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인간과 자연의 대립과 공존을 말하다 [영화]

글 입력 2021.06.22 2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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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릴 적부터 자연과 동물을 사랑했다. 유치원 때 가장 즐겨보던 애니메이션은 <스피릿>으로 영화는 야생마 무리를 이끄는 종마 ‘스피릿’과 그를 계속해서 굴복시키려는 기병 부대의 대립, 나아가 부대를 이끄는 권위적인 부대장에 맞서 인디언 청년 ‘리틀 크릭’과 ‘스피릿’의 연대가 돋보인다. 외에도 n차 관람을 이어갔던 <라이온 킹> <니모를 찾아라> 등 일주일에 최소 두 번씩은 다채로운 동물 세계를 그린 애니메이션을 꼭 챙겨봤던 것 같다. 유치원부터 학창시절 내내 반려동물과 함께 생활하고, 동물 관련 영상물만 주야장천 보아댔으니 고등학교에 입학할 때까지도 장래희망이 사육사, 수의사, 동물 행동 교정사 등으로 자리 잡은 건 어찌 보면 당연했다. 물론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로 진학할 당시의 꿈은 동물과 환경을 심도 있게 연구하는 생태학자였으나 현실의 벽이 상당히 높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뿐더러 해가 지나면서 더욱 다양한 관심사에 눈독 들인 탓에 현재는 다른 길을 걷고 있지만, 여전히 생태 관련 다큐멘터리를 찾아보거나 동물 단체에 꾸준히 후원하는 등 세상을 살아가는 생명체의 발자취와 흔적에 관심이 많고, 애정이 깊은 편이다. 영화 <모노노케 히메>에 자연스레 빠져들 수밖에 없던 이유랄까.


지브리 특유의 아름다운 색채로 바라본 대자연의 모습은 실로 경이로웠다. 한편으로 자연과 인간의 날카로운 대립뿐만 아니라 인간과 인간 간의 대립, 즉 제국주의 시대에 만연한 약육강식의 세태와 전쟁의 잔혹성까지 다소 적나라하게 그렸다는 점에서 혹자는 이 영화를 지브리 최고의 애니메이션이라 감히 칭하고 싶다. 그러나 영화를 보면서 자꾸만 불편한 감정을 느낀 이유는 무엇일까. 작품이 끝나고 나서야 그것이 선과 악을 구분 짓는 혼동에서 비롯된 것임을 서서히 깨닫기 시작했다. 사실 인간과 자연의 갈등을 다룬 작품에서 대개 그러하듯, 이 영화 역시 처음에는 “악한 인간 vs 선한 자연”이라는 이분법적 구조로 이루어져 있으리라 무의식적으로 판단했던 것 같다. 그러나 머릿속을 떠다니던 이 당당한 편견은 단순한 흑백논리의 오류에 불과했다. 영화 <모노노케 히메>는 자연과 인간으로 하야 상황에 따라 선과 악을 동시에 넘나들게 만듦으로써 그러한 이분법적 사유의 경계를 보란 듯이 무너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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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도입부, 숲에서 등장한 재앙신은 걸음을 밟는 곳마다 녹색 풀들을 썩게 만들고 자연을 짓밟으면서 인간 마을을 파괴하려 내달린다. 에미시 부족을 책임져야 하는 후계자이자 주인공 아시타카는 마을을 지키기 위해 돌진하는 재앙신을 물리친다. 재앙의 원기가 사라지고 나서야 이윽고 ‘산의 주인’인 멧돼지의 모습이 드러나면서 “자연의 증오와 한을 인간이 알겠느냐”고 말한다. 영화에 등장하는 짐승의 모습이 유독 태곳적 모습과 같이 거대하고, 동물이 인간의 언어를 사용할 수 있으며 인간에게 쌓인 자연의 한을 ‘재앙신’과 같은 초자연적 존재가 등장하여 표출한다는 점을 미루어 볼 때 영화는 어쩌면 처음부터 인간과 자연의 첨예한 대립을 그릴 것이라 표방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또 재앙신의 저주가 아시타카에게로 이전된 것은, 마치 자연의 화(禍)가 인간의 변(變)으로 필시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걸 암시하는 듯하다. 아시타카는 재앙신에게서 전이된 죽음의 저주를 풀기 위해 여행길을 떠난다.


아시타카가 처음 도착한 마을에서 발견한 것은 창칼로 무장한 무사들에게 약탈당하고 죽임을 당하는 주민들의 모습이었다. 무사들의 무차별한 공격은 곧 아시타카에게로 향했고, 아시타카는 오른팔에 아로새겨진 저주의 기운이 불쑥불쑥 제 존재를 드러냄에 따라 가까스로 고비를 넘기며 이후 지코 스님의 도움으로 생명과 죽음을 관장하는 사슴신의 존재를 알게 된다. 아시타카와 지코 스님이 늦은 밤 끼니를 때우는 장면에서 지코 스님은 주변의 무너진 가택들을 가리키며 지금 밟고 있는 이곳의 땅도 얼마 전까지는 마을의 모습이었다고 말한다. 어떤 천재지변인지 몰라도 많은 이들이 희생되었을 것이라 애도하는 그의 말처럼, 무너진 마을은 이전의 재앙신이 지나면서 파괴되거나 옆 마을의 폭압적인 무사들에게 무참히 짓밟혔으리라 고이고이 예상해볼 뿐이다. 영화는 곧 아시타카의 처지에서 넘어와 인간과 들개 무리의 접전으로 눈을 돌린다. 들개 무리를 향해 계속해서 포탄을 쏘아대는 인간과 그에 맞서 거대한 몸집으로 인간을 공격하는 들개 우두머리 ‘모로’의 대립은 점차 격화되고, 서로를 향한 증오의 감정은 더욱 증폭된다. 급기야 갈등의 골은 타타라 마을의 수뇌 ‘에보시’가 등장하면서 더욱 깊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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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보시의 타타라 마을은 제철소를 중심으로 철과 무기를 생산하면서 유구한 산업 발전을 이룩하고 있다. 문명 발전의 동력에는 반드시 자연파괴가 그 기저에 깔려있기 마련이기에 에보시는 자연과의 대립은 물론 타타라 마을의 번영에 위기의식을 느끼는 다른 부족과의 대립도 피할 수 없게 된다. 따라서 자연을 철저히 파괴의 대상으로 보는 에보시는 자연의 입장에서 분명 ‘절대 악’의 존재일 것이다. 그러나 그녀를 단순히 해악의 존재로만 바라보기에는 상당한 인지적 오류가 동반하는데, 이는 에보시가 거리에 팔려 나온 여인들이나 나병 환자 같은 사회적 약자를 거둬들여 마을의 핵심 일꾼으로 키우는 이중적 면모를 보이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했듯 영화는 자연과 인간 사이에서 끊임없이 선과 악의 경계를 흐림으로써 관객을 지속해서 혼동시킨다. 이에 따라 공존과 파괴의 모순을 보이는 존재로서 인간계의 에보시를 비롯해 자연계의 사슴신까지 그 범위를 점차 확장해 나간다. 예컨대 ‘산의 주인들’ 즉 멧돼지 무리의 우두머리인 옷코토누시는 모로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인간과의 전쟁을 감행하면서 곧 재앙의 기운에 잠식당하고 만다. 재앙신으로 변모할 위기에 처한 옷코토누시와 총알이 몸에 박힌 채 점점 죽어가는 모로, (사슴신의 머리가 불로불사의 힘을 가져다준다고 믿어 이를 거두어들이라는) 조정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에보시 일행, 그리고 이 모든 대립 구도 사이에서 인간과 자연을 모두 끌어안고 견지하기 위해 자신의 몸을 불사하는 아시타카가 마침내 한자리에 모인다. 에보시는 사슴신의 머리를 얻는 데 성공하지만, 그 대가로 한쪽 팔을 잃게 되고 사슴신은 재앙신의 분노를 고스란히 머금은 채 ‘죽음의 신’으로 거듭나 숲에 있던 모든 정령과 생명체들의 생을 앗아 간다.


<모노노케 히메>는 자연 앞에서 한없이 무너져내리는 인간의 모습과 인간 앞에서 무참히 파괴당하는 자연의 모습을 통해 이들 앞에 절대적인 선과 악의 구분은 무의미한 것임을 은연중에 드러낸다. 결국, 자연계와 인간계가 힘을 합쳐 사슴신이 자연으로 회귀하도록 돕는 일련의 과정은 영화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대변한다. 인간과 자연이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 선에서 서로 공생하며 함께 나아가야 한다고. 더불어 자연의 폭발 과정에서 전멸된 듯 보였던 나무의 정령 고다마의 엔딩 속 회생은 인간과 자연의 공존을 통한 치유 가능성을 보여준다. 사슴신과 같은 신적 존재를 불러들이고 인간에게 아낌없는 길잡이 역할을 해주는 동시에 숲을 더욱 풍요롭게 해주는 고다마의 존재는 자연과 인간의 중립선상에 선 주인공 아시타카의 모습과도 겹쳐 보인다. 끝으로 고다마의 소생과 함께 원령공주가 끝내 아시타카와 함께하지 않은 것은, 인간과 자연이 서로에게 구속되지 않고 각자가 자생한다는(자생해야 한다는) 의지와 주체성을 나타낸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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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여전히 의구심이 들었다. 진정 인간과 자연의 공존이 가능한 것일까? 아니 어쩌면 (영화가 개봉한) 97년도보다 지금이 더욱 그 공존의 길에서 멀리 벗어나 있는지도 모른다. 2020년 1월에 방영된 한국 다큐멘터리 <휴머니멀> 코끼리죽이기 편에서는 태국의 관광 산업을 위해 코끼리에게 행해지고 있는 ‘파잔’ 의식에 대한 소개가 이루어졌다. 야생성이 강한 코끼리가 관광 산업을 내세우는 조그만 인간 앞에서 나약하리만치 고분고분해지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인간에 의해 어미와 분리된 어린 코끼리의 온몸을 기다란 꼬챙이로 계속해서 찔러 야생성을 없애고 인간에게 복종하도록 만드는 ‘파잔’ 의식을 거치기 때문이다. 이 가학적인 행위로 인해 뇌에 이상이 생기는 것은 물론 도중에 실신하거나 죽는 코끼리까지 많다고 한다. 그러나 나를 더욱 절망의 늪에 빠뜨린 것은, 값비싼 상아를 얻기 위해 머리 전체를 도려낸 코끼리의 사체 장면이었다. 도저히 믿고 싶지 않았다. 실제로 봤다면 평생의 트라우마로 남겨질 만큼 덩그러니 몸통만 남겨진 코끼리의 사체는 말 그대로 영화 속에나 나올법한 모습이었기에.


사실 인간 스스로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 ‘비인간 동물’에게 행해지는 이러한 종 차별적인 행각들은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 사회에도 이로 인한 인간 이기심의 산물이 사방에 만연해있다. 이를 다시금 자각하고 나서는 동물을 상업적으로 소비하는 산업 시설 예컨대 동물원이나 아쿠아리움, 애견카페, 고양이카페, 실내체험동물원 등에 완전히 발걸음을 끊게 되었다. 인간에게 그곳은 그저 재미를 위한 ‘놀이터’에 불과하지만, 같은 공간에서 전시와 체험의 대상이 되는 다수의 생명은 독립적인 생명체로서의 자유를 누리지 못한 채 자신을 옥죄여오는 감옥과 같은 곳에서 필요에 따라 버려지고 서서히 죽어간다. “체험동물원은 학대를 체험하는 곳”이라는 기사가 기억에 남는다. 지속적인 소비는 산업을 더욱 활성화하지만, 소비가 없어지면 산업도 죽는 법. 인간의 이기심을 앞세워 동물과의 ‘교감’을 주장하는 그 모든 시설이 사라지는 날이 오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윤아경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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