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삶을 되찾는 도주 - 델마와 루이스 [영화]

글 입력 2021.07.02 0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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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영화를 좋아한다고 말하면서도 <델마와 루이스>를 그간 보지 않았던 구체적인 이유를 설명하기는 어렵다. 그 선택의 이면에 그럴듯한 소신이나 확고한 취향이 있었던 게 아니기 때문이다.

 

어느 오후에, 혹은 어느 새벽에 영화를 보는 것이 대수로운 일은 분명 아니지만, 이상하게도 <델마와 루이스>를 고르기 위해 내게는 꽤 많은 시간과 결단이 필요했다. 너무 유명한, 그리고 너무 많은 이들에게 의미 있는 영화라는 사실이 부담으로 다가왔는지도 모른다.

 

만약 그 영화를 싫어하게 된다면, 나는 꽤 당혹스러울 것 같았다. 불호를 설명하는 일은 원래 당혹스러운 법이다. 그래서 <델마와 루이스>는 끝없이 보류되었다. 스트리밍 사이트 메인 화면에서 <델마와 루이스>의 포스터를 볼 때마다, 그리고 ‘봐야 하는데’라고 생각하면서도 끝내 매번 다른 영화를 고를 때마다, 나는 스스로가 중요한 숙제를 두고 미적거리는 불성실한 학생인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지난 수요일, 나는 마침내 그 영화를 보기로 결심했다. 갑작스러운 심경의 변화는 그동안 미뤄왔던 것이 무색할 정도로 하찮은 이유로부터 발생한 것이었다. ‘슬픈 영화를 보고 싶다’, 그게 다였다. 인생에서 언젠가 꼭 해야만 하는 일들-누가 시키지 않았더라도 그냥 본인이 느끼기에 그래야만 할 것 같은 의무감이 드는 일들이 있지 않은가-은 대부분 그런 식으로 시작하게 되는 것 같다. 생각지도 못한 사건이나 의외의 전환으로부터 말이다.


‘델마’와 ‘루이스’의 여정 역시 평범하게 시작된다. 가까운 친구 사이인 두 사람은 일종의 작은 일탈로 짧은 여행을 계획한다. 그러나 폴라로이드와 함께 유쾌하게 출발한 여행은 한 술집에서 루이스가 총을 쏘며 걷잡을 수 없이 틀어지고 만다. 남편 없이 동네 밖으로 나가지도 못했던 델마는 처음으로 낯선 남성인 ‘할렌’을 만나 함께 춤을 추며 시간을 보내고, 술에 취한 델마가 할렌으로부터 성폭행을 당할 위험에 처한 것을 발견한 루이스는 할렌에게 총을 겨눈다.

 

할렌은 끝까지 델마에게 욕설을 퍼붓고, 루이스는 망설임 없이 그를 쏜다. 델마와 루이스는 주차장에 할렌의 시체를 남긴 채 도망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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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은 멕시코로 건너가 새로운 삶을 살 계획을 세우며 도로를 질주한다. 경찰이 그들을 뒤쫓으며 상황이 위태로워질수록, 쏟아지는 햇빛 아래 빛나는 차체는 더 자유롭게 내달린다. 살인을 저지른 직후 두 주인공은 할렌이 하려고 했던 짓을 누구도 믿어주지 않을 것이며, 자신들이 곧바로 살인자로 몰리게 되리라 예상하고 두려움에 빠지지만, 이는 곧 더 이상 잃을 게 없다는 깨달음으로 이어지고, 이들의 해방감은 절정에 다다른다.

 

델마와 루이스의 도주가 카타르시스를 주는 것은 이들이 살인이라는 죄명으로부터 달아나는 계기와 과정이 그들이 지켜야 했던 여성으로서의 ‘본분’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델마는 어린 나이에 처음 만난 남성이었던 남편과 결혼하여 가망 없는 결혼 생활을 유지하느라 고통받고 있었다. 그의 남편은 델마가 루이스와 여행을 간다고 말을 꺼내는 것조차 주저할 만큼 가부장적이고 억압적이었으며, 델마는 그를 위해 음식을 차리고, 옷을 준비하고, 출근 준비를 돕는다. 그게 전부였다.

 

루이스 역시 나름의 상처를 안고 웨이트리스라는 직업에 정착해야 했다. 영화는 루이스가 텍사스에서 남성으로부터 성폭력을 당했거나, 혹은 적어도 당할 뻔했음을 암시한다. 루이스가 미수에 그친 성폭행 시도 후에도 뻔뻔하게 델마를 모욕하는 할렌에게 참지 못하고 총을 쏜 것 역시 과거 루이스의 경험과 관련이 있으리라고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두 사람의 여행이 계획한 대로 흘러갔다면, 둘은 잠깐의 자유로움을 느끼고 3일 뒤 다시 그들의 원래 위치로 돌아왔을 것이다. 그러나 인생이 늘 그렇듯 일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흐르고, 델마와 루이스는 자신들이 그간 유지하려 애썼던 모든 것들로부터 끝없이 도망치게 된다. 그리고 이들의 탈주는 남편의 폭력성, 과거의 트라우마,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그들을 착취하고 옥죄던 남성성으로부터 탈출로 이어진다.

 

델마와 루이스의 여행이 살인죄로부터의 도주로 흘러가고 만 것을 우연, 즉 할렌의 우발적인 성폭행 시도 때문이라고 이해할 수 있지만, 영화에서 남성 캐릭터들이 사용되는 모습을 고려할 때, 두 주인공의 탈주는 오히려 필연적인 것에 가깝다. <델마와 루이스>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남성 캐릭터는 두 주인공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아예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직접적으로 폭력을 행사했던 할렌 뿐만 아니라, 델마가 느꼈던 우울감을 알아보지도 못했던 남편 데릴, 차에 여성 둘만 있는 것을 확인하고 위협적으로 성희롱 하는 트럭 운전수, 델마를 꾀어내 돈을 훔쳐 달아난 제이디 등 두 주인공이 만나는 남성들은 제각기 다른 방식으로 이들을 착취하여 궁지에 몰아넣는다.

 

델마와 루이스가 여성으로서 처했던 모든 위협적인 상황들은 몇몇 ‘나쁜’ 남성에 의해 개별적으로 일어난 일이 아니다. 여성을 성적인 존재, 종속된 존재로 간주하고 취급하는 구조가 그들에게 위협을 가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델마와 루이스>는 일종의 복수극이다. 할렌에게 총을 쏜 이후 둘은 더 이상 부당한 대우를 참지 않는다. 범죄 행위를 쫓는 경찰은 델마와 루이스를 ‘무장한 채 도주 중인 무법자들’로 규정하고, 이는 실제로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이 맞게 되는 결말이 결국 남성들의 억압과 착취에서 기인한다는 점이다. 만약 할렌이 델마를 성폭행하려고 시도하지 않았다면, 데릴이 델마를 통제하려고 하지 않았다면, 제이디가 루이스의 돈을 훔치지 않았다면, 두 주인공은 다른 결말을 맞았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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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들의 행위의 정당성을 보지 못할 이들에게 둘러싸인 델마와 루이스의 마지막 선택은 절벽을 향해 내달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끝이 아프게 느껴지지만은 않았던 것은 그 행위가 자기 파괴적이고 비극적인 성격을 가진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둘은 떨어지기 직전, 인생의 그 어느 순간보다 자유로웠으며, 서로에게 충실했다.

 

영화가 허공에 떠오른 차체를 보여주지만, 차가 떨어지는 모습은 보여주지 않는 것을 보면 두 사람이 부서진 차체에서 간신히 기어 나와 살아남았을지도, 그리고 새로운 차를 구해 마침내 멕시코로 떠났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나는 되도록 그렇게 생각하고 싶다. 더 이상 눈물을 흘리지 않는 델마가 여전히 루이스의 옆자리에 앉아 발끝을 까딱이고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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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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