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보편적 감정을 노래한 서정시인, 사포 [문학]

글 입력 2021.06.24 11:23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131.jpg


 

지구 위 여성 시인의 기원을 좇아 올라가면 사포(Sappho)가 있다. 플라톤의 ‘열 번째 뮤즈’일 만큼 매력적이고 재능 있는 시인이다. 날카로운 시어 선택으로 독자의 마음을 두드리는 그녀의 시는 현재까지 알려진 것이 많지 않다. 대표 작품 아프로디테 찬가를 포함한 서너 편 정도의 시만 온전히 남아있으며 그 외 인용된 파편들이 약 700행 정도 존재한다. 사포의 삶 또한 상당 부분이 베일에 싸여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녀 및 여인을 화자로 내세워 사랑의 아픔과 아름다움을 노래한 특유의 스타일은 많은 세월 동안 꾸준히 독자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아왔다.

 

BC 615년경 그리스 레스보스(Lesbos)섬의 귀족 집안에서 태어난 사포는 여러 명의 남자 형제를 두었다. 이후 부유한 집안 출신의 케르킬라스(Cercylas)라는 남자와 결혼하여 딸 클레이스(Cleis)를 낳았다고 알려졌다. 사포는 대부분의 삶을 레스보스의 미틸레네(Mytilene)에서 보냈다. 이 도시에서 그녀는 미혼 여성들을 위한 학당을 운영하며 스승으로서, 그리고 시인으로서 큰 명망을 얻게 되었다.

 

주로 그녀의 시는 여성들과 나눈 다양한 감정—우정, 시기, 질투, 미움, 그리고 사랑을 그려낸다. 이 때문에 사포가 죽은 후 뉴 코미디(New Comedy) 장르의 작가들은 사포를 다소 문란한 레즈비언으로 표현했다. 이때 탄생된 캐릭터가 고착되어 현재 사용되는 ‘레즈비언(lesbian)’이라는 용어가 그녀의 고향인 레스보스 섬에서 유래된 것이다. 고대 그리스의 사회규범이 현재의 것과 다를 뿐만 아니라, 현존하는 자료 및 정보가 거의 없기 때문에 해당 주장을 명확하게 판별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그녀가 동성애자로 추측된다는 이유로 1073년 그레고리 교황에 의해 그녀의 많은 작품이 전소되었다.

 

사포의 죽음에 관해서는 여러 가설이 존재한다. 로마의 시인 오비디우스(Ovid)는 사포가 연인이었던 선원 파온(Phaon)과의 이별을 견디지 못해 이른 나이에 절벽에서 몸을 던졌다고 주장했던 반면, 다른 역사가들은 그녀의 죽음을 BC 550년경이라고 상정하며 꽤 오랜 삶을 살았다고 추측하고 있다. 뛰어난 재능과 아름다운 시구, 신화처럼 전해져 내려온 드라마틱한 죽음은 많은 화가의 창작욕을 자극했다. 이 때문에 서양미술사에서 사포를 주제로 한 회화작품을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다.

 

 *

 

성별을 떠나 사포의 서정시는 그 누구와 견주어도 지지 않을 뛰어난 작품성을 갖추고 있다. 그리스의 대표 시인 호메로스와 달리, 사포는 신과 전쟁, 거대한 서사에 대해 노래하기보다는 한 개인의 감정을 섬세한 톤으로 이야기한다. 주관적인 경험을 시로 풀어내는 것은 전통적인 고대사회에서 전례 없는 파격적인 시도임과 동시에 대중들에게 매우 친밀하게 다가갈 수 있는 방법이기도 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사포의 작품은 대부분 특정 여성 혹은 그녀의 지인들에게 사적인 방식으로 발화되었다. 이는 기존 문학 및 시인들과 달리, 사포가 자기 작품을 통해 사회에서 통용되던 문화 및 의견에 대해 자유롭게 지적하고 비판할 수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포는 자신이 삶에서 경험한 감정들을 시의 언어로 솔직하게 빚어냈다. 그중에서도 생전 가장 깊게 천착한 주제는 사랑이다. 그녀는 형용하기 어려운 달콤쌉싸름한 사랑의 감정과 심장을 후벼파는 비통한 슬픔을 손에 쥘 듯한 생생함으로 전달하며 독자들의 공감을 끌어낸다. 그녀의 시가 사랑받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사포 특유의 격정적인 시구와 세밀한 감정선 묘사일 것이다. 사포는 주로 구어체를 사용했는데, 이는 사포의 단순하면서도 직관적인 시어 선택 및 표현법과 어우러져 강력한 시너지를 발휘한다. 서정시라는 장르에 가장 잘 부합하는 시인이 아닐 수 없다.

 

그녀의 시 속에 드러난 인간의 보편적인 원초적 감정은 읽는 이의 마음을 통렬하게 찢고 들어와 강력한 파도를 일으킨다. 몇 안 되는 사포의 시 중 가슴속의 내밀한 질투를 묘사한 ‘시 31’을 읽어보자. 화자의 격랑에 귀를 기울이며 자신의 기억 더미를 더듬으면서.

 

 

20210624112559_qhrrtqib.png

Sappho 31


 

사포의 시 31, 질투의 시

 

 

그는 생명을 가진 인간이지만

내게는 신과도 같은 존재

그와 네가 마주 앉아 

달콤한 목소리에 홀리고

 

너의 매혹적인 웃음이 흩어질 때면

내 심장은 가슴 속에서 

용기를 잃고 작아지네

흠칫 너를 훔쳐보는 내 목소린 힘을 잃고

 

혀는 굳어져 아무 말도 할 수 없네

내 연약한 피부 아래 뜨겁게 끓어오르는 피는

귀에 들리는 듯 맥박치며 흐르네

내 눈에는 지금 아무것도 보이지 않네

 

식은땀이 흐르고 몸이 떨려오네

온몸이 저 풀보다 진한 초록색으로 물든 듯하네

내가 이미 죽은 것처럼, 

아니 거의 죽을 것처럼 느껴지네

 

하지만 견뎌야 하네, 불쌍한 사람이라도...

(중략)

 

 

 

에디터 Tag.jpg

 

 

[최미교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4.20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