‘그레고르’는 갑충으로 변했다. 그런데 ‘변신’한 것이 맞을까? 원래 그는 인간적인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을까?


인간의 정의가 육체 형태(머리, 몸 등)를 갖추어야 인간일까? 정신적으로 인간적인 생각(삶, 꿈, 미래 등)을 하지만 몸이 갑충이라면 인간이라고 볼 수 없는 것일까?

 

 

[나시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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