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메타포와 서사의 잿더미 속을 달리다 [영화]

이창동 감독 [버닝], 無에 가까운 서사가 남긴 잿더미를 더듬는 일
글 입력 2021.06.22 16:01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삶은 불확실성의 연속이다. 하나의 인간으로서 개인은 잠재성과 변모성을 가지고 세상에 내던져졌지만 한정된 수명 내에서 자신의 능력을 충분히 발현할지 확신할 수 없다. 또한 자신의 잠재성을 완벽하게 찾았다 하더라도 그것은 하나의 가능성일 뿐 선택의 결과를 확신할 순 없다. 어쩌면 인간은 지성을 가진 생물로의 진화에 대가로 삶의 유한성에 대한 끊임없는 번민과 삶의 불확실성이 주는 불안감을 받은 걸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사람은 삶에서 의미를 찾기 위해 노력한다. 의미는 획득 되거나 포획되는 것이고 존재의의에 토대가 되는 것이며 불확실한 삶을 지탱해주는 철근이다. 그것은 꿈일 수도 있고 하나의 인간적 성취일 수도 있으며 일상 속 소박한 행복일 수도 있다. 인간은 삶이란 거대한 심연에서 손을 뻗고 허우적거리며 의미를 건지려고 노력한다.


영화도 서사의 의미를 건지는 일이다. 영화의 프레임 속 세상은 현실의 세계를 카메라로 포착하여 담아 놓았기에 삶의 불확실성의 연장선에 있다 할 수 있다. 따라서 모든 영화의 기조는 인간 자아의 실현을 위한 의미 찾기라 할 수 있다.

 

 

 

체호프의 총, "총이 있으면 발사되어야 한다"



common (1).jpg

 

 

그런 면에서 이창동 감독의 <버닝>은 불친절한 영화다. 영화는 종수(유아인 역)의 시점에서 진행되지만 감독은 의도적으로 쇼트 하나하나에 분명한 의미를 두지 않는다. 분명 인물을 조명하고 있으나 인물의 대사, 행동, 몸짓에 분명한 함의를 두지 않아 영화의 서사가 불명확하다.

 

종수, 해미(전종서 역), 벤(스티븐 연 역)의 대화와 주고 받는 상징물들은 영화 속에서 중요한 것처럼 다뤄지다가도 어느 순간 연기처럼 의미가 사라져 버린다. 해미라는 인물은 영화 중반부 홀연히 사라지고 벤의 출신과 부의 출처는 불분명하다. 영화가 끝나고 남는건 시작부터 관객와 호흡을 같이 한 종수뿐이다. 종수의 시선으로 목격한 모든 것들이 의미를 상실하고 인물들의 '의미찾기'는 무의미해진다.

 

체호프의 총은 극 중에 등장하는 장치나 소품은 극에 어느 부분에서라도 반드시 소비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총이 등장했으면 총은 발사되어야 하고, 칼이 등장했다면 폭력이 존재해야 한다. 하지만 <버닝>은 체호프의 총을 의도적으로 비튼다. 극 중에서 등장한 모든 메타포와 소품들의 의미는 희석되거나 증발해버린다. 요컨대 종수가 획득한 모든 단서들은 오발탄이나 불발인 것이다.

 

해미의 메타포와 미장센들은 모두 오발탄으로 등장한다. 해미는 자신의 존재의의에 늘 의문을 던지던 인물이다. 그런 해미를 증명하는 것들은 모두 모호하다. 집에서 기른다는 고양이 보일이, 어릴 적 빠졌었던 우물, 종수가 선물한 시계 등 그녀를 증명하는 모든 것들의 존재가 불분명하다. 해미와 몸을 섞은 종수만이 그녀의 존재를 기억할 뿐이다. 

 

벤의 악의는 모호하다. 영화의 서스펜스를 유지하는 악인으로 묘사되지만 벤이란 인물 자체가 랜덤박스에 들어있는 물건처럼 다뤄진다. 이창동 감독은 끊임엇이 벤을 의심할 만한 요소들을 던지지만 증거는 없고 정홤만 남는다. 스크린 속에서 관객들이 볼 수 있는건 종수의 시선뿐이다. 모든 정황 속에 근거들이 둥둥 떠다니지만 결국 결정을 내리는 건 관객이 아닌 종수다. 해미가 사라지기 까지의 일련의 괄정과 벤의 언행을 생각하면서 종수는 벤이 해미를 죽였을 것이란 확신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벤을 죽인다. 

 

극 초반에 파주 집 창고에서 종수가 찾은 아버지의 잭나이프는 극 중 유일하게 체호프의 총에 상응하는 미장센이다. 종수는 아버지의 잭나이프 중 하나로 벤을 찍러 죽이며 그토록 부정하고 증오했던 아버지의 폭력성을 수긍한다. 종수의 머리 속을 부유하는 모호한 메테포와 미장센들은 어느 순간 날카로운 칼이 되어 벤을 향한다.

 

 

 

의도된 혼란스러움, 현실의 경계


 

common (2).jpg

 

 

원작인 무라카미 하루키의 <헛간을 태우다>는 하루키 특유의 상실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다. 하루키의 인터뷰를 담은 <수리부엉이는 황혼에 날아오른다>에서 하루키는 그의 서사적 메타포는 대부분 무의식에서 비롯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이 소설 속에서 적재적소에 활용될 것이란 믿음이 존재한다고 한다. 문학이라는 매체 속에서 메타포는 상징적인 무언가를 의미하므로 작가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독자에 의해 이용될 것이란 뜻이다.

 

<버닝>의 서사적 메타포는 의도적으로 혼재되어 있고 명확한 방향성을 잡고 있지 않다. 의도된 혼란스러움이다. 영화는 시각으로 보여주기 때문에 실제에 가깝고 현실에서 작용하는 원리를 담아내기 더 쉽다. 그런 점에서 <버닝>의 혼란스러운 서사는 대한민국의 과거와 현실을 날카롭게 포착하고 있다. 이창동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70년대와 지금을 비교하며 다음과 같이 답변했다.

 

"그때는 문제가 분명했고 싸울 대상이 있었다...앞으로 잘될 것이라는 희망이 있었다...지금의 문제는 그 믿음이 없어졌다는 거다. 겉으로 보기엔 별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편리해졌고 세련돼졌고, 깔끔해졌다. 그럼에도 개개인의 삶에는, 특히 청년의 입장에서는 희망이 없다. 그게 이 세계의 미스테리다."

 

아버지의 칼과 종수의 집에 펄럭이고 있는 국기, 끊임없이 들려오는 대남 방송, 청년 실업 뉴스를 보며 추레한 차림을 밥을 먹는 종수. 영화는 기성세대에 대한 청년들의 묵묵한 분노를 담아낸다. 그리고 종수는 새벽에 논두렁을 달린다. 종 잡을 수 없는 본노의 근원와 현재 자신의 위치를 찾으려는 듯이 말이다.

 

이런 배경에서 <버닝>의 모든 메타포들은 혼재된 세상을 상징하는 장치로 사용된다. 하루키의 메타포들은 쓰임새가 있는 공구박스 속 나사와 같은 존재라면 이창동 감독의 메타포는 방바닥에 어지럽혀진 잡동사니처럼 쓰인다. 필요가 있어 샀지만 어느 순간 방 한 켠에 자리 잡아 버려지기를 기다리는 물건들처럼 말이다.

 

이창동 감독이 포착한 대한민국의 현실은 청년에게 너무나 가혹하다. 일상과 비일상적인 일이 혼재되고 불확실함 투성이다. 우리가 장담할 수 있는 건 아침에 눈을 뜨고 내가 숨을 쉰다는 것을 확인하며 밥을 먹고 장담할 수 없는 미래를 준비하는 것 뿐이다. <버닝>은 그런 현실 세계를 은유하는 메타포로 흐릿해진 청춘을 그린다. 해미는 빚더미네 파묻히고 불확실한 자아에 대해 은유적인 얘기 밖에 못한다. 종수는 무엇을 쓸지 모르는 소설가이자 어릴 적 트라우마에서 못 벗어났다. 그리고 둘은 벤이 던진 혼란스러운 세계에서 허우적댄다.

 

 

 

서사의 잿더미 속에서 피어나는 것


 

common (3).jpg

 

 

그렇다면 <버닝>은 계급척 층위에 대한 청춘의 분노를 말하는 걸까.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은 우리 사회에 내재된 계층화 의식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같은 시선에서 비교하자면 <버닝>은 좀 더 다각적이다. 벤의 부유함은 과시와 오만의 표상처럼 그려지지 않는다. 그래서 더욱 불쾌하게 다가온다. 그의 여유로움이 주는 호의와 친절은 누군가에겐 불편함이 된다. 종수의 봉고트럭과 벤의 외제차 처럼, 부의 비교는 가난한 자의 옹졸한 마음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하지만 <버닝>을 계급적 담론으로만 해석할 순 없다. 그럼 아버지로 대변되는 기성세대에 대한 분노인가. 아니면 상실과 도구의 이미지로 대변되는 고정적인 여성상에 대한 비판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단순한 치정 미스테리인가. <버닝>에 어떠한 사회적 담론이나 장르적 의미를 부여하긴 어렵다. 종수의 칼 끝에 서려 있는 의미는 너무나도 많고 모호하기 때문이다.

 

<버닝>의 모호한 서사 끝에 남는 것은 무엇인가. 모호하고 불확실한 메타포들은 종수의 손 위에서 불타 없어지고 그의 손에 쥐어진 것은 아버지의 칼이다. 칼은 극 중 유일하게 종수를 '소설가'라고 불러준 벤을 찌른다. 정작 종수는 한 글자도 못 써 내려가는 소설가 지망생이었지만 벤은 종수의 글에 관심을 가지고 자신의 친구들에게 종수를 소설가라고 소개한다.

 

벤이 비닐하우스를 태우는 취미를 고백할 때 종수는 벤에게 쓸모 없는 비닐하우스를 태우는 것이냐 묻는다. 벤은 "판단 같은 건 하지 않아요. 그냥 받아 들이는거지. 걔네들이 태워지길 기다리고 있다는 걸'이라 답한다. 소설가라는 직업에 관심을 보이고 종수에게 미소를 짓는 등 벤은 종수에게 호의적인 관심을 보인다. 종수는 벤이 쓸모 있는 존재라고 규정한 유일한 존재다.

 

종수는 벤을 죽이기로 결심한 뒤 소설을 쓴다. 예술가로서의 고뇌와 완성을 의미하듯, 영화는 의도적으로 해미의 집 창문에 갇혀 글을 쓰는 종수의 모습을 담는다. 종수는 벤이 말했던 것처럼 극에서 메타포를 풀 수 있는 유일한 존재다. 그리고 소설을 써 내려감으로써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미스테리한 메타포에 대한 답을 내렸다.

 

혼란스러운 세상 속에서 비닐 하우스를 찾기 위해 질주하던 것처럼 자신이 있을 자리는 온전치 않다. 불확실한 세계에서 자신이 새길 한 글자조차 모르는 상황 속에서 벤은 종수를 소설가라고 말했다. 하지만 벤은 종수에게 있어서 자신의 비참함을 극대화시키는 인물이다. 그리고 종수는 자신의 이야기를 쓰기 위한 시발점으로 밴을 죽이기로 한다.

 

이창동 감독은 '우리는 벤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고 했다. 종수는 기성세대의 폭력성과 이데올로기를 손에 쥐고 잣니을 규정짓는 벤을 찌른다. 갈곳 없던 분노가 향한 칼 끝은 자신을 무언의 폭력으로 압박한 벤이였다. 그것은 종수가 세상에서 태어나 처음으로 자신의 의지로 무언가를 멸(滅)하고 자신을 생(生)한 최초의 행위였다.

 

 

 

버닝, 잿더미 속을 달리다


 

<버닝> 속 불의 이미지는 황홀하게 묘사된다. 벤은 캠프파이어를 불태우고, 종수는 유년시절 집을 나간 어머니의 옷을 불태운다. 종수와 벤은 무언가를 불태우는 이미지이며 불 속에서 의미를 찾고자 한다. 현대의 청춘들이 놓인 상황도 그러하다.

 

원인 모를 화재가 즐비하다. 발화점은 모르지만 자신에게 옮겨붙을지 모르는 불덩이가 우릴 감싸고 있다. 화마 속에서 청춘들은 의미를 찾으려 허우적댄다. 비록 자신이 불을 지핀 것이 아닌 타인으로 인해 생긴 화재라 할지라도. 확실한건 불이 휩쓸고 남은 것은 잿더미 뿐이다. 잿더미에서 의미를 찾지 못한다. 모호했던 메타포들 마저 연소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종수는 벤을 죽이고 처음으로 자신의 의지대로 불을 지핀다.

 

무섭도록 빠르게 발전하는 시대다. 삶은 편리해지고 윤택해졌다. 그럼에도 코 끝엔 타는 냄새가 진동한다. 무언가가 빠르게 만들어지고 빠르게 불타벌니다. 우리가 건질 만한 의미는 이미 잿더미거나 현실세계의 '벤'이 불을 질러버렸다. 불은 더욱 번져나간다.

 

청년들의 가슴엔 묵직한 분노가 치밀어오르지만 무엇을 향해야 할지 모른다. <버닝>은 질문한다. 당신의 주변에 부유하고 있는 메타포들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무엇이 화마의 원인이고 당신의 가슴 속에 있는 성냥개비와 잭나이프는 언제쯤 세상에 내던져질지 말이다.

 

 

[지정현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4.24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