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나의 '꿈' 연대기

글 입력 2021.06.25 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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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 '꿈'이 대체 뭘까? 어른들은 흔히 어린 친구들에게 이렇게 묻는다. "넌 꿈이 뭐니?" 묻는 건 쉽다. 답하는 것이 쉽지 않을 뿐.


'꿈'을 정의해본 적이 있는가? 어렴풋이 생각해보는 것이 아니라 명확한 단어로 말이다. 나에게 '꿈'이란 말의 뜻은 지금까지는 3번 달라졌다. 이 글에서는 그 변천사에 관해 한번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첫 번째, 설렘



나에게 꿈이란 오랫동안 '설렘'을 의미했다.


내가 첫 번째로 설렘을 느꼈던 것은 박물관과 미술관이었다. 어릴 적 나는 여행만 가면 박물관과 미술관부터 가자고 조르는 아이였고, 우리 집 자동차에는 항상 미술사 책이 있었다. 읽으려고 가져다 둔 게 아니었다. 하도 읽어서 달달 외워버린 책으로 부모님께 퀴즈를 내달라고 졸랐다. 지금 돌아보면 참 특이했던 나만의 놀이 방식이었다.


그 설렘은 하나의 직업에 정착했다. 큐레이터. 그것도 국립중앙박물관의 큐레이터가 되겠다는 구체적인 방향이 있었다. 결정적인 계기는 당시 한창 방영 중이었던 MBC의 시사교양 프로그램 <느낌표>였다.


<느낌표>를 통해서 우리나라의 약탈 문화재에 대해 알게 된 나는, 병인양요 때 약탈당해 당시 프랑스에 소장되어있던 직지심체요절을 꼭 내 손으로 돌려받아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하겠다는 원대한 꿈을 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큐레이터와 문화재 반환은 관계가 있는 일이 아니지만, 당시 나는 그걸 몰랐다.) 그때 나는 꽤 진지했어서, 직지심체요절을 처음 찾아내신 분인 박병선 박사님과 관련된 기사들을 깡그리 섭렵하고 인터뷰 기사는 스크랩해 냉장고에 붙여놓기도 했다.


중학생이 되어 봉사활동 시간을 채워야 할 때에도, 대부분 집 근처에서 봉사활동을 했지만 나는 왕복 2-3시간 거리를 오가며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전시관 안내 봉사를 했다. 심지어 주말 오전 시간이었다. 피곤하기는커녕, 스스로도 전시관에 들어서는 순간 내 눈이 초롱초롱해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당시 내가 제일 좋아했던 것은 반가사유상이었는데, 일부러 3층 전시실 안내에 자원해서 관람객이 없을 때면 반가사유상이 전시된 방으로 스윽 들어가 한참을 구경하다 나왔던 기억이 난다. 물론 반가사유상이 아니더라도 내가 박물관이라는 공간에서, 나름 피고용인의 입장으로 박물관의 공기를 들이쉬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설렜다.


이후 큐레이터의 꿈은 현실적인 문제들과 관심사의 변화, 그리고 내가 나 자신을 더 잘 알게 되면서 조금씩 흐려졌다. 그렇게 한참을 여기저기 떠돌던 나의 마음이 내려앉은 건 공연이었다. 대학교에 갓 들어간 해에 보았던 '위키드'라는 뮤지컬 탓이었다.


'위키드'의 첫 장면은 아주 화려하다. 막이 오르면 초록빛의 거대한 세트가 모습을 드러내고, 오케스트라가 웅장한 서곡을 연주한다. 그 사이 모든 앙상블 배우들이 무대에 올라 겹겹이 목소리를 쌓으면, 그 사이로 주인공 '글린다'의 맑은 소프라노 소리가 끼어든다. '버블 머신'이라고 불리는 크고 화려한 무대 장치를 타고 천장에서부터 내려오면서 말이다. 배우들의 의상은 또 얼마나 반짝이는지 모른다.


그때의 기억에 관해서 과거의 나는 이렇게 기록했다. "나는 그때 아주 강한 확신을 느꼈다. '나는 이 일을 하게 될 것이다'라고." 내가 두 번째로 설렘을 느낀 순간이었다.


할 수 있는 일에 제약이 있었던 10대 시절과 다르게, 20대는 마음만 먹으면 도전하지 못할 일이 없다. 그래서 20대의 나는, 큐레이터라는 꿈을 좇았던 때보다 훨씬 더 공격적이고 적극적으로 공연이라는 분야에 도전했다. 당시 학교에서 신설했던 예술경영학과를 이중전공으로 덥석 선택했고 축제 자원봉사, 공연 분야 전문가들의 강연 다수, 뮤지컬 공연장 안내원 아르바이트 등등 공연과 관련이 있어 보이는 일이라면 겁 없이 뛰어들었다.


그 모든 순간들이 설렜고 기뻤기에 나는 누구보다 행복하고, 아주 바람직한 삶을 살고 있다고 자부했다.

 

 


두 번째, 짐



그러던 중 갑작스럽게 유학을 가게 됐다. 미국 뉴욕이었기에, 처음에는 공연의 메카에 가게 되었다며 즐거워했다. 그러나 내가 도착한 곳은 공연과 가까운 곳이 아니었다. 이제는 공급자의 입장이 되어 보고 싶었던 나인데, 그저 수요자에 머물 수밖에 없게 하는 공간이었다. 꿈에서 멀어지는 기분이었다.


꿈을 이루기 위해 맹렬하게 달려가던 중이었는데, 느닷없이 태백산맥 급의 장애물이 나를 가로막은 느낌이었다. 나는 하루하루 무기력해졌고, 우울해졌다. 이건 내가 원하는 삶이 아닌데, 라는 생각에만 점점 잠식되어갔다. 새로운 세상 따위가 나를 흥분시킬 새도 없이.


여기까지 읽었다면 아마도, '아니, 꿈이 뭔데 뉴욕을 마다해?'라는 생각이 들 것이다. 실제로 내가 당시 상당히 많이 들은 말이다. 모두가 그렇게 말하니까 내가 크게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 같긴 한데, 내가 바라지 않는 삶이라는 느낌은 가시지 않았기에 나도 나를 이해할 수 없어서 더욱 우울해졌던 기억이 난다. 2년 반의 유학 생활 동안 1년 반 정도를, 나는 그런 이유로 우울함에 허우적댔다.


이제는 이유를 안다. 한창 사람들에 치이고 방황하던 20대 초반, 나는 수많은 결핍들을 오로지 '꿈' 하나로 채우고 있었다. 꿈이 주었던 큰 기쁨에 지나치게 의존하다 보니, 꿈이 없으면 나는 무방비 상태로 나의 결핍들을 오롯이 마주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또 꿈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지면서 심리적인 압박감도 커졌다. 당시 나는 나의 인생은 내 꿈을 따라가는 과정이어야만 한다는, 강박과도 같은 감정에 계속 시달리고 있었던 거였다.


그걸 깨달은 것은 유학 생활이 거의 끝나갈 무렵이었다. 길게만 느껴졌던 유학 생활이 생각보다 짧았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꿈에 매몰되어 있느라 내가 놓친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새삼 돌이켜보게 되었다. 한때 설렘이었던 꿈이 '짐'이 될 수도 있음을 깨닫게 된 계기였다.

 

 


세 번째, 내 삶의 북극성



설렘이었든 짐이었든, 격렬하고 파란만장했던 20대 초반을 지나온 후 나는 지금의 나에게 도달했다. 지금의 나는 '꿈'을 이렇게 정의한다. '마음이 따르는 것'.


설렘이랑 같은 말 아니냐고? 그럴지도 모른다. 다만, 이제 더는 꿈이 내 인생의 전부를 차지하도록 두지 않는다. 꿈이 나를 잠식하는 것도, 내가 꿈에 매몰되는 것도 바라지 않는다. 꿈을 좇으며 느낄 수 있었던 가슴 뛰는 기쁨보다, 꿈과 별개인 나의 소소한 하루하루가 가져다주는 작지만 꾸준한 행복이 나를 훨씬 더 안정적으로 지탱해준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꿈'과 '목표'를 구분 짓기로 했다. '꿈'이 내 마음이 따르는 방향이자 인생을 이끄는 북극성과 같은 존재라면, '목표'는 그 여정을 가능하게 해주는 지표들이다. 하나의 지표를 지나면 그다음 지표가 있을 테다. 그리고 하나의 지표를 지날 때마다 내가 얻을 성취감은, 그다음 지표로 나아갈 힘이 되어줄 것이다.


*


나는 지금도 여전히 꿈이 있다. 예전만큼 뚜렷하지는 않지만, 지금의 내 삶엔 나름의 분명한 방향성이 있다. 또, 그를 향해 나아가는 길에 몇 가지의 지표들을 꾸준히 세우고 또 지나치고 있다. 동시에 나는 꿈의 영역에서 벗어난 나의 삶을 돌아보고 돌보는 것 또한 잊지 않으려 노력한다. 그렇게 설렘과 행복이 공존하는 삶을 유지하려 노력하고 있다.


나의 인생 영화 <소울>은 꿈을 갖고 이뤄내는 것도 멋지지만, 꿈이 없는 일상도 소중한 행복이 가득하다는 이야기를 전하는 영화다. 영화의 가장 마지막 대사는 이것이다. "I am going to live every bit of it." 모든 순간을 온전히 누리며 살겠다고.


꿈이 있든, 꿈이 없든, 꿈이 어떤 의미를 가진 무엇이었든 간에 당신의 삶은 이미 소중하다. 꿈은 그저 삶의 방향을 제시해주는 것뿐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꿈의 존재가 삶에 기쁨을 더해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니 부디 당신이 있는 그대로의 삶을 사랑하며, 크기는 상관없으니 당신만의 꿈을 찾아 품고 피어나기를.

 

 

[최우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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