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세상의 절반을 외면하는 방법 [도서/문학]

여자들이 글 못 쓰게 만드는 방법, 조애나 러스
글 입력 2021.06.29 1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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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치열하게 만드는 방법을 살펴보자. 무시하기, 성과 비하하기, 희화화하기 등 여기에 개인의 특징을 넣는다면 더 다양해진다. 왜 화가 많은 사람이 되었는지 혹은 왜 눈물이 많은 사람이 되었는지는 치열했던 인생을 되돌아보면 대략 알 수 있다. 다양한 방법으로 무수히 다양한 부위에 타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다, 한 가지 고정적인 방어기제가 생겼을 것이다.

 

딱 한가지의 대처법이 생겼다면 운이 좋다고 할 수 있겠다. 아직까지는 남탓을 할 수 있도록 용인이 된다. 원망할 한 가지만 선정하면 되니 어느 정도 평화로운 삶이다. 그러나 그 이상이라면 반성의 타이밍이 계속적으로 찾아온다. 특히나 세상에 대항해야 한다면 스스로 반추할 수 밖에 없는데, ‘이단아’라는 단어가 그리 멀지 않게 느껴지게 되는 순간이며, 우울감과 적개심이 저변에 깔린다.

 

그것이 ‘치열함’으로 변모해 어느새 삶의 원동력이 되어버리고 매사 이 한 몸 불사지르며 생명의 에너지로 성과를 내니, 몸과 정신을 동시에 축 내면서도 멈추는 방법을 잊어버린다. 정지하면 패배했다는 질타를, 속력을 높이면 과격하다는 질타를 받게 되니 적당히 소모적이어야 한다. 기억해야 할 것은 속도가 다를 뿐 어느 쪽이나 심지가 짧아진다는 점이다.

 

 

 

여성의 조상은 남성이다


 

한글이 ‘언문’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창제 초창기, 일명 ‘아녀자’들로 지칭한 주 사용자인 여성들과 한문을 쓰던 기존 사대부들을 각각 아주 긴 테이퍼 캔들이라고 하자. 우선 (누구나의) 작문은 치열하므로 초의 심지를 태워간다는 점을 명시해 두겠다.

 

사대부들은 아주 고결하게 천천히 빛날 것이며 모두가 볼 수 있는 곳에 세워져 바로 오늘까지도 아름다움을 칭송받고 있다. 내일도 역시 그럴 것이 전혀 놀랍지 않다. ‘아녀자’들은 어떠한가? 아주 지극히 ‘개인적인’ ‘연애사’로 두루뭉실하게 묶여 구석지에 치워버린 것은 물론 ‘한낱 아녀자’의 글이라는 말로 초의 몸통을 베어냈으니 아슬아슬하게 금방 꺼질 시간을 기다린다.

 

운이 좋게 발견된 몇몇은 ‘보통의 여자들’과는 다르게 ‘특출났던’ 이로 묶여 제 3의 인류로 취급하며, 결국엔 누구의 누이이자, 어머니로 종식된다. 사대부의 그것들로부터 불이라도 옮겨 붙을 수 있었으니 다행이라고 해야할 수도 있겠다.

 

이들 또한 몸통이 온전치 않은 것은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차마 다른 이들에게 따뜻함을 옮겨주지 못한 채로 금새 빛을 잃어도 이상하지 않다. (허난설헌을 보라. ‘허균의 누이’라는 수식어가 떨어지지 않는다. 누가 허균보고 ‘허난설헌의 형제이자’라고 일컫는가? ‘형제’라는 어구 자체가 어색하기 그지없다.)

 

이런 방식이 답습되며 여성의 역사는 분철되었고, 조선왕조실록을 포함해 보편적 역사라고 불리는 기록들은 ‘History (His + Story)’가 되어 전승되고 있다. 2020년에서야 ‘총보다 강한 실’이라는 제목으로 여성의 역사를 말하는 글이 출판되었다. 전쟁을 중심으로 기술된 역사는 총을 가진 남성, 즉 인류의 50% (전장에 투입되지 않은 남자 아이들까지 포함한다면 그 이하)의 편향된 이야기인데도 주류 취급을 받을 수 있는 것은 글을 쓰는 자격이 따로 주어졌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여성은 여성의 조상이 남성인 줄만 알고, 여성이라는 것이 잘못인 줄 알고 살아왔으며, 뒤를 좇을만한 여성은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눈 앞의 모든 길은 개척해야 하는 미지의 땅이기 때문에 수도 없이 많은 방어기제를 가지게 되었다. 그 결과로 ‘예민한’ ‘히스테릭한’ 특이종자로 분류되어 프로이트 학파에게 명성을 가져다 준 재료로 쓰였다.

 

 

 

여자들이 글 못쓰게 만드는 방법 11가지!


 

그렇다면 그 부조리함을 왜 참고만 있었는가에 대해 말해야겠다. 세상의 절반은 당신의 생각보다 쉽게 매도당했다. 참지 않았다는 말이다. 제압하기 쉬웠다는 말이다. 그래서 참은 것마냥 묘사된다는 말이다. 끊임없이 글로써 이야기해왔음에도 ‘훌륭한’ 남성작가의 목소리만 남았다는 점이 약육강식의 원리를 이겨내지 못한 여성의 언어기술적 하등함을 명시하는가? 조애나 러스는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을 239개의 인용과 359개의 주석을 통해 정확히 썼다.

 

 

“당신은 당신의 피지배 계급이 원래부터 초록색이었다고 주장한다. 당신은 매일 한 번씩 그들을 치크파루 주스에 담근다. 당신은 글로톨로그스럽게 행동하고 있다.”


- Joanna Russ

 

최근 심리적 지배(가스라이팅)에 대한 언급이 많아지고 있다. 심리적 지배의 역사는 유구하다. 아주 교묘하고 조직적이며, 여자들이 집 밖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울타리 안에서도 주어진 역할극에만 집중해 남성의 ‘중요한’ 업무의 성취에 이바지하도록 시스템화되어 있다.

 

모두가 잘 알듯이 한문이 상민 이하의 계급층과 여성들에게는 금지되었던 이유는 글을 배우면 생각을 하게 되고, 생각을 하게 되면 양반들이 지배계층으로 군림하는 데에 차질이 생기기 때문이다. “글을 본래 배울 수 없는 종족”이라는 초록색, 그 초록색의 치크파루 주스에 매일 담금질당하는 다수가 있어, 소수가 배불리 사는 조선왕조가 오랫동안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있었다.

 

그래서 여성들의 글은 안정적인 시스템을 뒤흔드는 불쾌감을 유발했으며, ‘신사적으로’ 세상 밖에 나오기를 금지당했다. (또 다른 여성이 계몽될 수 있으므로!) <오만과 편견>으로 널리 유명한 작가 제인 오스틴의 또다른 작품들은 최근까지도 미국에서 판본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는 점은 믿기 힘들다. 유명한 작가들마저도 피해갈 수 없는 ‘여성 활자 축소 프로젝트’는 다음과 같은 ‘책략’을 갖췄다고 조애나 러스는 말하고 있다.

 

1. 금지하기 : 여성은 남성의 부속품일 뿐, 글을 쓸 수 없는 존재다.

2. 자기기만 : 애써 위대함이 보이지 않는 척 한다.

3. 행위 주체성 부정하기 : 여성 안의 남성스러움이 발현되어 위대한 작품이 나왔다.

 

여기까지만 보아도 러스가 얼마나 유쾌한 척하며 말하고자 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웃기다. 근데 안웃기다.”와 같은)

 

 

“대학에서 나의 ‘부적절한’ 경험에 대해 깨달았을 때, 나는 판타지를 택했다. 나에게 진정한 삶의 경험이 없다고 확신하고 내 작품이 위대한 문학의 반열에 들 수 없으리라 생각한 나는 의식적으로 아무도 모르는 것들에 대해 쓰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제기랄. 그래서 나는 판타지로 위장된 리얼리즘, 그러니까, SF를 썼던 것이다.”


- Joanna Russ

 

 

여성들의 경험은 축소당하고, 덜 중요한 것으로 취급받는다. 그래서 기록되지 않아도 될 정도의 가치라서 자리를 내어주지 않는다. 러스가 SF 분야에서 유명세를 탄 것은 우연이 아닌 필연이다. 그 다음 ‘책략’들을 이어서 소개하면 더 이해가 될 것이다.

 

 

4. 행위 주체성 오염시키기

 

 

“고결한 여자들은 글을 잘 쓸 수 있을 만큼 인생을 충분히 알지 못하는 반면, 잘 쓸 수 있을 만큼 인생에 대해 충분히 아는 여자는 고결할 수가 없다는 논리가 그것이다.”

 

- Joanna Russ

 

 

여배우들의 수많은 성스캔들과 마찬가지로 문학을 하고자 하는 많은 여성들도 성추문에 휘말리며 도덕적 잣대로 재단한다. 현재 우리나라 연예계, 정계도 그렇듯, 남성은 ‘(동물적)본능’에 따라 그럴 수도 있으며 본업의 성과에 더 집중하는 반면 여성의 ‘타락’은 작품의 오염과도 같다.

 

너무나도 공격적인 태도이기 때문에 조금 ‘신사적으로’ 오염시켜보자면, “너무 진지하다.”, “여성적 자질을 상실했다.”, “충분히 사랑스럽지 못하다” 따위의 비평을 추가한다. 적당한 ‘백치미’에 열광했던 멀지 않은 한국 사회가 떠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빈틈 없는 여성은 매력이 없기 때문에 작품 그 자체에서도 매력을 찾을 수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돈 지오바니>는 너무 진지하지 않은가? 남성 작가들의 책은 여성적 자질을 가지고 있는가? 카츠카의 <변신>은 충분히 사랑스러운가? 남성 작가들은 모두 개인적인 매력을 가지고 있는가? 남성 작가들은 모두 동정인가? 또는 한 사람과의 지고지순한 가정생활을 꾸리고 있는가?

 

여성들에게 강요하는 도덕적 프레임과 순결 프레임을 포함해 정숙한 ‘신붓감’으로 필요한 모든 사회적 통념을 직업 여성에게 더 강요하는 풍경을 쉬이 볼 수 있다. 결혼하기 위해 이 세상에 나지 않았고, 결혼하기 위해 글을 쓰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여성은 충분히 ‘결혼할 만한 가치를 유지하고 있어야’ 모든 행위에 대한 정당성이 인정되고, 글도 읽어줄 만한 취급을 받을 수 있다. 그렇게 글을 쓴 여성 자체를 오염시킨다.

 

 

5. 이중 기준으로 평가하기 : 여성들의 말은 알아 들을 수가 없다고 매도한다.

 

남성들은 여성으로 살아보지 않았다. 여성은 남성 중심 역사를 학습하면서 타인을 이해하는 방법을 자연스럽게 터득한다. 반면 남성은 항상 주류로 살아왔기 때문에 경험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 “이해할 수 없다.”거나, “사소하다” 따위의 말을 참 쉬이도 내뱉을 수 있다.

 

이 ‘남성 표준법’은 인류를 뜻하는 단어가 왜 mankind인지 단번에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history와 마찬가지로. 모든 단어는 매우 고의적으로 발전했다. 태풍의 이름으로 여자아이의 이름을 붙이듯이.). 여성은 인간을 대표할 수 없기 때문에 보편성을 잃은 말을 우후죽순으로 한다는 것이 논리이다.

 

그럼에도 남성은 여성을 쉽게 평가하고, 쉽게 쓰고, 쉽게 그리고, 쉽게 조각한다(여성은 여성의 누드화를 그릴 수 없었던 시절에도). 여성은 유혹의 본능을 가지고 있으며, 그 유혹을 이겨내는 남성은 ‘영웅’이라는, 이겨내지 못하더라도 ‘순정’이라는 뱃지를 달아주는 것이 남성의 예술이다.

 

남성들은 여성을 잘 알고 있다고 자신하며, 여성이 작화하는 여성은 가짜라고 취급한다. 반면 여성들은 절대 남성들의 세계를 알 수 없다는 것이 이 이중 기준이다.

 

러스는 여기에 한 가지 일화를 더해서 설명했다. 러스가 소속된 글쓰기 분야 위원회에서 석사 후보자들을 선정하는 과정에서 있었던 일이다. 모두가 선정한 상위 50%의 작품은 거의 동일했으나, 차이가 났던 부분은 여성들의 작품이었다. 여성 후보의 작품에 대해서는 남성 위원과 여성 위원의 평가가 거의 정반대였다.

 

문제점은 여전히 거의 모든 평가자가 남성이라는 것이고, 그들이 대체적으로 오만하다는 것이다. 여성들이 ‘공감을 더 잘한다.’는 보편적인 생각은 남성들이 ‘공감을 하지 못한다.’는 말과 동일하나, 그것을 보완하고자 하는 노력은 일체 발생하지 않는다. 객관적이고자 하는 평가과정에서도 말이다. “알아들을 수 없다”고 책상 끝으로 밀어버리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미 지적 수준에서 우월감을 느끼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방법이기도 하다.

 

 

7. 고립시키기


여성작가들을 위한 파이를 7%로 제한한다. 문서적으로 ‘7% 이내’라고 적혀있는 것이 아닌 충분히 위협적이지 않고, 불편하지 않는 본능적 비율일 것이라고 러스는 추측하고 있다. 이 파이의 본체는 워싱턴대 대학원 추천도서 목록, <영어 시인들>, <위대한 시의 보고>, <신입생을 위한 영문학 선집>을 포함한다.

 

남성 입장에서는 이 또한 위대하지 않은 여성 작가들이 많은 탓에 ‘여성 할당제’를 준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그러나, 여성 입장에서는 어디까지나 ‘남성 할당제’라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이득은 남성들만 취하고, 책임은 분산하는 아주 전통적이고, 고약한 습관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하여 여성은 ‘기질적으로’ 불만이 많은 취급을 받으며, ‘주어진 것에 만족하지 못한 자’로 만든다.

 

18세기 영문 출판소설이 최대 2/3가 여성들이 썼고, 미국추리소설작가회의의 여성 회원이 23%였음에도 불구하고, 여성작가들이 가장 인기 있는 탐정 소설들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Jeffrey Smith, Kbatru), ‘7% 룰’이 견고한 까닭에는 그보다 더 견고한 남성 중심 문학 체계가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여성 작가들을 삭제한 결과는 작품들을 매우 읽기 힘든 구식 판본으로만 남게 하고, 따라서 더더욱 찾는 이들이 적어지고, 신생 작가들에게는 여성의 성취 가능성을 의심하게 한다.

 

고립시키기의 방법에는 ‘사랑시’만 조명해 주체적인 사회 참가 저어하기, 초기에만 관심을 주고 이후에는 고리타분한 취급하기 등이 있다.

 

*


이 외에도 다음과 같은 여성 참여 거절법이 있다.

 

6. 잘못된 범주화 : ‘문학’이 아닌 다른 범주로 넣어 전문성 문제를 핑계로 평가 절하한다. SF 장르를 예로 들면 과학 분야로 집어넣어 소설로 비평하기보다는 과학적 인과관계가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배제하는 것이다.

 

8. 예외로 취급하기 : 여전히 주류에 끼워주지 않으며, 주변화 한다.

 

9. 본보기 없애기 : 여성들이 서로 연대하지 못하도록 교육에서 여성 작가에 대해 다루지 않는다.

 

10. 회피하게 만들기 : ‘정신적 자궁절제술’, 결국 여성 본인을 부정하고 ‘남성적’으로 글을 쓰게 만든다.

 

11. 미학적이지 않다고 보기 : (남성의) 보편적 세계와 연결되지 않기 때문에 충분한 가치가 없다(편협하다)고 판단한다.

 

 

 

이제 벨벳 장갑을 벗을 때


 

이 책의 표지에는 다양한 억압에도 절필하지 않은 짜리몽땅한 연필들이 연필심을 세우고 있다. 책을 펼치기 전, 흔하디 흔한 노란색 연필과 같은 색의 형광펜을 들어라. 누군가에겐 노란색으로 떡칠될 책일 것이며, 누군가에겐 형광펜 마저도 부러뜨릴 어처구니 없는 책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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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애나 러스 <여자들이 글 못 쓰게 만드는 방법> 낮은산

 

 

그러나 형광펜을 부러트리는 것으로 끝내지 마라. 나와 다른 환경 속에서 살아온 이들이 어떤 사투를 벌이고 살아가는지 논의할 수 있는 인류적 진보가 필요하다. 말을 하면서 들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모든 책과 영화들과 교육이 한 가지 입장만을 말하는 때에, 당신 한 사람만은 듣는 역할로 돌아서도 괜찮다.

 

 

“벨벳 장갑 속 강철 손을 보게 될 것이고, (어떤 경우에는) 그게 너무 잘된 나머지 많은 이들이 오랫동안 오직 벨벳 장갑만을 보게 될 것이다.”
 

- Joanna Russ

 

 

여성이 세상에 말할 수 밖에 없었던 화법은 일명 ‘돌려말하기’, ‘직설적으로 말하지 않고 꼬아서 말하기’ 등으로 비하되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위험을 피하기 위해 그런 화법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던 배경이 있다. 러스는 그러한 모든 작법을 탈피할 수 있도록 연대코자 한다. 여성들 또한 온전히 말하고자 하는 것을 말할 수 있기를 바란다. 말하는 그대로 받아들여지기를 바란다.

 

나에게 이 책을 선물해주었던 누군가처럼, 그리고 이 책을 선물받았던 나처럼, 러스가 당신에게 내려 앉기를. 그렇게 치열함 속에서 성취를 이룬 당신에게 위로와 연대가 함께 내려 앉기를. 그리고 50%의 세상이 100%로 나아가는 데에 보탬이 되어줄 이가 조금은 더 많아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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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나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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